< 1244화 > 1244. 다크문
"무, 무슨 마법을 쓴 겁니까?!"
"내가 쓴 게 아니다. 내 동료가 썼지."
3급 보조 마법 바인드다. 바인드는 술식을 얼마나 촘촘하게 구성하냐에 따라 위력이 달라진다. 긴박한 전투 상황에서는 사용하기 힘들고, 발동 전에 마나 떨림이 격해지기에 상대가 방심하지 않는 이상 잘 통하지 않는다. 레이크막은 승리를 확신하고 방심했기에 걸려들었다. 설마 이 타이밍에 212호가 끼어들 줄은 몰랐겠지.
'바인드의 지속 시간은 기껏해야 앞으로 4초 정도인가.'
그 정도면 충분하다. 212호가 아무 생각 없이 바인드를 썼을 리 없으니까.
쨍그랑!
창문이 깨지며 속성검이 튀어나왔다. 212호가 던진 것이다.
나는 염력으로 속성검을 낚아챘다. 동시에 속성검의 속성을 바람으로 바꾼다. 바람이 속성검의 절삭력을 높였다.
"끝이다."
"이런 젠… 커억!"
속성검이 그의 심장을 관통했다. 아무리 오러로 몸을 감싸고 있더라도, 단순히 오러만으로 염력으로 움직이는 속성검을 막아낼 순 없다.
바인드가 풀리고 나와 레이크막의 몸이 아래로 떨어진다.
[윈드]
떨어지기 직전에 바람 쿠션을 깔아 충격을 없앴다.
퍼억!
한발 늦게 레이크막이 떨어졌다. 레이크막의 몸이 파르르 떨린다. 그는 심장이 관통하고도 아직 살아 있었다. 물론 이대로 내버려 둬도 알아서 죽을 것이다.
"나는 확실한 걸 좋아해서 말이야."
오른손을 위로 까딱였다. 바닥에 떨어졌던 속성검이 하늘로 솟구쳤다. 오른손을 아래로 내린다. 오른손이 지상으로 떨어져 레이크막의 머리를 꿰뚫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창가에 앉아 있는 212호가 보였다. 그녀는 다시 가면을 썼다.
"상황은 어때?"
-31호 실력 잘 알잖아. 이미 내부는 정리됐어. 저택 외부도 정리 중이고,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3분 뒤에는 전투가 끝날 거야.
“임무 완료라는 거군."
-추가 습격이 없다면 말이야. 그보다 나한테 고맙다고 안 해?
"고마워. 덕분에 쉽게 처리했어."
-우리 사이에 별말을.
조금 황당했으나, 대충 넘어갔다. 212호는 지금처럼 가끔 실없는 소리를 한다.
본래 임무는 협상일 전까지다. 그러나 프텔가르 남작이 추가 호위를 요청했다.
임무 시간은 최종 협상이 끝날 때까지로 바뀌었다.
나는 프텔가르 남작과 함께 최종 협상 장소로 이동했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 차를 운전했고, 프텔가르 남작은 뒷좌석에 앉아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젠장. 젠장.! 레이크막, 이 배은망덕한 새끼…! 내가 그동안 얼마나 챙겨줬는데 감히 배신해? 대체 왜? 뭐가 부족해서 배신한 거지? 미쳐버리겠군, 진짜…."
레이크막의 배신이 어지간히도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입을 다물고 운전에 집중했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불똥이 내게 튈 것이 분명했다.
자동차 바퀴는 계속 굴러갔고 목적지인 광장에 도착했다.
미리 도착한 경호원과 노동자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그들 중심에는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노동자의 수가 50명도 안 되는군.'
협상 장소에 나온 노동자의 수가 생각보다 적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최종 협상의 결과는 불 보듯 뻔했으니까.
"프텔가르 남작님. 도착했습니다."
"저 비루한 노동자 새끼들이 꿈틀거리지 않는지 잘 감시해라."
프텔가르 남작이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그 맞은 편에는 노동자 대표인 빌 클랙슨이 앉았고, 그들 사이에는 지방 정부에서 나온 공무원이 입회를 섰다.
그들 사이에서 대화가 오간다.
빌 클랙슨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는 주먹으로 테이블 내려치며 분통을 터트렸다. 프텔가르 남작은 그 모습을 보며 낄낄 비웃는다. 분위기가 격해지자 공무원이 나섰다.
공무원이 주도하자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빌 클랙슨은 눈물을 흘리며 협상서에 사인했다.
프텔가르 남작은 기분이 좋아진 얼굴로 다가왔다.
"협상은 끝났다. 돌아가자."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빌 클랙슨은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망연자실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주위로 노동자들이 몰려와 그를 위로했다.
빌 클랙슨의 안색은 지나칠 정도로 좋지 않았다. 어쩌면 극단적인 선택을 고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차에 탄 프텔가르 남작이 협상 전보다 훨씬 기분 좋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택으로 돌아간다. 흐흐."
“네."
"너 말이야. 진짜 내 밑에서 일할 생각 없나? 연봉, 집, 자동차. 전부 내가 챙겨주지."
"죄송합니다."
"쯧. 쓸만한 놈을 구하려면 시간이나 돈이 깨질 텐데."
“남작님. 주제넘은 말입니다만, 거처를 바꾸시는 편이 좋지 않으시겠습니까? 노동자들이 습격해 올지도 모릅니다."
"하하. 이미 끝난 일이야. 협상이 끝났는데 뭐 하러 날 노려. 너는 똘똘한 것 같으면서도 멍청하군."
“…저택에 계속 머무실 예정이십니까?"
"보름 정도는 머물러야지. 나도 정리해야 할게 몇 가지 있으니까. 그때까지 네가 날 호위해줬으면 좋겠군."
"죄송합니다. 임무 연장은 제 권한 밖입니다."
“알아. 비누스 교관이 안 된다더군…쯧."
"남작님의 경호원들은 우수합니다. 경호원들이 남작님을 안전하게 모실 겁니다."
"돈 받은 만큼은 하겠지.”
부대로 복귀하기 전에 여유 시간이 있었다. 212호와 31호는 쇼핑을 위해 백화점으로 향했고, 나는 빈민 구역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허름한 집에서 누군가를 조용히 기다렸다.
저녁이 되기 전에 문이 열리고 빌 클랙슨이 들어왔다. 나는 집구석에서 기척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식탁에 앉아 냉장고에 서 꺼낸 맥주를 연신 들이켰다.
나는 조용히 그의 뒤로 걸어갔다. 장갑 낀 손으로 그의 머리를 붙잡는다.
"헉! 누, 누구요?!"
“알 필요 없다."
가면이 내 목소리를 변조했다.
빌 클랙슨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으로 몸을 떨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진정했다. 포기의 한숨이었다.
"…남작이 보냈소? 나를 죽이라고? 역시 좆같은 새끼구만.…."
"나는 레지스탕스 에코즈의 흑마법사다."
“에코즈의 흑마법사? 남작이 아니라 날 찾아온 이유는 뭐요?"
"네게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
빌 클랙슨은 맥주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단숨에 맥주를 단번에 마셨다.
"복수 그 말이 이렇게나 달콤하게 들릴 줄이야…. 좋소. 말해보시오."
"널 생체 폭탄으로 만들 수 있다. 폭발 권한도 네게 넘겨주지."
"…프텔가르 남작과 자폭하라는 거요? 그건… 테러잖소."
"테러를 왜 하는 줄 아나? 그 방법 외에 없기 때문이다. 네게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
빌 클랙슨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결심하더라도 문제는 남아 있소. 남작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이오?"
“프텔가르 남작 저택의 비밀 통로를 네게 알려주지."
"비밀 통로로 남작에게 가서 자폭하라는 말이군. 알아들었소."
“아니, 비밀 통로 입구는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을 거다. 너는 경호원들에게 붙잡히겠지."
“..그럼 자폭 테러도 못하는 거 아니요?"
"남작의 성격을 생각해봐라. 붙잡힌 널 비웃으려고 직접 나올 것이다."
“그놈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테지. 하지만 안 나오면? 안 나오면 어쩔 거요?"
"상관없다. 생체 폭탄의 폭발력은 저택을 통째로 날려버리고도 남을 테니까."
"크, 크큭. 당신도 좋은 사람은 아니군."
“그래서. 하기 싫나?"
"할 것이오. 어차피 조만간 죽으려고 했소. 남작을 데려갈 수 있는데 왜 거절하겠소? 각오는 이미 됐소. …이제 뭘 하면 되오?"
"가만히 있으면 된다."
왼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준비해두었던 다크홀을 꺼낸다.
아스트랄을 개방한다. 다크홀에서 흘러나온 흑마나가 내 뜻대로 움직이며 빌 클랙슨의 몸에 스며든다.
흑마나로 빌 클랙슨의 피부에 마법진을 새긴다. 옷 때문에 피부가 보이지 않더라도, 그의 몸에 새겨지는 마법진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흑마법사의 방식을 따라 하는 것만으로는 위력을 끌어올리지 못한다. 술식을 일부 변경한다. 폭발력의 술식을 최소 5번은 반복해서 새겨야해.'
마법진은 예민하다.
조금만 술식을 틀려도 마법진은 단순한 낙서가 되고 만다. 완벽하게 계산해야 한다.
'그 흑마법사는 계산했어도, 나는 가능해.'
계산은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끝냈다. 내가 해야하는 건 빌 클랙슨의 몸에 마법진을 실수하지 않고 새기는 것뿐.
스으으으.
다크홀에 저장되어 있던 모든 흑마나가 빌 클랙슨의 몸에 스며들었다. 나는 마법진이 제대로 새겨졌는지 세 차례 검토했다.
문제는 없었다.
"끝났다."
"폭발하는 방법을 알려주시오."
"강렬히 원하면 된다. 그럼 폭발할 것이다."
그에게 비밀 통로의 위치를 알려줬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오."
"바라지도 않는다."
빌 클랙슨은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나는 조용히 빌 클랙슨의 집에서 나갔다.
약속 장소에서 212호와 31호를 만났다. 그녀들은 양손에 짐을 들고 있었다. 슬쩍 살펴보니 화장품과 과자, 속옷 등이었다.
부대가 허용하는 물건들이다.
다크홀은 하수구에 버렸다. 가져가봤자 소지품 검사로 인해 빼앗길 것이 분명했다.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언젠간 또 다크홀을 얻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211호. 이것 봐봐."
나는 당황했다. 212호의 손에는 속이 비치는 빨간 망사 팬티가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31호의 팬티야."
"뭐?"
자연스레 31호에게 시선이 향했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31호는 212호의 손에서 망사 팬티를 낚아 챘다. 그리고 변명하듯 말했다.
"212호가 부탁해서 샀을 뿐이야. 212호는 검은색이야."
“아. 31호. 그걸 말하면 어떡해."
"네가 먼저 했잖아."
31호와 212호가 속옷을 가지고 투닥거렸다. 31호도 이런 것에 관심 있다는 점이 좀 의외였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31호의 전부가 아니란 걸 깨닫는다.
나는 그녀들 사이에서 뻘쭘하게 서 있었다. 화장품이나, 속옷이나 내가 끼어들 주제가 아니었다.
‘날 사이에 두고 그런 주제로 잘도 대화를 나누는군. 오랫동안 같이 살아와서 내가 남자로 보이지 않는 건가?'
내 자지를 빠는 212호를 생각하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오랫동안 같이 지내며 편해진 것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약속 시간이 되자 부대 귀환 버스가 찾아왔다. 그녀들의 대화도 끊겼다. 우리는 조용히 버스를 탔다. 이 귀환 버스를 탈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느낌도 있다.
콰아아아아앙!
버스가 도시를 빠져나가기 직전이었다.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31호와 212호가 버스 창문을 바라봤다.
“…우릴 향한 습격은 아니야."
"저기인 것 같은데… 프텔가르 남작 저택이 있는 방향 아니야?"
나는 창문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눈을 감았다.
"신경 쓰지 마. 우리 임무는 이미 끝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