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7화 > 1247. 다크문
건국 82주년 기념행사는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신도시 개발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82주년 기념행사가 TV를 통해 방송되는것을 노려 신도시를 홍보하려는 속셈이 틀림없었다.
뭐, 기념행사가 진행되는 곳은 신도시 중에서도 외곽 쪽이지만.
내가 속한 667부대는 오전 리허설 때 잠깐 참석한 일을 제외하고 계속 숙소에 있어야 했다. 이미 알 사람은 안다고 해도 667부대는 비공식 부대였기 때문이다. 667부대가 진행 중인 배틀 메이지 프로젝트도 당연히 대중에 공개할 수 없다.
우리는 교관의 통제를 받으며 의자에 앉아 멍하니 기념행사 방송을 지켜봤다.
이번 기념행사에는 여러 국가가 참석했다. 인구 100만 명도 되지 않는 작은 도시 국가에서부터 시작해 지금은 휴전 중인 하페일 공화국의 외교단, 현 세계에서 가장 강한 힘을 소유한 하이스트(Heist) 제국, 디바인 프랑스, 네오 런던 등이 참석한다.
일단 참석한 외교단은 화려했다.
내가 주목한 건 하이스트(Heist) 제국이었다.
이름부터가 강도인 이 나라는 깡패 외교로 악명이 높다. 다른 모든 국가가 하이스트 제국을 비판하고 있다. 최근에는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조용한 편이다. 하이스트 제국의 모티브는 근현대 독일이다.
'원작 게임 내용대로라면 지금 카이저는 숙청을 반복하며 천천히 쇠락하고 있지.'
TV에서 하이스트 제국 외교단이 보였다. 기깔나는 검은색 군복을 입고 있다.
'원작 뉴비 플레이어가 하이스트 제국을 선택하는 이유의 50%는 저 군복 때문이지.'
카메라는 금발의 여자를 주로 비추었다.
'브리지트. 저 여자가 기념행사에 참석했을 줄이야.'
찬란한 금발에 피처럼 붉은 눈의 여자다. 검은색 코트를 어깨에 걸친 그녀는 오만한 눈으로 사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카메라는 이윽고 하늘로 향한다. 표면에 성전기사단의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비행선 한 대가 날아와 지상에 착륙했다.
비행선의 문이 열리고 디바인 프랑스의 외교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검은색 일색의 옷을 입고 있으며, 붉은 십자가 뱃지를 착용했다.
그 중심에는 긴 녹색 머리카락의 여성이었다. 왼쪽 눈을 가린 헤어 스타일이다.
디바인 프랑스의 디바인 세인트 중 한 명, 수호 성녀 마르타다. 그녀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자켓과 바지를 입었다. 가슴 윗부분과 골반 부분이 살짝 보인다. 성녀보다는 어딘가 마피아 보스 같은 분위기를 흘린다. 검은색 자켓에는 붉은 십자가 뱃지가 붙어 있다.
그녀는 카메라가 촬영하는 도중에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외모뿐만이 아니라 성격도 성녀와는 거리가 멀긴 하지.'
그녀가 고급 자동차를 타는 것을 끝으로 화면이 다시 하늘로 이동한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런던제일검 퍽시발이 출현했다. 그가 탄 기계 말이 하늘을 달리고 있었다. 말고 어울리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으며, 등에는 대검을 장비했다. 그의 갈색 단발머리가 바람에 의해 격렬히 휘날린다. 얼굴만 보면 꽤 잘생긴 중년 남성이었다.
네오 런던의 네오 원탁의 일원이자, 런던제일검인 퍽시발이다.
방송을 지켜보는 나는 기분이 묘해지는 걸 느꼈다.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은 NPC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NPC가 사람이 되어 움직이고 있다. 같은 하늘에서 숨을 내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게임 속 세상에 있음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이후 프리셀 왕국의 국왕이 모습을 드러내며 연설을 시작했다. 브리지트, 마르타, 퍽시발에 비해 임팩트가 거의 없는 50대 중년 남성이다.
"이제 본격적인 기념행사가 진행되겠군."
근처에 앉은 비누스 교관이 말했다.
기념행사는 화려했다.
수천 명의 군인이 탱크를 끌고 도시 내부를 행진하고, 탱크 수십 대가 동시에 발표하며 화력을 선보였다. 그리고 전 세계적 으로 유명한 아이돌 걸그룹의 화려한 공연이 이어졌다.
공들여 만든 신무기를 자랑하고, 무슨 무슨 공을 세운 귀족들에게 훈장을 서훈한다. 저 훈장들이 돈과 인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에 내 오른 손목을 걸 수 있다.
"31호, 211호. 준비해라. 곧 너희 차례다."
나와 31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먼저 복장을 확인하고 가면을 얼굴에 썼다. 무기는 권총과 나이프, 속성검을 챙겼다.
준비를 끝낸 나와 31호는 비누스 교관의 뒤를 따라 대련장으로 향했다. 운동장에 가까운 곳이었다.
나와 31호는 군인의 안내를 받아 대련장의 중심으로 걸어가 서로를 바라봤다.
"방송 장비를 설치 중입니다. 오래 걸리지 않으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구경꾼들이 서서히 모여든다. 국왕이나 귀족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직접 보지 않고 TV를 통해 보려는 것이다.
내 입장에선 오히려 다행이었다. 높으신 분들이 가까이 있으면 너무 부담스럽다.
31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였다. 31호는 이 대련에 진심으로 임할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적당히 어울려주며 패배해야 했다.
..그래도 초중반까지는 진심으로 임해도 되겠지. 아무리 그래도 4급 이상의 마법을 보여줄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머릿속으로 31호가 어떻게 나올지 시뮬레이션한다.
'31호의 주특기는 바람 속성 마법과 기동성을 중심으로 한 체술. 전투 스타일은 매우 공격적. 당하기 전에 죽인다. 라는 느낌이지.'
공식적으로 교관을 제외하고 부대에서 가장 강한 건 31호다. 그녀에겐 전투의 재능이 있었다.
"방송 송출 준비 끝났습니다. 마도 특수부대원분들은 전투 준비해주시고… 아나운서!"
"네! 시작할까요?"
미모의 아나운서가 뒤쪽에서 달려왔다. 허벅지가 보일 정도로 짧고 타이트한 치마와 출렁이는 풍만한 가슴. 요즘 한창 인기를 구가 중인 아나운서였다.
내 상식으로 알고 있는 아나운서와 조금 달랐지만, 어쨌든 보고 있으면 눈이 즐거워지는 아나운서였다.
"시작해!"
카메라 감독이 말했다. 그가 어깨에 쥔 카메라에 붉은빛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이곳은 행사장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아나운서의 짧은 설명이 끝나고 카메라가 나와 31호를 찍는다.
"마도 특수부대원 2분의 전투 시범이 있겠습니다!"
아나운서의 말이 끝난 직후, 가면에서 비누스 교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투 시작.
먼저 선수를 친 것은 31호였다. 그녀가 오른팔을 위로 번쩍 들었다. 오른손바닥 위로 육안에 보일 정도의 거센 바람이 모여든다. 그리고 순식간에 주변에 불길이 일어나 바람과 뒤섞인다.
더블 캐스팅. 그것도 상성이 좋은 바람과 화염 속성의 마법이다.
'예상 범위 내다.'
바람을 통한 화염의 확산. 그녀는 공간부터 지배하려는 것이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는 31호와 비슷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아스트랄을 개방하고 술식을 계산한다.
[에어 볼]
31호가 지금 사용한 3급 바람 마법을 내 손바닥 위에 사용한다. 바람이 모여든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격류]
에어 볼에 투명한 물이 섞이고 압축된다.
31호의 공격이 날아오는 것에 맞춰 나 또한 준비한 에어볼을 던졌다. 두 개의 에어볼이 허공에 맞닥뜨리며 폭발했다.
강렬한 바람과 함께 화염과 물이 사방으로 퍼지며 영역 싸움을 벌인다. 그 여파로 새하얀 수증기가 새벽안개처럼 자욱하게깔렸다.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다.
'마법으로 수증기를 붙잡아두고 있는 건가.'
방송은 잘 보일 것이다. 이 세계의 카메라는 생각보다 더 고성능이라 수증기 따위는 큰 문제가 디지 않는다.
나를 향해 공격이 날아온다. 바람으로 이루어진 창이다. 수증기 덕분에 바람의 형태가 뚜렷하게 보인다.
[배리어]
배리어로 공격을 막고 권총을 꺼내 공격이 날아온 곳으로 방아쇠를 3번 당겼다. 3개의 탄환이 수증기를 꿰뚫고 뻗어나갔다. 맞힌 감각이 없다. 별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없다.
[디텍션]
사방에 퍼뜨리며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나는 숨을 삼켰다. 오른쪽 둘, 정면 하나, 후방 둘. 총 다섯 개의 반응을 탐지했다. 2급 마법인 디코이를 교란한 것이다.
'이 수증기 속에서 계속 싸우겠다고?'
말이 끝나자마자였다.
쾅!
폭음과 함께 내 옆에서 에어붐이 일어났다. 내 몸을 보호하던 배리어가 박살 난다. 나는 뒤로 물러나면서 재차 배리어를 사용했다. 에어붐의 여파로 수증기 일부가 사라지며 31호의 보라색 머리카락이 잠깐 보였다가 사라진다.
콰앙!
이번엔 뒤쪽에서 에어붐이 일어났다. 배리어가 또 깨졌다. 나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또다시 배리어를 발동했다.
배리어를 유지하는 건 전투 마법사의 기본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맞아줬어. 이제 반격해볼까.'
수증기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31호의 대략적인 위치가 보였다. 디코이일 가능성이 크지만, 문제는 없다. 의심되는 건 전부 공격하면 된다.
왼손을 활짝 펼쳤다. 파지지직. 손바닥의 중심에서 전류가 번뜩이며 뿜어져 나온다.
[일렉트릭 웹]
푸른 전격의 채찍이 휘둘러지며 31호의 인영을 후려친다. 인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디코이다. 나는 몸을 회전하며 바로 옆으로 전격의 채찍을 휘둘렀다.
이번엔 반응이 있었다. 채찍이 31호의 배리어와 부딪힌 것이다.
'터져라.'
일렉트릭 윕을 터트린다. 이건 마법이 아니라 내가 가진 이능을 이용한 것이다. 뭐, 보는 사람 입장에선 마법으로 보일 테지만.
일렉트릭 윕이 터지며 사방으로 뇌전이 퍼져나갔다. 수증기가 사라진다. 나이프를 손에 쥐고 나를 향해 달려오는 가면 쓴 31호가 보였다. 그녀의 몸에 배리어가 중첩되어 있다.
'근접전을 할 생각인가.'
나쁘지 않다. 근접전에서는 배리어를 유지하기 힘들다. 쓸데없는 힘겨루기를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다른 평범한 마법사라면 미쳤냐고 욕하겠지만, 나와 31호는 배틀 메이지다. 근접전의 대비는 당연히 되어 있다.
키이이잉.
31호의 나이프에서 바람의 칼날이 생겨난다.
나는 손에 쥔 권총을 집어넣고 나이프를 꺼냈다.
[워터 블레이드]
짧은 나이프에 길쭉한 물의 칼날이 생겨난다. 물의 칼날은 고속으로 움직이며 절삭력을 높이고 있었다.
원래라면 근접전은 하지 않는다. 몸이 둔한 나는 근접 전투에 대한 재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동기 중에서 근접전을 가장 못하는 게 나다.
'보통은 이럴 땐 마법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거리를 벌리지만…'
나는 이 전투에서 패배해야 한다.
고로 근접 전투를 하다가 적당히 패배할 것이다.
'마법을 좀 처절하게 사용하면, 일부러 패배한 것처럼 보이진 않겠지.'
다행히 나는 연기에 자신 있었다.
31호가 다가왔다. 그녀의 바람의 칼날과 나의 물의 칼날이 부딪친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느닷없이 들린 거대한 폭발음에 나와 31호가 동시에 전투를 멈췄다. 폭발음이 들려온 곳은 국왕을 비롯한 귀빈들이 모여있는 장소였다. 즉, 지금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테러다! 어떤 미친놈들이 테러를 저질렀다!! 특종이다! 뭐해, 아나운서! 당장 움직일 준비해!"
카메라 감독이 외쳤다. 광기에 찬 희열이 담긴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