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309화 (1,309/1,497)

< 1309화 > 1309.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멜리사 아르헨 님과 유진 프루커스 님이 입장하십니다!"

연회장 입구에서 집사가 외쳤다. 연회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무수히 많은 시선이 이쪽으로 향한다. 멜리사를 향한 시선들은 어딘가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고, 나를 향한 시선에는 적대심이 가득하다. 나는 코발트 왕국에 선전포고한 적군의 사령관이기 때문이다.

멜리사와 나는 당당히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연회의 주인공은 멜리사다. 나는 적당히 뒤로 빠져 주려고 했지만…

내 팔에 팔짱을 낀 멜리사가 놓아주지 않았다.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같이 함께해 주기로 했다.

멜리사의 주위로 귀족들이 다가왔다. 아르헨 공작가를 따르는 귀족들이다.

"아가씨 아니, …공녀님. 공작님으로부터 언질을 전해 들었습니다. 공녀님이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공녀님은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연회…. 공녀님을 이렇게나마 뵙게 되어 다행이군요."

귀족들은 멜리사에게 호의적이었다.

아르헨 공작가를 떠나기 전부터 멜리사는 인기가 많았을 것이다. 멜리사는 아름답다. 몸매도 얼굴도 흠잡을 곳이 없다. 성격도 좋은 편이고 능력까지 갖췄다. 이런 사람은 되려 싫어하는 게 쉽지 않다. 테브라에 있는 메이드 저택 내에서도 멜리사는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현 국왕인 둘리바드까지 홀딱 반하게 만들었을 정도다.

"고맙군. 나 또한 그대들과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그대들을 보고 대화를 나누니 즐겁구나.”

멜리사가 부드럽게 웃는다. 그 미소에 젊은 남성 귀족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한 눈으로 멜리사를 바라봤다.

멜리사는 여전히 내 팔에 팔짱을 끼고 있다. 내가 심심해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일까. 은근슬쩍 몸을 움직여 내 팔에 커다란 가슴을 문지른다.

연회는 시시했으나, 멜리사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프루커스 백작님이시군요. 설마 이곳에서 당신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얼마 전에 솔프메드 왕국을 점령하셨다지요. 대단하십니다. 라펠리 왕국의 백성들이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겠군요. 그런데 그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만 수십만 명에 달한다고 들었습니다. 아, 별 뜻은 없습니다. 그냥 들었던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나를 향한 대우는 비아냥 그 자체였다. 대놓고 적대하지는 않아도, 은근히 적의를 내비친다.

깽판 치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이 연회의 주인공은 멜리사였다. 내가 망칠 수는 없다.

그라우스 아르헨 공작은 거의 막바지에 등장했다. 그가 등장하자마자 분위기가 엄숙하게 바뀌었다. 이번 연회는 단순한 파티가 아니다.

"멜리사 아르헨. 앞으로 나오거라."

아르헨 공작이 말했다. 나직한 말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연회장 전체로 퍼져나갔다. 멜리사는 그제야 팔짱을 풀고 당당한 걸음으로 아르헨 공작에게 향했다.

멜리사는 아르헨 공작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르헨 공작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손잡이는 황금으로 되어있고, 검신은 문양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전투용이 아닌 의식용 검이다.

"멜리사 아르헨. 너는 대영웅 아르헨의 위대한 피를 이은 자로서…."

아르헨 공작은 진지한 얼굴로 따분한 내용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계승식을 간략하게 한다면서… 할 건 다 하는군.'

연회장 뒷문으로 들어온 하인들이 아르헨 공작과 멜리사 주위로 조용히 무언가를 갖다 놓았다. 역대 아르헨 공작들의 초상화, 비싸 보이는 꽃 등이었다. 이것도 일종의 전통인 모양이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버럭 외쳤다.

어린 남자의 목소리였다. 연회장의 시선은 모두 한 소년에게 향했다. 대충 15살 정도로 보이는 검푸른 머리칼의 소년이 아르헨 공작과 멜리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르헨 공작은 소년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베르도. 계승식을 진행 중이다.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있어라."

아르헨 공작이 다시 계승식을 진행하려고 했으나, 베르도가 다시 외쳤다.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 여자는 가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돌아와서 작위를 계승하는 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아르헨 공작가의 적법한 후계자는 바로 접니다!"

"베르도. 저 여자라고 하지 마라. 멜리사는 너의 누이이고, 새로운 아르헨 공작이다. 멜리사에게 무례를 사과해라."

베르도가 이를 꽉 물었다.

"싫습니다!"

"…베르도 아르헨…!"

아르헨 공작은 아들의 반항에 화가 난 듯했다. 이미 주변 분위기는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했다.

베르도가 움찔댔다. 그러나 곧 주먹을 꽉 쥐고 아르헨 공작에게 맞섰다. 멜리사는 끼어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긴, 여기서 그녀가 끼어들면 일이 더 복잡해질 것이다.

아르헨 공작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베르도. 아르헨 공작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건, 현 아르헨 공작인 나의 권한이다. 그 과정에서 너의 인정 따윈 필요 없다."

“제가 아버지의 후계자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후계자로서 살아왔습니다! 작위를 계승하기 위해 교육을 받고, 검과 마법을 수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 만에 모든 게 바뀐다고?!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아버지! 나를 후계자로 정한 건 아버지입니다!"

베르도는 주위에 서 있는 가신들도 노려봤다.

“여러분은 왜 아버지를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정녕 이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베르도 공자님…. 일단 진정하십시오. 이번 일은…."

가신들은 아르헨 공작의 눈치를 봤다. 아무래도 베르도에겐 상황을 설명하지 않은 모양이다. 멜리사는 영원히 아르헨 공작이 되는 게 아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작위는 의미 없어진다. 아르헨 공작가는 왕가가 될 테니까.

"베르도. 방으로 돌아가라."

아르헨 공작이 말했다. 어떠한 설명도 없는 그 명령은 오히려 베르도의 반항심을 자극했다.

"싫습니다!"

아르헨 공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기사들을 시켜 베르도를 끌어내려 할 때였다. 젊은 귀족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아르헨 공작 각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저희는 베르도 님을 지지합니다. 후계자 자리는 마땅히 베르도 님의 것이어야 합니다. 멜리사 님의 혈통과 능력은 인정하나, 멜리사 님이 아르헨 공작가를 계승하는 건 도리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딱 봐도 하급 귀족이었다. 자세한 상황을 모른다는 뜻이다.

젊은 귀족을 시작으로 다른 귀족들도 앞으로 나서며 소신 발언을 했다. 공통점은 모두 젊다는 것이다.

"저도 베르도 님을 지지합니다."

"베르도 님이야말로 아르헨 공작가의 적법한 후계자입니다."

젊은 귀족들이 베르도를 중심으로 뭉친다. 베르도의 얼굴은 아까보다 편해졌다. 그는 자신감에 찬 눈으로 아르헨 공작을 노려본다.

“이, 이놈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나서는구나…!"

가신들은 젊은 귀족들의 행태에 분노를 터트렸다. 자기 아들에게 소리치는 귀족도 있었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고 혼란이 가증된다.

이 사태에는 아르헨 공작의 잘못도 있었다.

'믿을 수 있는 가신들에게만 상황을 설명했겠지.

무엇을 우려하는지는 안다.

첩자.

어차피 알려질 정보라도 최대한 늦게 알려주고 싶었겠지.

'뭐. 수습은 곧 되겠지. 베르도를 지지하는 건 젊은 귀족들이 전부니까. 진짜 권력을 가진 귀족들은 모두 아르헨 공작의 편이다.'

아르헨 공작은 가신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상황은 빠르게 정리될 것이다.

크우우우우웅.

그것은 이상한 울림이었다.

자신의 의견을 떠퍼들던 귀족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들 모두가 천장을 바라봤다.

우우우우우웅.

천장이 물결치고 있었다. 그 물결은 사방으로 퍼졌다. 벽으로 이동하고, 땅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바닥이 흔들렸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흔들리고 일그러진 것처럼 보일 뿐이다. 실제로 천장과 바닥은 움직이지 않아. 테이블 위에 놓인 과일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게 그 증거지.'

이건 습격이다.

'마법은 아니다. 마법이었다면 내가 바로 눈치챘을 테니까. 유물 혹은 악마의 능력이다.'

후자일 것이다.

판테움 소속의 악마 계약자가 나를 보고 죽이기로 마음먹었겠지. 겸사겸사 아르헨 공작도 죽이면 둘리바드에게 큰 도움이 될 테고.

'그래도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데… 처음부터 아르헨 공작을 감시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그럼 이야기가 들어맞는다.

지금 내 곁에는 유리아가 없다. 그러나 딱히 두렵지는 않다.

"주인님. 이건 습격이다."

멜리사로부터 전음이 왔다. 멜리사와 눈을 마주했다.

“그래. 아마 악마일 거야. 어떤 악마인지는 아직 몰라. 방심하지 마."

전음을 보냈다. 우리는 긴장하며 주위를 살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천장, 벽, 바닥이 파도치기 시작했다. 주위가 대번에 소란스러워진다.

"마, 마법인가?!"

"기사들! 뭐 하고 있는 거냐! 사태를 해결해라!"

"토할 것 같아… 밖으로… 밖으로 나가야겠어."

귀족들 몇몇이 연회장의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그러나 문밖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상황이 더 악화되어갈 때 아르헨 공작이 일갈했다.

"모두 진정하라!! 실제로 땅은 움작직이지 않는다! 같잖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구역질을 느끼는 자들은 두 눈을 감아라! 기사들은 전투를 대비하라!"

아르헨 공작의 카리스마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나 상황은 여전히 심각한 상황이다.

우우우우웅.

일그러진 파동이 공간 전체를 덮쳤다. 이제는 사람마저 흐물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알겠군. 원작에서 나왔던 악마다. 확실히 이름이… 비루비루였던가.'

거울의 악마 비루비루.

실체가 없는 현상에 가까운 악마다. 자아가 없다. 따라서 악마 계약자의 의지에 따라 능력을 발동한다.

'성가신 놈이 나타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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