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2화 > 1312.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지금도 계속해서 하늘에 열린 검은 구멍으로부터 스켈레톤과 좀비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스켈러레톤과 좀비는 한 지점에 뭉쳐서 덩어리지며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아르헨 공작은 벌써 20M 이상 커진 거대 좀비를 노려보며 검을 뽑았다.
"기사와 병사들에게 맡기기엔 너무 큰 놈이군. 이놈은 내가 맡겠다. 먼저 가서 네크로맨서 놈을 상대하거라.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따라가마.”
나는 거대 좀비를 바라봤다. 거대 좀비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아르헨 공작과 필적한다. 이놈을 내버려 두는 건 위험하다.
그러나 네크로맨서를 내버려 두는 건 더 위험하다.
"부탁한다, 아르헨 공작."
"아버지.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우리는 거대 좀비를 아르헨 공작에게 맡기고 백합 정원으로 향했다.
백합 정원.
이름 그대로 백합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이었다. 푸른 달빛을 받은 백합 정원은 CG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정원 하나 끝내주네."
"돌아가신 어머니가 구상하신 정원이다. 코발트 왕국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하지. 오랜만에 보니 반갑군. 뭐, 저 흉흉한 것만 없으면 더 완벽했을 테지만."
정원의 중심, 쉼터에 네크로맨서가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애벌레에게 고통받는 악마 계약자가 소리 없이 절규하고 있다.
내 시선을 끈 것은 네크로맨서의 등 뒤다. 그의 등 뒤에 투명한 유리관이 허공에 살짝 떠 있었다. 유리관 내에는 긴 은발의 여인이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 그녀가 누군지 모를 리가 없었다.
"…유리아."
네크로맨서가 나를 쳐다본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절그럭, 촤르르륵, 절그럭, 절그럭.
그의 주위에 수많은 사슬이 있었다. 땅을 기고, 하늘로 치솟는 사슬들이다. 그 사슬의 시작점은 유리아가 들어있는 유리관이었다.
“아까 봤을 때 왠지 익숙하다 했다만… 이제보니 알겠군. 저건 마님의 그림자 마법이다.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어서 알아보는게 늦었다."
멜리사가 말했다. 그녀는 오러 마스터인 동시에 아크 메이지였다. 마법에 있어서 나 이상으로 전문가다.
나는 왼손에 화련비도, 오른손에 스톰브레이커를 쥐고 앞으로 걸어갔다. 네크로맨서가 지팡이로 땅을 찍었다.
쿵!
언데드가 나타난다.
데스 나이트 둘, 리치 하나.
좀비와 스켈레톤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최상급의 언데드들.
데스 나이트는 카일과 클로디아였고, 리치는 샤르넬이었다. 리치의 로브가 샤르넬의 것이어서 쉽게 알아봤다.
"네크로맨서."
본래라면 문답 무용으로 달려들어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놈은 어차피 가짜다. 대화를 나눠봤자 의미 따윈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유리아가 왜 죽어 있는 거냐? 네가 죽인 거냐?"
네크로맨서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내가 유리아를 죽였냐고? 그딴 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너라면 유리아를 죽일 거냐?"
“그럼 질문에 대답해라. 유리아가 왜 죽어 있는 거냐?”
"너한테 대답할 이유는 없다."
네크로맨서가 지팡이로 나를 가리켰다. 사슬과 함께 언데드들이 내게 공격해 온다.
"주인님!!”
멜리사가 마법을 사용했다. 땅에서 석벽이 치솟아 사슬을 막는다. 소용없었다. 사슬은 벽을 꿰뚫고 내게 날아온다.
나는 양손에 쥔 무기를 놓았다. 화련비도와 스톰브레이커가 융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이어 잘게 부서진 스톰브레이커는 내 몸에 달라붙어 갑주가 되었다.
데스 나이트 카일과 클로디아가 동시에 달려든다. 나는 양손에 검을 쥐고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멜리사. 네가 리치를 맡아."
리치 샤르넬이 뒤에서 화염 마법을 사용한다. 화염구 수십 발이 어두운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다. 멜리사는 마법으로 바위를 날려 화염구를 격추했다. 펑펑펑! 허공에서 화염이 폭발했다.
“어려운 부탁을 하는군. 저 리치, 못 해도 아크 메이지 상급이잖나."
데스 나이트들이 양쪽에서 검을 휘두른다. 나는 스톰브레이커를 믿고 방어를 포기했다.
카앙! 깡!
스톰브레이커는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약간 찢어지긴 했으나 데스 나이트의 검을 버텨냈다.
파지직.
양손에 쥔 검에서 붉은 번개가 번뜩인다.
뇌천류(雷天流) 뇌광(雷光).
두 줄기의 섬광이 데스 나이트들을 베고 지나간다. 카일은 목이 떨어졌고, 클로디아는 상반신과 하반신이 양단되었다. 양팔이 떨린다. 본래 뇌광은 이렇게 사용하는 기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길은 열렸다. 무리를 한 보람이 있어.'
네크로맨서를 향해 달려가려고 할 때였다. 머리가 없는 카일의 몸통이 내 앞길을 막아서고, 하반신이 없는 클로디아의 상반신이 팔로 땅을 기어와 내 등에 칼을 꽂으려 한다.
클로디아는 무시하고 카일의 옆을 지나친다. 카일의 검이 내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갑주 덕분에 무사하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카일의 검기 일부가 갑옷 내부로 침투했다. 내가중수법의 묘리를 검기에 담은 것이다.
'과연 카일. 검에 대한 재능은 죽어서도 여전하군.'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무시하고 정면의 네크로맨서를 노려본다.
네크로맨서의 발치에서 그림자가 일렁거린다. 그림자는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그림자에 먹힌 땅이 늪처럼 질척거린다.
"이런 씨발."
발목이 그림자 늪에 빠졌다. 움직이기가 영 쉽지 않았다.
"뭘 머뭇거리는 거냐!"
리치 샤르넬을 상대하던 멜리사가 외쳤다. 그녀의 마법이 땅에 스며든다. 직후, 땅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흙과 돌멩이와 함께 그림자 늪이 비산했다. 땅은 원래의 단단한 것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나아가며 양손에 힘을 주었다.
뇌천류(雷天流) 질풍신뢰(疾風迅雷).
[가속을 사용합니다. 10분 동안 유지됩니다. 남은 스택: 4]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3]
찰나까지 사용한다.
나는 단숨에 놈을 죽일 생각이었다.
촤르르륵.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사슬이 갑작스레 나타나 내 발목을 휘감는다. 그에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나는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발목을 휘감은 사슬을 노려보며 검을 휘두른다. 사슬이 잘리고, 또 다른 사슬이 반대쪽 다리를 구속한다.
균형을 잃고 몸이 흔들리는 순간, 사방에서 사슬이 쇄도해 내 몸을 휘감았다.
‘…젠장. 사슬 따윈 무시하고 검을 휘둘러야 했는데….'
흥분을 가라앉힌다. 아직 수단은 있다. 오히려 잘 된 것일지도 모른다. 잘만 하면 방심을 이끌어낼 수 있을 테니까.
'이럴 때는 연기 특성이 있어서 다행이군.'
연기 특성은 의외로 전투에도 도움이 된다. 예를 들면 페이크를 걸 때다. 수준이 비슷하면 거의 9할 이상의 확률로 상대를 속일 수 있다.
"주인님!!"
멜리사가 외친다. 그가 나를 구하려 했으나, 리치 샤르넬의 방해받았다. 그녀는 샤르넬을 상대하는 것만으로 벅차 보였다.
네크로맨서는 멜리사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내 몸을 휘감은 검은 사슬을 조종했다. 콰득콰득! 검은 사슬이 으스러뜨리며 찢는다.
"…단순히 마법 사슬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사슬이냐?"
“그림자 사슬 글레이프다. 고대의 그림자 마법사가 사용했던 유물이다."
“그런 유물도 있었나?"
“이 세상은 넓다. 네가 알고 있는 정보는 이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콰드드득!
갑주가 찢어졌다. 네크로맨서는 사슬을 이용해 바지 주머니에 있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는 기대감이 담긴 눈으로 조심스럽게 내 스마트폰을 잡았다.
'지금… 아니, 아직이다. 놈은 아직 완전히 방심하지 않았다.'
네크로맨서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스마트폰을 켰다. 그리고 엄지를 이리저리 움직여 화면을 전환한다.
나는 그 움직임이 무엇인지 알았다. 유희 생활 어플을 찾고 있는 것이다.
'유희 생활 어플 아이콘이 안 보이는 건가? 딱히 숨겨둔 것도 아닌데.'
그의 손가락이 유희 생활 어플의 아이콘을 툭툭 두들긴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니 유희 생활 어플의 위치를 보고 누르는게 아니라, 위치를 짐작하고 누르는 것이다. 그러나 유희 생활 어플은 네크로맨서의 손가락에 반응하지 않는다.
“……망할."
그것은 지독한 절망감이 서린 목소리였다.
[천심(天心)을 발동합니다. 1분 동안 지속됩니다.]
내 전신을 휘감은 그림자 사슬이 풀어진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2]
네크로맨서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진다. 역시 놈은 내 스킬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왼손에 쥔 검으로 네크로맨서의 가슴을 찌르고, 오른손에 쥔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대로 놈의 목을 치려는 걸 멈췄다.
놈이 모든 걸 포기한 것처럼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너. 정말 내가 맞냐? 겨우 이 정도로 그냥 죽겠다고? 내가 너라면 끝까지 발버둥 쳤을 거다."
"나는 가짜다. 유희 생활 어플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지만.. 방금 그 기대마저 무너졌다. 나는 유리아를 살릴 수 없다."
"…어차피 죽을 생각이라면, 내 질문에나 대답해라. 왜 유리아가 죽은 거냐?"
네크로맨서가 다시 눈을 떴다. 그는 피처럼 붉은 눈으로 날 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그는 꿰뚫린 가슴을 손으로 움켜쥐며 유리아가 담긴 유리관에 손을 뻗었다.
"유리아는 마왕에게 살해당했다. 영혼이 소멸하여 간신히 그녀의 육체만을 가져왔다. 영혼이 소멸당했기에 사령술로도 그녀를 살릴 수 없었다. 유희 생활 어플의 힘만 있었다면… 그녀를 살릴 수 있었겠지만….”
"마왕에게 당했다고? 마계로 쳐들어갔나?"
"유진 프루커스. 아니, 성유진. 이미 원작은 뒤틀어졌다. 마왕이 마계에 있다는 선입견은 버려라."
"……설마. 마왕이 인간계에 있나?"
"내 기억에는 마왕이 인간계에 있었다. 정확한 위치는 나도 모른다. 다만, 짐작 가는 곳은 있다."
"거기가 어디냐?"
"네놈에게 말해주기 싫다만은…."
네크로맨서는 유리관 속의 유리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계의 유리아를 위해 말해주지. 미궁 도시 라비트. 아마 그곳에 마왕이 있을 거다. 그림자 사슬도 라비트 미궁 최하층에서 얻었지. 그림자 사슬 글레이프는 유리아에게 줘라."
“그 외의 다른 정보는 없어? 프리실라나 둘리바드는 어떻지?"
"더 이상 말해줄 시간은 없다.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고… 사라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는 지팡이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정확하게는 밤하늘에 뜬 푸른 달을 가리킨다.
촤르르르르르르륵!
땅바닥의 그림자 속에서 수백 개의 사슬이 달을 향해 치솟는다.
“그곳에 숨어 있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나를 가지고 논 대가를 치러라. 대가는 네놈의 목숨이다."
공간이 일렁거린다. 그리고 푹푹 거리는 무언가를 꿰뚫는 소리가 연신 울린다.
나는 천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일렁이는 공간 속에 숨어 있는 형체 없는 악마가 수백 개의 사슬에 꿰뚫려 죽어가고있다.
'그림자 사슬 글레이프…. 형체 없는 악마를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물건…. 터무니없는 물건이군. 꼭 찾아서 유리아에게 줘야지.'
악마가 죽어가면서 아르헨 저택의 미궁화가 풀린다. 동시에 네크로맨서의 몸이 발끝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사라진다.
네크로맨서는 내겐 시선조차 주지 않고 유리관을 열었다. 그는 조용히 유리아의 시체를 꽉 끌어안았다.
"성유진. 나 같은 실수는 하지 마라."
네크로맨서는 유리아와 함께 사라졌다. 날뛰던 좀비들도 없어졌다. 고요해진 백합 정원에는 서늘한 바람만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