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5화 > 1335. 고스트 로맨스
아파트 1층에서부터 시작된 화재는 빠르게 번져 위층으로 올라간다. 매캐한 검은 연기가 하늘을 채우고, 열기로 인해 주변의 공기는 뜨겁다.
아파트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화재 경보음이다. 나는 활활 타오르는 아파트를 보다가 일단 뒤로 물러났다. 근처에 있는 나무에 몸을 숨긴다. 아파트 내에 있던 학생들이 헐레벌떡 뛰쳐나온다.
그리고 아파트 밖에서 연기를 본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있어 화재 현장은 좀처럼 볼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조금 지나자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소방차가 출동한 것이다. 소방관들은 화재를 제압하며 아파트 내부로 뛰어 들어갔다.
아파트 귀신들은 힘을 쓰지 못한다. 귀신들은 양기에 약하다. 즉, 불에 약하다. 아파트 전체가 불타오르니 힘이 약해질 것이고, 바깥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아파트 밖으로 나올 수도 없다. 사람은 모이면 모일수록 양기를 뿜어내는 생물이다.
수십 명의 인간에게 인식되는 순간, 귀신은 쏟아지는 양기를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귀신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대놓고 몸을 드러내며 화재를 지켜봤다.
"끼아아아아아악!"
아파트에서 비명이 들린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아직 사람이 갇혀 있나 봐…."
"어떡해…."
"후우. 전부 무사해야 할 텐데."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파트를 바라봤다. 소방관이 아파트 내에서 기절한 사람을 데리고 나오자, 사람들은 영웅을 맞이하는 것처럼 함성을 내질렀다.
나는 삐딱하게 고개를 들었다. 방금 들은 비명, 그건 인간의 것이 아니라 귀신의 것이었다.
『†당신은 다수의 귀신을 태워 죽였습니다.』
『†당신의 터무니없는 퇴마력에 인근의 귀신들은 공포에 질립니다.』
『†다수의 귀신이 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옥에서도 불탈 것입니다.』
『†이 지역의 귀기도가 대폭 하락합니다.』
알림창을 확인한 나는 몸을 돌렸다.
귀기도가 낮아져서 그런 걸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방화가 문제 되지 않냐고?
문제없다.
이 세계의 경찰은 무능하고, CCTV의 존재 등 전부 확인한 뒤에 일을 저질렀다. 증거는 없을 것이다. 나를 의심해도 잡아떼면 그만이다.
나는 지다혜의 집으로 들어갔다. 지다혜와 밤새도록 떡 치다가 등교했다.
"크흐흐. 성유진. 어제 기숙사 아파트에 화재가 일어난 건 알고 있나?"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신오정이 말을 걸어왔다.
그 화재의 원인이 나다. 라고 대놓고 말할 수 없었기에 모른 척했다.
"몰라. 별 관심도 없어."
“그럴 줄 알았다. 네가 관심 있는 건 퇴마뿐일 테니까."
퇴마도 관심 없었다. 내가 퇴마 활동을 하는 건 히로인 공략을 위해서다. 귀기도를 낮춰야 히로인들에게 씌인 귀신의 힘이 약해진다.
"귀신과 관련된 정보는 없냐?"
"어제 화재가 난 기숙 아파트. 그곳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다. 기숙사를 이용하는 학생 중 한 명은 매일 밤 투신 자살하는 꿈을 꾼다더군. 또 다른 학생은 복도에 서 있는 귀신을 봤다고 한다. 샤워실에서 긴 머리카락 귀신을 보고 기절한 학생도 있다고 한다."
"아파트가 불탔으니 이제 그 귀신들의 소문도 사라지겠군.”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신오정은 그런 나를 빤히 쳐다봤다.
“…혹시 네가 아파트에 불을 지른 건가? 귀신들을 퇴마하기 위해?"
"야, 돼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어떤 미친놈이 귀신 퇴치하겠다고 불을 질러? 벼룩 잡자고 초가삼간 다 태우는 꼴이잖아."
"음…. 하긴 그렇지. 방화의 흔적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내가 좀 예민했다. 사과하마.”
신오정은 내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나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벼룩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운다.
벼룩을 죽이기 위해서 좀 태울 수 있는 거 아닌가.
"다른 귀신에 대한 정보는 없냐?"
"흠. 어제 살인 사건이 또 발생했다."
“그 편의점 살인 사건?"
"맞다. 편의점 살인 사건의 범인이 저지른 범행이다. 어젯밤에 태권도장의 사범 2명이 참살당했다. 물론 이번에도 범인에 대한 단서는 없다. CCTV는 물론이고 블랙박스에도 범인은 찍히지 않았다."
"너는 이번에도 귀신의 짓이라 생각하는 거냐?"
"범인은 대놓고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그런데도 경찰은 범인의 꼬리는커녕 단서조차 제대로 수집하지 못하고 있다. 귀신의 짓이 아니면 말이 안 된다. 이건 120% 귀신의 짓이다."
신오정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퇴마사도 아닌 주제에 감이 제법 좋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신오정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귀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과 귀신을 직접 퇴치하는 일은 엄연히 다르니까.
"자, 지옥의 육단봉… 넌 어떻게 할 거냐?"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말라고. 살인 사건의 범인은… 나도 딱히 방법이 없어. 귀신이라고 해도 어디서 지랄할지 모르니까. 추적이 어려워.”
"과연 퇴마하려면 일단 귀신을 맞닥뜨려야 한다는 건가."
“그러니 일단 다른 귀신부터 처리해야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놈을 퇴치할 수는 없으니까."
“그놈을 내버려 두면 희생자가 계속 발생할 것이다."
“그럼 어쩌자고? 다시 말하지만, 우린 놈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놈을 쫓겠다고 시간을 소모할 수는 없어. 그동안 다른 귀신들을 퇴마하는 게 더 이득이야."
“으음…. 역시 문제는 귀신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다는 건가…."
나는 힐끗 시선을 앞으로 보냈다.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추정되는 유세미를 바라본다. 반장인 유세미는 다른 학생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맞다. 성유진. 우리 학교의 삼대 미녀 중 한 명인 지다혜가 어제와 오늘 모두 결석했다더군. 혹시 너와 관련 있는 건가? 너도 어제 결석하지 않았나."
"관련 없어."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삼대 미녀.
히로인 3명을 뜻하는 말이었다. 유세미, 지다혜, 설지영. 학교 최고의 미녀인가, 뭔가는 미연시 게임에서는 흔한 설정이었다.
"뭐, 네가 그런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서 오늘은 어떤 귀신을 퇴마할 거지? 학교 수영장에 물귀신이 나온다는 정보가 있다."
"물귀신? 퇴치하기 쉬우니 네가 해라.”
“…뭣, 내가?!"
"간단해. 물귀신이 나오는 시간에 가서 소독제를 수영장에 존나 뿌리면 돼."
"염소로 물귀신을 퇴치한다고?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구충제로 아귀를 퇴치하는 데 뭘.”
“으음. 그렇군. 하지만 난 전문 퇴마사가 아니다. 이건 네가 해야 하지 않나?"
신오정은 잔뜩 쫄았다. 굳은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린다.
"퇴마사의 매니저가 되겠다고 한 주제에 약한 소리 하지 마라. 물귀신 정도는 혼자서 해치워."
"하지만… 귀신은 귀신이다.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이 상대할 수 있을 리가….”
"물귀신은 수영장 밖으로 못 나와. 수영장에서 떨어져서 염소를 뿌리는 일 정도는 너도 할 수 있잖아?”
“…겨우 그런 걸로 물귀신을 퇴치할 수 있다는 소리는 여전히 잘 믿기지 않지만… 구충제로 아귀를 퇴치하는 걸 직접 경험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군. 알겠다. 네 말대로 물귀신은 오늘 내가 퇴치하지. 그래도 만에 하나. 실패할지도 모르니 유언장을 미리 써둬야겠군…."
볼펜을 든 신오정은 진지한 얼굴로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정면을 바라봤다. 오늘은 유세미를 공략할 생각이다.
방과 후에 유세미와 함께 학교를 나섰다. 우리는 집이 아니라 시내로 향했다. 간단히 말해 데이트다.
기본적인 호감도가 있어서 그런지 유세미를 꼬시는 일은 쉬웠다. 그냥 학교 밖에서 놀자고 했을 뿐인데, 유세미는 바로 내 제안을 수락했다. 내 말을 의심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다.
내 옆에서 걷는 유세미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유진이, 너랑 이렇게 놀러 가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오늘은 재밌게 놀자."
"다음에도 같이 놀면 되는데 뭘."
나는 유세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유세미가 몸을 흠칫 떨었다. 내 손을 떨쳐내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뺨을 살짝 붉혔다.
"다음에도 같이…. 으응. 언제든지 말만 해."
“시간은 있어? 넌 검도부고, 공부도 해야 하잖아."
"많은 시간을 내긴 힘들지만… 방과 후에 3~4시간 정도는 놀 수 있어."
"오, 그래? 오늘은 언제까지 놀 수 있는데?"
그녀는 내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했다.
"네, 네가 원하는 대로 놀 수 있어. 오늘은 시간이 많으니까…."
"새벽까지 놀 수 있다는 거네? 그렇지?"
새벽.
그 단어에 흠칫 놀란 유세미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함께라면 괜찮아."
"부모님이 걱정할 텐데?"
"친구 집에서 자고 간다고 하면 돼."
"그래? 그럼 오늘은 신나게 놀아볼까. 그전에 앞서서… 너한테 뭔가를 선물해주고 싶은데…. 옷이 좋겠다. 받아 줄 거지?"
"옷? 유진이 네가 직접 골라주는 거야?"
“예쁜 걸로 골라줄게."
"기대되네. 근데 돈은 있어?"
나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학교 매점에서 잔액을 확인했는데 제법 돈이 많았다. 퇴마 활동을 통해 번 돈인 모양이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시내에 있는 옷 가게에 들어갔다. 정확하게는 여성 속옷 가게다.
“여, 여기는…!"
유세미가 당황한다. 포니테일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세차게 흔들린다.
보통 남자들은 여성 속옷 가게에 들어가기 힘들다. 아니,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자가 함께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는 유세미의 허리를 붙잡고 당당하게 여자 점원의 앞으로 다가갔다. 여자 점원이 우리를 보며 웃는다.
“어서 오세요. 커플이신가요? 보기 좋으시네요."
"네. 여자친구에게 속옷을 선물하려고요. 좀 섹시한 거 없어요?"
우리는 교복을 입고 있었으나 성인이었다. 내쫓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 저쪽 코너에 원하시는 제품들이 많아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제가 골라서 선물해주기로 했거든요."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탈의실은 저쪽에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직도 딱딱하게 얼어 있는 유세미를 데리고 섹시 속옷 코너로 향했다. 성인용 속옷이 상당히 많았다.
나는 주위를 살피며 CCTV를 확인한다. 매장 크기에 비해 CCTV의 수는 적었다. 사각지대가 많다. 나는 흡족하게 웃었다.
“세미야. 속옷 좀 보여줘."
"뭐, 뭐?!"
"지금 네가 어떤 속옷을 입고 있는지 궁금해. 보여줄 수 있지?"
"네, 네 부탁이라면…."
유세미는 숨을 삼키며 치맛자락을 잡고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