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4화 > 1484. 팔라딘: 악멸의 여정
첨탑을 내려가는 와중이었다.
샐로트 성의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언데드의 잔해와 타락자들의 시체를 발견한 모양이다. 아직 내 존재 자체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경계심만 더 올라갔을 뿐이다.
나는 더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성창만 얻으면 된다. 그럼 이 판은 끝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잠시만요! 천천히, 천천히 좀 가시죠!"
내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던 폴라리스 공녀가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발을 멈췄다. 나와 그녀의 신체 차이가 있어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답답함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금 기다리자 그녀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의 뒤로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유령이었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폴라리스 공녀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끼아아아아악!"
유령이 비명을 지르며 소멸한다. 다행인 점은 유령의 비명이 계단 안에서만 울렸기에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
폴라리스 공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왜 그러지? 유령을 보는 건 처음이 아닐 텐데…. 설마 비명 따위에 놀란 건가?"
"…팔라딘께서 절 죽이려고 하는 줄 알았어요."
"너는 타락자가 아니다. 죽일 이유가 없다. 아니면… 악마와 붙어먹은 이단인가?"
"절대 아니에요! 그 말 취소하세요! 그건 저에 대한 모욕이에요!"
"취소하지. 땍땍거리지 말고 따라와라. 지금부터 속도는 낮추겠다. 죽기 싫으면 내 뒤에만 있어라."
첨탑을 나섰다. 타락자와 언데드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대부분 샐로트 성의 입구로 향한다. 타락자들은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빌어먹을…! 성기사놈들이 입구로 몰려왔다! 이 시체놈들아! 빨리빨리 움직여라! 지치지도 않는 놈들이 왜 이렇게 굼뜬거냐!"
"무기를! 무기를 준비해라!"
"악마님들의 명령이다! 입구를 죽어도 지켜라! 농성해라!"
성 밖에 있는 성기사들과 이단심문관들이 이변을 눈치채고 주의를 끄는 것이다. 덕분에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됐다. 나는 폴라리스를 데리고 성의 지하로 향했다.
타락자가 지하 창고에 쌓인 무기를 빼내고 있다. 언데드에게 무장시킬 계획이겠지.
나는 기척을 숨기고 타락자의 등 뒤로 다가갔다. 왼손으로 타락자의 입을 막는 동시에 검을 찔러 넣었다. 타락자 하나를 깔끔하게 처리했다.
폴라리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겨우 이런 일로 멘탈이 흔들리면 앞으로가 귀찮아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담담했다. 차가운 눈길로 죽은 타락자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신앙심은 내 예상보다 더 단단했다. 나는 지하로 나아갔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타락자와 언데드가 보였다. 나는 놈들을 죽이면서 전진했다. 처음의 타락자처럼 몰래 암살하지 않았다. 이미 지하 깊은 곳으로 왔다. 놈들의 비명이 지상으로 빠져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전부 죽인다. 이놈들 하나, 하나가 경험치다.'
구석에 숨어 있는 놈들까지 찾아 죽였다.
"……."
날 보는 폴라리스 공녀의 눈이 불손하다.
"할 말이라도 있나?"
"…급한 거 아니었나요? 왜 쓸데없이 동선을 낭비하는지 모르겠군요.”
"아무리 급하더라도 악마와 타락자들은 죽여야 한다. 그것들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필요가 없다. 아니면 뭐지. 너는 이것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하는 거냐? 너는 이단이냐?"
검을 그녀의 목에 겨눴다. 그녀가 놀라 뒷걸음질 쳤다.
“아니, 아니에요! 제가 이단일 리 없잖아요! 팔라딘이 옳아요! 악마와 타락자들은 이 세상을 좀 먹는 벌레들이죠! 놈들은 전부 죽어야 해요! 헤리안느 여신님 만세! 교단 만세! 팔라딘 만세!"
“미안하군. 잠깐 너의 신앙심을 의심했다."
검을 내렸다. 그러자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주셨으면 됐어요. …그런데 정말 절 죽이려 했어요?"
"이단은 죽인다."
“…성창의 봉인을 풀고 싶지 않으셨나요?"
"봉인을 풀 방법은 알고 있다."
폴라리스 공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떨리는 몸을 감싸듯이 잡으며 두려움에 찬 눈으로 날 바라봤다.
“…제가 죽으면 아버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어스테일 공작은 네가 죽은 걸 알기는커녕 이곳에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그리고… 딸이 이단이라면, 그 아비도 이단일 가능성이 높지. 네가 이단이라면 나는 이후에 너의 가족을 찾아가 심문할 것이다."
"……."
폴라리스 공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곳은 넓은 공간이었다. 온갖 부정한 기운들이 모여 있었다. 공간의 중심에는 하나의 창이 거꾸로 땅에 박혀 있었다. 창은 마치 회색의 석상 같았다.
"저, 저건 뭐죠?"
폴라리스 공녀는 성창 로티스의 주변을 가리켰다. 기이한 도형과 인간의 시체가 마법진을 연상시키듯 펼쳐져 있었다.
"보면 모르나? 악마들의 개수작이다."
“그건 알아요. 하지만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뻔하지. 성창을 없애려는 거다. 놈들에겐 성창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성가실 테니."
"성창이 부서진다고 부서질 것 같아요? 성창은 절대 부서지지 않아요."
“이 세상에 절대란 없다."
나는 마법진 위로 발을 들이밀었다.
바로 반발이 들어왔다. 성창에 쏟아지던 부정한 기운이 내게 달려들며 잠식하려 든다.
'홀리 오라!'
내게서 신성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황금색 기운이 검붉은 부정한 기운을 상쇄시켰다. 나는 전신에 쏟아지는 압력을 견디며 성창을 향해 다가갔다.
성창을 손에 쥐었다. 돌처럼 변해 있던 성창이 원래의 새하얀 모습을 되찾는다. 허나 아직 봉인이 걸려 있기에 지금은 그저 평범한 창에 불과했다. 창끝에 홀리 오라를 담아 휘둘렀다. 성스러운 기운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부정한 기운을 모조리 쓸어낸다.
'한순간 홀리 오라가 증폭됐군. 봉인되어 있어도 성창은 성창이란 건가.'
나는 폴라리스 공녀에게 다가가 성창을 내밀었다.
"봉인을 풀어라.”
"알았어요."
그녀는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여기까지 오던 중에 주운 물건이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단검의 칼날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피를 성창의 칼날에 뿌렸다.
성창이 화려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봉인이 풀린 것이다.
"피를 먹고 봉인을 푼다라. 성창이 아니라 마창같군."
“…저희 가문의 사람이 아닌 다른 이가 성창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기 위한 조치죠. 그뿐만이 아니라 성창은 사람을 가리는 편인데… 성창이 얌전한 걸 보니 팔라딘님을 인정하는 모양이군요."
"성창이어도 결국 여신님의 힘으로 만들어진 물건이 아닌가. 나는 여신님의 계시를 받은 팔라딘이다. 따라 와라. 위로 간다."
“이젠 뭐 할 거죠?”
“샐로트 성의 입구를 연다. 성기사와 이단심문관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너는 성 밖에서 성기사들과 함께 전투가 끝날 때까지 대기하라."
"그렇게 하죠. 알고 계시겠지만… 성창의 힘은 무한한 게 아니에요."
성창 로티스.
힘을 쌓고 방출하는 개념이다.
지금 로티스는 아주 오랫동안. 시간으로 따지면 대충 200년 이상 힘이 쌓인 상태다. 도중에 어스테일 가문이 찔끔찔끔 사용한 모양이지만, 지금 어마어마하게 쌓인 힘을 보면 티도 안 난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가자."
그녀와 함께 위로 올라간다.
지상으로 도착하자마자 적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성창 때문이었다. 화려한 빛과 신성력을 내뿜으며 존재감을 발산하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저, 저 갑옷은…! 팔라딘! 발렌티어의 팔라딘이다!"
"팔라딘이 성창을 들었다!"
"악마님들은?! 악마님들은 어디에 계시냐! 악마님들께 도움을 청하라!"
"언데드! 빨리 팔라딘을 공격해라! 어서!"
홀리 오라를 일으켰다. 홀리 오라가 성창과 반응한다. 나는 창날에 맺힌 신성한 힘을 느끼며, 적들을 향해 성창을 휘둘렀다.
거대한 기운이 적들을 휩쓸었다. 수십 마리의 언데드와 수십 명의 타락자가 단숨에 쓸려나갔다.
"아주 좋군.”
보이는 놈들을 싹다 죽이면서 입구로 향했다. 기관을 조작해 성문을 열었다.
"성문이 열린다!"
"팔라딘께서 문을 여셨다!"
"돌격해라! 사악한 것들을 섬멸하라!!”
성기사와 이단심문관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성안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신속하게 언데드와 타락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언데드는 끝까지 싸웠고, 타락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단심문관들이 끈질기게 타락자들을 뒤쫓아가 죽였다.
나는 근처에 있는 성기사 둘을 불렀다.
"악마들에게 잡혀 있던 폴라리스 공녀다. 성 밖으로 빠져나가 공녀를 지켜라."
"팔라딘의 명을 받듭니다!"
이것으로 폴라리스 공녀의 안전은 확보되었다. 어스테일 가문에 빚을 지게 한 것이나 다름 없다. 나는 성창을 꽉 쥐고 성의 중심으로 향했다. 성기사들에겐 성 곳곳에 흩어져 있는 적들을 처리하라 명했다.
그랜드홀로 향하는 복도에는 피로 가득했다. 대악마 부활 의식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안심했다.
'너무 빨리 온 게 아닌가 싶었지만… 다행이군.'
내 목적은 대악마를 죽이는 것이었다. 대악마를 죽이기 위해서는 우선 대악마가 부활해야 했다.
'의식은 성공해야 한다.'
모든 상황은 내 계획대로 향하고 있다.
그랜드 홀의 입구로 도착했다. 문에서부터 부정하고 사악한 기운이 느껴진다. 손에 힘을 주어 커다란 문을 열었다.
음습한 곳이었다. 그 중심에 제단이 세워져 있고, 주위에는 인간의 시체가 가득하다. 제단 주위에는 열이 넘는 악마들이 모여 있었다. 악마들은 나를 힐곳 보더니 의식에 집중했다. 악마 중 하나가 제단 위로 스스로 올라간다.
"수톤이여! 이 존재를 그대에게 바치겠나이다! 으아아아아아아!"
악마는 스스로의 심장을 뽑아내 제단 위에 올랐다. 악마의 심장과 악마의 육체가 불타오른다. 제단 주위의 악마들이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당장 헛짓거리를 멈춰라! 이 버러지 새끼들아!"
홀리 오라를 퍼뜨리며 외쳤다. 악마들이 움찔거렸으나, 의식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불청객이 찾아오셨군요. 보시다시피 지금 저분들은 의식을 진행하느라 매우 바쁩니다. 발렌티어의 팔라딘, 당신은 제가 상대해 드리죠."
검은 로브를 쓴 남자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해골이 장식된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바바로약스! 인간을 배신한 악마! 잘도 그 낮짝을 내 앞에 내미는구나!"
“배신? 저는 인간의 편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라고 해서 모두 헤리안느 여신을 믿는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물론 같은 편도 아니지요.”
"악마에게 영혼을 판 주제에 당당하군. 수치심도 모르나?"
"영혼을 판 게 아닙니다. 진화한 것이지요."
“진화? 웃기는군. 그건 타락일 뿐이다. 또한 타락의 끝은 오직 죽음뿐이다. 네놈을 죽이고 뒤에 있는 악마들도 모조리 죽이겠다."
"역시 말이 통하지 않는군요. 팔라딘이여, 당신을 죽여 수톤 님의 부활을 축하하겠습니다."
따악.
바바로약스는 지팡이로 바닥을 찍었다.
순간 나와 바라로약스가 있는 공간이 흔들린다.
풍경이 변했다.
붉은 하늘, 시커먼 땅.
바바로약스는 나를 보며 입가에 웃음을 걸었다.
"죽음의 평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땅이 들썩거리더니 수천 마리의 언데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