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호가장-- >
*폐가촌을 벗어나는 동안 나는 어마어마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사제는 정말 버릇이 없군. 내가 먼저 소개를 했으면 사제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채주. 아니, 강휘영은 이리 말하며 내 엉덩이를 걷어찼다. 기억은 바뀌었어도 무위는 남았는지 매서운 손속이었다.
"겨우 이정도로 그런 반응이라니! 입문을 늦게 했으면 그만
큼 근성을 보여야 할 것 아닌가!"
강휘영의 발은 짜증을 낼 때마다 벼락 같이 나를 향했다. 나는 무언가 항변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무언가 아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제는 채주. 오늘은 사저. 내막을 아는 노인에겐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서로 동문이라는 기억을 넣은 것 같긴 하다만, 정작 나는 그 설정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난 골탕 먹인 게 즐거운지 시종일관 웃는 상이었다.
"내가 말하는데 감히 눈을 돌려?"
그녀는 또 날 걷어찼다. 젠장, 이번에는 뭔가 익숙한데.
한참을 맞으며 걸으니 엉덩이에서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더 맞아선 안 되겠다 싶은 나는 어떻게든 대답을 해냈다.
"사, 사저! 제가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예의를 잘 모르구먼요. 헤헤, 용서해주십쇼."
비굴한 웃음. 이를 본 강휘영은 한숨을 쉬었다. 엄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훈계하는 그녀는 채주 시절과 딴판이었다.
"그래, 최근에 입문한데다 초출初出이니 내가 이해를 해줘야겠지···. 보통은 그래야 맞는 거겠지···."
무언가 심상찮은 분위기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분노한 얼굴. 강휘영의 예쁜 얼굴은 잔뜩 찡그러져 있었다.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용서할 수 없군! 아까부터 도대체 무얼 하는 건가!"
이번엔 발이 아니었다. 주먹. 온힘을 실은 주먹이 내 복부를 향했다.
얻어맞은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한참이나 기침을 토해내자 말문이 트였지만, 소리를 낼 순 없었다.
살벌한 분위기. 강휘영은 날 윽박질렀다. 나는 똑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웅얼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보고 있던 건 강휘영의 둔부였으니깐.
내가 색에 미친 색마라 그런 건 아니다. 이건 전적으로. 아니 전적은 아니더라도 십중구할 정도는 강휘영의 잘못이었다.
코앞에서 창기처럼 씰룩거리며 걷는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으면 사내가 아니었다.
강휘영에게서 험악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실을 고해야만 했다.
"사저의, 두, 둔부를 봤습니다···."
나는 직후 날아올 주먹을 대비했다. 그러나 내게 온 것은 주먹이 아닌 나긋한 목소리였다.
"그래, 그렇게 말해야지. 우리 양섬문陽暹門의 문도라면 언제나 당당해야지."
강휘영의 분위기는 급격히 달라졌다. 바로 이게 불만이었다는 듯, 그녀에게선 온화한 기운이 흘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금 그녀는 당당치 못하게 자신을 보아서 이런 일은 벌였다는 소리였다.
강휘영은 일이 다 해결됐다는 듯 쭉 걸어나갔다. 씰룩씰룩. 둔부를 흔들며.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있자 노인이 다가왔다. 그는 내게 귀엣말로 말했다.
"어때, 저것도 나름 괜찮지 않나?"
"노, 노인장. 도대체 무슨 인격을 심은 것이오."
노인은 흐뭇하게 말했지만 난 어이없을 뿐이었다. 무슨 기억
을 넣었는지, 자신만 알면 순 민폐 아니겠는가.
내 말에 노인은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참 얄미운 웃음이었다.
"저년은 자기가 양섬문의 문도인 강휘영이라 알고 있지. 양섬문의 심법은 특이하여 특정 체질이 아니면 배우지 못해 자신이 모른다고 알고 있고. 나는 저년의 스승. 너는 저년의 사제. 이런 간단한 이야기지."
그에겐 간단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었다. 양섬문이라니. 어설프게 삼재검법과 삼재심법만 배운 내게 그런 흉내는 어불성설이었다. 나는 급히 말했다.
"나는 무공을 모르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오? 흉내를 내더라도 그럴 건덕지는 있어야 할 것 아니오."
"저년에게 배우면 될 것 아닌가? 외공은 제법 쓸만하게 배운 년이니깐."
"다, 당신이 무공을 배우지 말라 했지 않소."
노인은 내 말을 듣자 웃음기가 사라졌다. 생각도 못한 말을 들은 모양새였다.
"내, 내공만 배우지 말란 뜻이었지."
"내공만? 도대체 무슨 소리를···."
나는 말을 멈췄다. 노인의 눈에서 나온 정광. 점점 정신이 흐려졌다.
"어때, 알겠지?"
"아, 알겠소. 과연, 그런 뜻이었군."
노인의 말을 듣자 이해가 되었다. 나는 절대 내공을 배워선 안 되었다. 그 이유는 매우 합당하였기에 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른 게 궁금해져 노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렇게 계속 걷다간 이상한 소문이 돌 수 있지 않겠소?"
나는 손을 뻗어 강휘영을 가리켰다. 음탕한 창부처럼 스스로의 둔부를 흔드는 모습이라니. 그녀의 육감적인 몸을 저리 써선 수상한 시선을 받지 않으래도 않을 수가 없었다.
노인은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다.
"네가 직접 물어봐."
"본인에게 말이오?"
"그럼 누구겠어?"
나는 한숨을 쉬며 강휘영에게 바짝 붙었다. 가까이 갈수록 알 수 있었다. 육감적인 몸매. 산채에서 몇 번이나 붙어먹던 몸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색다른 기분이었다.
"사저, 궁금하게 있습니다."
"뭔데?"
강휘영은 내 말을 듣고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곧 사람들을 만날 게 틀림없었다. 나는 어서 말해야만 했다.
"사저, 설마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그, 그렇게 걸으실 생각이십니까?"
내 물음에 강휘영은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별 소리를 다 듣는다는 것처럼 콧방귀를 뀌었다.
"사제는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내가 설마 상식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남들 앞에선 조신히 행동할 것이니 헛소리 말게. 양섬문의 여인이 같은 문도에게만 음탕한 모습을 보이는 건 상식 아닌가?"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기엔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웠다. 지금 강휘영이 생각하는 상식 중 몇 개나 정상인과 같을지 의문이었다.
얼마간 걷자 대로가 나왔다. 강휘영은 사람이 보이자 즉시 움직임을 정돈했다. 또박또박, 절도 있는 무인의 걸음이었다.
대로에서 장터로 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없는 물건이 없다는 소주의 장터. 노인은 그곳에서 한 가게로 들어섰다.
간판도 없는 후줄근한 가게. 나는 그곳에 걸린 옷을 보고서야 무슨 가게인지 알 수 있었다. 옷 가게. 노인은 자신의 옷을 사려는 모양이었다.
가게 안에서 잠깐 시간을 들인 노인은 나와 강휘영을 불렀다. 가게로 들어서자 내게 던져진 건 한 벌의 적색무복이었다.
"입어라."
"지금 말이오?"
노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거적때기에 가깝던 자신의 옷을 내던지고 옷을 입는데 열중이었다. 강휘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의 알몸을 보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지 훌러덩 벗어젖혔다. 나는 가게 주인이 어디 있나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따로 보는 사람도 없었기에 나도 옷을 갈아입었다.
옷은 만족스러웠다. 부드러우면서도 착 감기는 옷감. 이로 봐선 비쌀 것이었고, 비싼 값을 하는 물건이었다. 나는 이 값을 어떻게 치를 셈인가 궁금했는데, 노인은 가게 주인을 불러와 몇 마디를 하였다.
노인의 말을 들은 주인은 미심쩍은 눈빛이었다. 노인은 그런 그에게 품속에서 어떤 패를 꺼내 보여줬다. 한참이나 그 패를 살펴보던 주인은 웃으며 우리에게 인사하였다.
"또 찾아주십쇼, 대협!"
나는 갑자기 달라진 저 태도가 궁금하여 노인에게 물었다.
"최면을 걸어 셈을 끝낸 것이오?"
"아니, 정상적으로 값을 치뤘다."
"딱히 돈을 준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소다만···."
노인은 귀찮은 태도를 숨기지 않고 품속에서 무언가 꺼냈다.
무언가 쓰인 철패鐵牌. 노인은 내가 그걸 보자 다 끝났다는 듯 다시 품속으로 넣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나는 글을 잘 모르오. 무엇이라 적혔는지 알 수 있겠소?"
"이런 멍청한 놈···. 방금 그건 호가장呼家庄의 증명패다. 소주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호가장의 패. 저 가게 주인은 호가장에서 돈을 받을 것이다."
호가장呼家庄. 낯익은 이름이었다.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대단히 유명한 상인의 장원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노인이 왜 호가장의 패를 가지고 있나 궁금하여 물었다.
"왜 당신이 그걸 가지고 있는 것이오?"
"양섬문주로 활동할 때 연을 튼 적이 있지. 물론, 최면을 좀 썻지만."
노인은 그렇게 말하곤 걷다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내게 말했다.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호가장이다. 너도 양섬문의 문도로 설명할 것이니 몸가짐에 주의하거라."
"호가장? 상인에게 노자라도 꾸러 가는 것이오?"
"아니. 그곳에 우리가 목표가 있어 그렇다."
노인은 길게 설명하였다. 그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대략 이러하였다.
호가장주 호광원呼光原. 그는 무림에 대한 낭만을 가진 자였다. 그 자신은 늙은 상인이었기에 무공을 배우지 못했지만, 그에 대한 반동인지 딸은 상재와 무관한 무인으로 키웠다.
어린 시절부터 각종 영약을 먹고 고수에게 가르침을 받은 호가장주의 딸. 돈으로 살 수 있는 영약과 고수는 일정 수준을 넘지 못하는데도, 그녀의 재능은 뛰어났는지 대단한 고수로
자라났다. 그 재능에 대한 소문은 소주를 넘어 여러 무인들에게도 흘러들어갔고, 최고의 여고수라는 북방검후北方劍后에게도 그 소식이 들어갔다.
무림에 여고수가 적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던 북방검후. 그녀는 걸음을 아끼지 않고 호가장주의 딸을 찾았다. 호가장주의 딸은 뛰어난 재능으로 검후를 놀라게 했고, 검후는 장주의 딸을 제자로 삼을 것이라 널리 알렸다.
호가장주의 딸 호예린呼銳鱗. 무림 최고의 후지기수 중 한 명인 그녀가 바로 우리의 목표였다.
"호가장에는 호예린을 제외한 고수가 아무도 없으니 더 쉬운 일이지."
노인은 설명하며 이리 덧붙였다. 호가장에는 작은 문파를 세
울만한 연공장과 연무실이 있었음에도, 무인은 오직 호예린 한 명 뿐이었다.
오직 한 명의 무인을 위한 장원.
그곳이 바로 우리의 목표, 호가장이었다.
============================ 작품 후기 ============================이 글은 제 취향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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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호가장-- >
*호가장주 호광원은 시비가 전해온 소식을 들었다. 몇 년 전에 보았던 양섬문의 문주. 그자가 간만에 호가장을 방문했다는 소식이었다.
호광원은 소식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바로 맞은 편에서 차를 마시는 여인에게 말을 할 뿐이었다.
"양섬문주가 찾아왔다고 하는구나."
호광원의 말을 들었음에도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약관의
나이에 절정을 바라보는 고수, 호예린. 그녀는 담담히 차를 넘겼다.
한가로운 오후. 들새 소리가 나긋히 울리고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이마를 쓸어넘기는 시간. 호예린은 이 시간을 즐기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대답했다.
"꼭 만나보셔야 하는 자인가요?"
"꼭 만나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호광원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의 눈빛은 저 깊은 어딘가로 떠밀려 가는 듯 했다.
호예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볼 즈음, 호광원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의 눈은 옛 기억이라도 떠올렸는지 아득해져 있었다.
호광원은 열정적으로 돌변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우리 호가장에 큰 은혜를 주신 분이니 만나러 가야겠지. 예린아, 너도 가서 뵙고 싶으냐?"
"아뇨, 저는 딱히···."
그녀의 답을 들은 호광원은 시비를 불러 손님맞을 준비를 시켰다. 호광원의 그런 모습을 보며 호예린은 한숨을 쉬었다.
상인으로 바쁜 아버지.
무인으로 바쁜 자신.
서로가 하는 일이 다르다 보니 평소엔 접점이 없었다. 서로를 아끼는 이상적인 부녀지간이긴 하였지만, 워낙 바빠 같이 다도를 즐기기도 힘든 사이였다.
간만에 여유가 생겨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나 싶었지만···.
호광원은 벌써 자리를 일어나 떠날 채비를 마쳤다. 호예린은 그 모습을 보며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접견이 오래 걸리실까요?"
"무어라 확정된 건 아니지만···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 그분은 우리 호가장의 은인이니깐."
호광원은 무림에 무슨 낭만이라도 있는지 무인의 방문이라면 열렬히 환영했다. 이렇다 할 별호도 없는 자가 방문해도 한 끼 식사 정돈 대접할 정도로.
그래도 오늘은 특이했다.
양섬문주. 한 번도 듣지 못한 문파고,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이다. 호광원이 저리 반응할 정도라면 대단한 은혜인 게 분명할 텐데, 호예린은 그의 이름을 들은 적도 없었다.
과연 자신의 스승이 방문한다 하여도 저런 모습을 보일지 의문이라 생각하면서, 호예린은 차를 들이켰다.
차는 어느새 싸늘히 식어 있었다. 호예린은 나지막히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내 무공이 천하를 울리게 된다면.
장원을 찾던 무인들이 감히 쳐다도 못 볼 격세의 고수가 된다면.
그러면 아버지도 날 돌아봐줄까?
호예린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녀는 시비를 불러와 말했다.
"폐관 수련을 준비해라."
백의봉白懿鳳 호예린. 호가장의 소장주보다 무인으로 이름 높은 그녀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호예린은 양섬문주의 방문이 있고 사흘이 지나도록 연공실 밖을 나가지 않았다.
하는 것은 오로지 수련 뿐.
그녀는 식사 시간과 수면 시간을 제하면 모든 시간을 수련에 힘 쏟았다. 식사 시간이라 해도 벽곡단을 물과 함께 넘기는 것이고 수면도 하루 세 시진을 넘기지 않았으니, 그녀는 하루 대부분을 수련만 하며 보낸다 봐도 무방하였다.
'그나저나··· 아버님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군···.'
본디 폐관이라 하면 외부와 격리된 철저한 훈련을 말하지만 호가장은 달랐다.
무인의 수련에 대해 무지하고, 외동딸을 어여삐 여긴 호가장주는 폐관한 그녀에게 간단한 소식은 꾸준히 알려오고 있었다.
허나 이번에는 달랐다. 벽곡단을 가져다주는 시비는 아무 소식도 못 들었다며 가만히 있었다. 지금까지 큰 일이 없으면
작은 일이라도 소소히 알렸기에 호예린으로선 의아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 것 같은데···.'
호예린이 휘두르던 검을 멈추고 생각할 무렵, 연공실의 문이 열렸다.
끼이익―문을 열고 들어온 건 그녀의 시비였다. 시비는 호예린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발치에 벽곡단만 두고 뒤를 돌았다.
호예린은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잠깐. 아버님은 무슨 말이 없으시더냐? 양섬문주는 떠났고?"
"딱히 아무런···."
말을 늘이던 시비는 갑자기 배시시 웃었다. 보통은 볼 수 없는 기묘한 웃음이었다.
시비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곧 좋은 일이 있으실 겁니다."
목례를 하고 연공실을 나선 시비를 보며 호예린은 무언가 꺼림칙함을 느꼈다.
수련의 성과가 적어 초조한 것일까. 호예린은 이 불안함이 그저 노파심이길 바라며 검을 쥐었다.
호예린에게 훈련을 중지하고 내실로 들라는 말이 나온 건 그날 밤이었다.
*
"아니, 그러니깐 그게 도대체 무슨 명령이란 말이냐!"
"저희도 다른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장주님의 명을 따라주십시오."
내실로 들라는 명을 들은 호예린은 지친 몸을 끌고 연공실을 나섰다. 그런 그녀에게 시비가 전해준 소식은 기이한 명령이었다.
내실로 들라. 씻지 말고 수련할 때 입은 무복을 그대로 입고.
사흘 동안 연공실에서 나오지 않은 호예린. 그녀의 몸과 옷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수련을 하며 냄새가 나는 건 당연한 이야기지만 밖에서도 이 모습을 유지하라니?
그녀에게 있어 이번 명령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명령이었다.
"내원에서는 연회가 한창 벌어지는 중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곳을 이런 상태로 어찌 가라는 말이냐."
"저희야 장주님의 뜻을 알 수 없지요."
호예린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아버지의 명령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뛰어난 상재를 가졌지만 무림의 일이라면 아이처럼 경박한
행동을 하는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진 이런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은 시키지 않았기에 더욱 의아하였다.
호예린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아버지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언가 뜻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 가도록 하마···."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을 거라는 절대적인 믿음.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믿고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결국 땀에 절은 몸을 이끌고 그대로 내원에 도착하였다.
내원에서는 한창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연회는 호가장에
서 열린 그 어느 연회보다 더 호화스러웠다.
"아버님. 제가 왔습니다."
호예린은 자신의 아버지가 있는 자리로 갔다. 그 자리는 상석이 아닌, 상석의 옆 자리였다.
"오, 왔느냐! 하하, 어서 오지 않고 무엇 하느냐."
이미 얼큰하게 취한 것인지 호광원은 체통도 잊고 자신에게 손짓하였다. 호예린은 그 모습을 보며 기이함을 느꼈다. 어째서 상석에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 처음 보는 사내가 있다는 말인가?
"안녕하십니까! 양섬문의 왕사라고 합니다!"
상석의 사내는 호예린을 보고 경박한 인사를 건넸다. 저 젊은 모습으로 보아 문주는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일반 문도일까? 지금까지 무림인을 초청한 연회를 열어도 상석은 늘 호광원의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 일반 문도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호예린의 머리는 복잡하였다. 도통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왕사를 잠시 흘겨보았다.
심의深衣를 입은 사내. 근육이 나름 붙어 유약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 근육은 무림의 그것이 아니었다. 마치 하인들의 근육처럼, 무거운 걸 들 때 쓰는 상완근上腕筋만 특히 발달한 사내였다.
말로 치자면 전마戰馬나 군마軍馬가 아닌 농마農馬. 아니, 그조차도 못한 당나귀 같은 사내였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호예린은 절도 있게 읍揖하였다. 자신의 아비가 이리 대접한다면 자신 또한 그에 맞춰야 할 게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호예린의 읍을 받은 사내도 똑같이 읍하였다. 마주 인사한 그들을 보며 호광원은 호탕하게 웃었다.
"흐하하! 도령! 그리 딱딱하게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되오! 어차피 내 딸년 아니오?"
"호 대협의 따님이시니 오히려 더 예를 갖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겸손하기까지! 예린아, 이리 와서 앉거라. 왕 도령과 네 이야기를 많이 나뒀단다."
호예린의 얼굴이 굳었다. 호광원이 자신을 딸년이라 칭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런 경박한 술버릇이 있나 싶어 고민하면서도 호예린은 명에 따랐다.
"폐관 수련을 하셨다 들었습니다. 많이 힘들었겠군요."
호예린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왕사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그 말에 차갑게 대꾸했다.
"힘들었다라···. 고작 사흘 폐관한 건 힘든 축에도 끼지 못한답니다. 양섬문이 어디에 있는 문파인진 몰라도 후인을 키우는데 노력을 기울이진 않는 모양이군요."
"하하, 그렇습니까? 제가 그런 부류는 워낙 모르는지라···."
한심한 작자. 호예린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리 아는 척 묻
는 왕사가 싫었다. 패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비굴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은 더더욱 한심하지 않은가.
호예린의 시선은 왕사를 지나 호광원을 향했다. 이만 돌아가도 되겠느냐 물을 생각이었다.
이 순간, 호예린은 이상한 기색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호광원의 수염이 떨렸다. 점차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 호예린은 취기가 올라 저러나 싶었다. 그러나 뒤 이어 나온 호광원의 말은 취기따윈 문제가 아니란 걸 보여주었다.
"호예린! 그게 도대체 무슨 말버릇이냐!"
진심어린 분노를 담은 일갈一喝. 호예린은 얼이 빠졌다. 호광원은 그런 그녀에게 더더욱 분이 나는지 삿대질을 하였다.
"난 네년에게 그리 말하라고 가르친 적 없다! 도령이 그냥 손님으로 보이더냐? 네년이 도령께 그리 말해도 되는 입장이더냐?"
이를 들으며 호예린은 자신이 무슨 말실수라도 하였나 싶어 깊이 돌아봤다.
조금 무례하게 말을 했다지만 저렇게 분노할 일은 아니었다. 아니, 진정 무례한 말을 하였더라도 조용히 호예린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게 예의였다.
"이런··· 계집 주제에··· 감히······"
호광원은 얼마나 화가 나는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
모습에 감히 말도 못 붙이는 호예린을 대신해 왕사가 말을 걸었다.
"대협. 그리 화를 내실 문제는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도령이 아무리 괜찮다 해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 저년의 버릇을 이번 기회에 고쳐야―!"
"저는, 괜찮습니다."
당장 주먹이라도 휘두르려는 듯 호광원은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왕사가 재차 괜찮다 말하자 그의 분노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갑게 식었다.
호광원은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정말 괜찮으신지요?"
"물론입니다. 무림인은 이런 일 하나하나 신경 쓰면 제 명에
못 살지요."
"하, 역시 무림인다우십니다. 이 호광원이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원, 과찬의 말씀을."
호예린은 자실自失하여 그들의 말을 가만 듣고만 있었다. 이 대화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말이야 도령이라 하지만 저 모습은 상전을 모시는 종과 같은 모습 아닌가.
호예린은 타는 속을 잠재우기 위해 술을 들이켰다. 왕사는 그 모습을 보고 비릿하게 웃으며 잔을 채워주었다.
"이 술을 소장주가 받으시면 다 끝난 일로 합시다."
"아아, 이리도 관대하시다니. 예린아 뭘 하느냐. 사 도령이 용서해주신다는데 속히 잔을 들지 못하겠느냐?"
호예린은 난처한 표정으로 눈동자만 굴렸다. 이건 도대체 무슨 영문 모를 일인지···. 잔을 들지 않고 가만히 있는 호예린을 보자 호광원의 눈초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호예린은 그 모습에 한풀 꺾여 잔을 들었다.
"한 잔 더 받으시지요."
호예린이 잔을 비우기 무섭게 왕사가 연거푸 술을 권했다. 석 잔··· 넉 잔···. 그렇게 한 동이를 다 비우고 나서야 왕사의 권勸이 끝났다.
호예린은 뜻밖의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비운 술 한 동이. 이건 분명 여아홍女兒紅이었다. 자신이 시집가는 날 꺼내겠다며 호광원이 묻은 술. 한낱 방파의 방문을 환영하는 연회에서 쓸 물건이 아니었다.
이 사실을 알아챘음에도 호예린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피로감과 취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 힘든 상태였다.
"하하, 보기 좋은 광경이로다. 딱 한 가지만 더 채워지면 완벽하겠군···. 도령, 풍류를 아시오? 내 도령을 위해 준비한 것이 있소이다."
"대협이 준비한 것을 감히 안 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기대하겠습니다."
"그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 거라 내 자신하외다."
호광원은 시비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시비는 호광원의 귀엣말을 듣더니 총총 걸음으로 상방으로 갔다.
호예린은 가만히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상방에서 나온 것을 보자 가만히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저희 장원의 자랑이옵니다. 흐하하하―"
나삼을 입은 여인들. 호가장의 모든 여인이 연분홍 적삼만을 입은 모습으로 연회장에 나왔다.
그중에는 호예린의 어머니도 있었다. 피부를 제대로 가리지도 못하는 연분홍 적삼. 그녀는 이를 입고도 부끄럽지 않은지 교태를 부리며 걷고 있었다. 이 모습은 호예린이 난생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호예린은 생각치도 못한 광경에 벌벌 떨렸다. 지금 연회장에 있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니었다. 어째선지 일을 하는 잡부들도 모두 참석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들 모두에게 살갗을 내보이다니. 어머니가 정신을 놓은 것
인가? 이를 웃으며 바라보는 자신의 아버지는 정녕 무엇이란 말인가.
호예린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호광원을 보았다. 그는 광소를 터트리며 왕사에게 아부하기 바빴다.
여인들은 어느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얇은 적삼만 입은 여인들의 춤. 다리를 쭉 뻗어 식탁에 올리기도 하고, 은근슬쩍 가슴을 열어 보이는 음란한 춤이었다.
호예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춤을 요구하는 아버지를.
이런 춤을 추는 어머니를.
이를 보고 웃고 즐기는 장원의 모두를.
그리고, 이를 당연하단 것처럼 받아들이는, 저 왕사라는 사
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email protected] NTR은 딱히 생각 안 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사람이 많다면 고려는 하겠지만 그런 뜻으로 물은 건 아니시니 의미도 없겠지요.
* 주인공이 자신의 뜻이 아닌 타인의 의지에 휘둘리는 걸 보고 싶어하는 분이 별로 없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무어라 말씀을 드리자면 다 스포일러 같아 이만 말을 줄이지만, 여러분이 걱정하시는 전개는 아마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 연재주기는 아직 따로 말씀 드리기 애매한 상황인데, 일단 다음 연재본은 아침이나 점심에 나올 거라 보시면 되겠습니
다. 지금 올린 것은 새벽에 올리려다 피곤해서 미리 올리는 경우로, 어느 정도 흐름을 타기 전까진 하루에 2번 정도 올라온다 보시면 되십니다.
=====================================================================
< --2. 호가장-- >
*시간이 흐르고 춤이 무르익었다. 호예린의 어미는 식탁 위로 올라가 양 다리를 활짝 펼쳤다. 자신의 어미가 음란한 표정으로 가슴을 쓰다듬는 모습을 보자 호예린은 결단을 내렸다.
쾅―!
호예린의 발이 내원을 찍었다. 돌바닥은 그녀의 발을 중심으로 쩍쩍 갈라졌다.
주위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놀라 입을 막았다. 호예린은 그
런 사람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왕사 앞에 섰다.
그녀는 칼을 뽑았다.
칼에서 나는 시린 빛이 연회의 음란한 기운을 가라앉혔다.
지금 휘두를까, 아니면 무슨 일인지 따질까. 호예린이 이런 고민을 하는 와중, 호광원이 말했다.
"예린아, 좋은 생각이다. 그래, 네가 흥을 돋우는 것도 좋겠지."
칼을 뽑고 선 호예린을 보고 호광원은 흐뭇하게 웃었다. 음기가 섞인 미소. 호예린은 그것만으로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호광원은 자신에게 어미와 같은 모습이 되라는 것이었다.
호예린의 칼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막기 위해 양손으로 힘껏 잡았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저 왕사라는 사내가 온 뒤로 모두가 변했다. 이 뒤틀린 일상을 바로잡기 위해선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호예린의 눈은 왕사를 향했다. 저자가 무슨 수를 쓴 게 분명할 터. 불문곡직不問曲直. 호예린의 오황패도검五黃霸道劍이 왕사를 향해 쏟아지려 하였다.
그녀의 검을 멈춘 건 한 목소리였다.
"아, 검무劍舞를 추실 생각이신가요? 좋은 생각입니다."
호예린의 기세는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떨리는 손은 평온을 되찾았고, 겁에 질린 안색은 곧게 펴졌다.
호예린은 멍하니 끄덕였다. 검을 왜 뽑았을까. 당연한 일이다. 연회장에서 검을 뽑았다면 검무를 추기 위해서다.
호예린은 춤을 추기 위해 연단으로 나섰다. 착석한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호예린의 검무는 막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아, 그런데 무슨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호예린의 춤을 기대하며 숨을 삼키던 사람들. 그들은 왕사의 말을 들은 순간 돌변하였다. 모두 코를 틀어막고 냄새가 난다며 아우성이었다.
호예린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냄새의 원인이 아직 특정되진 않았지만, 온종일 땀에 적셔진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일 게 틀림없지 않은가.
그녀는 수치심으로 물든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자, 잠시 몸을 씻고 오겠습니다···."
연회의 흥이 가라앉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냄새 나는 몸뚱이로 춤을 춰선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과 같았다.
왕사는 그건 아니라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소장주께서 씻고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냄새는 바로 그 옷에서 나는 거니까요."
왕사의 말을 들은 호예린은 구토를 뿜을 뻔 했다. 지독한 악취. 어느새 자신의 옷에선 말로 표하지 못할 끔찍한 냄새가 났다.
호예린은 당장 옷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개방의 거지도 입지 않을 저런 옷을 입은 건 평생의 수치였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왕사가 말했다.
"옷을 벗으면 냄새는 사라질 겁니다. 어차피 나신도 아니니 문제는 없지 않겠습니까?"
짧은 말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에 활기를 주는 말이었다. 왕사의 말을 들은 호예린은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호예린은 날렵한 동작으로 옷을 벗고 속곳만 걸친 채 모두 앞에 섰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청백지신淸白之身. 무림을 이끌 후지기수라는 호예린의 몸이 모두 앞에 보여졌다.
백옥 같은 살결. 시원하게 뻗은 다리. 고된 수련 덕에 군살 하나 없는 완벽한 몸매는 얇은 속곳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왕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제 검무를 시작해도 되겠느냔 물음이었다.
왕사는 기분 좋게 끄덕였다. 호예린은 왕사의 끄덕임을 본 다음에야 칼을 움직였다.
스르릉― 스르릉―호예린의 칼이 연무장을 갈랐다. 오황패도검. 북방검후의 독
문무공이자 호예린의 검법.
패도적인 검법이 검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건 상식이다. 검무란 본디 질풍 같으면서도 나긋나긋하게. 역동적인 무도 사이에 부드러움을 넣어야 한다. 유의 자리를 패로 대신한 오황패도검이 검무에 맞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아는 상식이었다.
그러나 호예린의 검무에선 패도의 기운을 찾아볼 수 없었다. 호예린의 검법이 술術을 넘어 예藝에 달했다는 징표. 그녀가 오황패도검을 완벽히 다룰 줄 안다는 증거였다.
"호오, 알려진 것보다 경지가 뛰어나군. 스승이 서른이 돼서야 깨달은 경지를 벌써 넘어섰어."
어디선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연회장에 노인이 있었던가? 호예린은 의문을 품었지만 검을 멈추지 않았다. 검이
아닌 비단을 쥐고 휘드르는 듯 부드러운 기세가 연무장을 맴돌았다.
"대단하군요!"
왕사의 목소리가 방금의 목소리를 지우려는 듯 크게 울렸다. 호예린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검법에 대한 칭찬은 이제 별 감흥이 없는 경지였지만, 오늘은 왠지 마음이 설렜다.
"더 빨리 할 수도 있나요?"
왕사의 목소리가 호예린에게 닿았다. 그 말을 들은 호예린의 검은 한층 속도가 올라갔다.
스르릉, 스르르릉―
날카로운 파공음. 춤사위가 격렬해지자 검에선 재삼재사再三再四 위협적인 소리가 들렸다. 온종일 수련한 호예린은 피곤하여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더 빨리―!"
스릉―!
다시금 들린 왕사의 목소리. 이번엔 아까와 달리 부탁이 아니었다. 종에게 하는 명령과도 같은 어조. 호예린은 잠자코 그에 따랐다.
그녀의 검무에선 이제 흉흉한 기운이 돌았다. 호가장의 여인들은 검무가 무르익자 합을 맞추기 위해 다가왔지만, 이 거센 기운에 밀려 멀리 떨어졌다.
"이걸로는 부족합니다···."
왕사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호예린은 죽을 힘을 다하여 검을 휘둘렀다. 이미 검무가 아니었다. 채찍질 당하는 노비의 모습이었다.
호예린은 자신이 왜 이렇게 검무를 추는 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머리속에서는 왕사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소진된 내공.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왕사의 목소리였다.
무아지경에 빠진 호예린을 보며 왕사의 미소는 점차 흐려졌다.'이 짓을 일주일도 넘게 하는군.'
호예린은 왕사가 오고 사흘이 지났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기억엔 사흘간 훈련했단 기억 뿐이었으니 당연한 생각이었다.
허나 진실은 달랐다. 미리 호가장주에게 최면을 건 노인은 장원의 모든 인물들에게 최면을 거는데 이틀이 걸렸다. 그 뒤로 지금까지 오 일. 매일 연회를 열고, 매일 호예린의 기억을 손봤다. 암시를 아무리 불어넣어도, 그녀가 싫어하는 암시는 사라졌기에 연회의 기억을 지우는 게 고작이었다.
'젠장, 평생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가.'
처음 며칠간은 전심전력을 다했다. 노인이 주도적으로 최면을 걸었고, 귀한 미혼약을 술에 타고 몽환향을 피웠다. 덕분에 기초 최면을 걸었고, 내공을 금제하여 더욱 깊은 암시를 불어넣으려 했지만, 호예린은 내공을 회복하면 암시를 깨어버렸다.
노인은 이런 일이 반복되자 어느새 자리를 감췄다. 몽환향은 아깝다며 주지도 않고, 미혼약만 소량을 주었다. 이미 최면 도입이 익숙해진 왕사는 그것만으로도 최면에 빠트릴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결국 호예린에게 하루 이상의 암시를 거는 건 불가능했다.
왕사는 노인을 보았다. 무슨 생각인지 도중에 합류한 괴팍한 노인. 그가 무슨 해결책을 가져왔길 바라며 본 것이었다.
"검무는 다 봤으니 슬슬 끝내지?"
노인의 말은 왕사의 기대를 무참히 깨어냈다. 한숨을 내쉰 왕사는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 무슨 방도가 없겠소? 최면 저항력이 강한 여인을
어찌 할 비책이라던가."
"없지는 않은데 사람마다 달라. 마음의 장벽은 사람마다 구성분이 다르거든. 언젠가는 이 여인도 어찌 할 수 있겠지."
늘 같은 대답. 왕사는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짜증을 노인에게 낼 수도 없으니 더더욱 짜증이 났다. 왕사는 울상을 지은 채로 크게 외쳤다.
"더 빨리! 안간힘을 다해서!"
호예린의 몸은 이제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팽이처럼 도는 그녀는 숨을 몰아쉬는지 연신 헥― 헥― 거리는 소리를 냈다.
왕사는 이것으로 멈출 생각은 없었다. 그는 호예린이 혼절할
때까지 검무를 시킬 예정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의 강인한 정신은 암시를 튕겨내어 어쩔 수 없었다.
"빨리! 더, 더, 더 빨리! 의식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극한으로!
왕사의 고함에 호예린은 삐걱삐걱 몸을 이끌었다. 넘어질 듯 하면서도 힘을 내 검을 휘두르는 호예린. 마치 인형극의 인형처럼 흔들거리는 모습이었다.
이를 보는 왕사의 눈빛엔 한 치의 감흥도 없었다.
*호예린은 양섬문주의 방문이 있고 사흘이 지나도록 연공실 밖을 나가지 않았다.
하는 것은 오로지 수련 뿐···.
"크읏···!"
연공실 바닥에서 일어난 호예린은 온몸을 죄는 근육통에 놀라 신음을 내뱉었다.
'어제의 연공이 격렬했던가···?'
호예린은 자신도 모르게 이런 의문을 품었다. 어제 한 수련이라 해봤자 늘 하던 검법의 점검 뿐. 이정도론 피로를 느끼지 못해야 정상이지만, 이상하게도 몸은 며칠 험하게 구른 것처럼 통증에 시달렸다.
의아함을 느낀 호예린은 오늘 수련은 적당히 끝내기로 마음
먹었다. 몸이 이런데 더 혹사해봐야 다음 날을 버틸 수가 없는 노릇. 그녀는 수련만큼이나 휴식이 중요한 걸 알고 있었다.
호예린은 시비를 불렀다.
몇 번이나 불렀음에도 시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련 중엔 연공실을 나갈 생각이 없었지만, 이래서야 방도가 없었다.
호예린은 의약원으로 가 연고를 받아오기로 마음 먹었다.
밖을 나온 호예린은 특이한 광경을 보았다. 한데 모여 뒷정리를 하는 시비들. 마치 큰 연회가 열린 걸 정리하는 모양새였다.
호예린은 그녀들에게 가 물었다.
"혹시 사흘 동안 무슨 연회라도 있었느냐?"
"네, 바로 어제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공손히 말하는 시비를 보며 호예린은 의문을 품었다. 아직까지 뒷정리를 하는 모습으로 보아 크나큰 연회였음이 분명할 텐데. 어째서 자식인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는 말인가.
'아버지가 생각을 가지고 하신 일이겠지···.'
호예린은 자신의 아버지인 호광원을 믿었다. 가끔 아이 같은 구석은 있지만 늘 존경하는 아버지. 자신을 위해 일면식도 없는 무림인과 연을 튼 그는 호예린이 늘 신뢰하는 대상이었다.
호예린은 이왕 밖으로 나온 거 자신의 아버지를 보고 가려 마음 먹었다. 겸사겸사 양섬문주와 무슨 말이 오갔는지도 들으면 그녀의 궁금증은 다 풀릴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정방을 향하던 그녀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하하하, 도령도 참―."
호예린은 걸음을 멈췄다. 한낮의 장원에서 들릴 수 없는 새된 교성. 분명 처첩이 거주하는 상방에서 나오는 목소리였다.
보통이라면 그냥 넘겼을 소리였지만, 그녀는 그러질 못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낮부터 교태를 부리는 저 목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 작품 후기 ============================01시에 새로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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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호가장-- >
*나는 허탈하여 축 늘어졌다. 첫 단추를 끼우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무림인이라곤 단 한 명뿐인 호가장을 지배하는 것조차 이리 힘들다면, 과연 일이 끝나기나 할지 걱정되었다.
"도령,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가요?'내가 늘어지자 옆에 누운 여인이 물었다. 호광원의 아름다운 부인. 그녀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날 보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지금 하는 일이 언제 끝날지 고민되어 그렇습니다."
"저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좋게 풀리면 좋겠네요. 혹시 제가 도울 수 있을까요?"
쓴웃음이 나왔다. 그 걱정이란 게 당신의 딸을 사로잡지 못해 생긴 걱정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말해도 그다지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미 완전히 내게 넘어온 이 여인은 딸을 혼쭐내겠다며 달려갈 터였으니.
물론 그래서야 나와 노인의 행각이 발각될 뿐이었으니, 나는 이리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부인의 호의는 고맙지만, 이건 저희 양섬문의 일입니다."
"아, 천녀가 주제도 모르고······."
부인은 죽을죄라도 진 것마냥 엎드려 사과하였다. 나는 이 모습을 보니 헛웃음만 나왔다. 이게 노인의 취향인진 몰라도, 노인이 직접 최면을 건 여인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변했다.
그래, 그 사나운 채주도 마찬가지다. 이젠 강휘영이 된 채주는 내 하물에 달라붙어 있었다.
"아, 계속하세요."
강휘영을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는지 날 올려보았다. 입은 그대로 내 양물을 문 채 눈동자만 올리는 모습은 썩 귀여운 모습이었다.
양섬문. 이 존재하지도 않는 문파의 규율은 특이했다. 소속 남자 문인을 향한 절대적인 복종. 강휘영은 배분도, 무공도,
성격도, 어디 하나 까다롭지 않은 구석이 없었지만, 이 규율을 들먹이면 언제 어디서나 충실한 하인으로 변했다.
지금도 그랬다. 낮부터 남의 부인과 붙어먹냐며 질책하러 온 강휘영. 참다못한 나는 그녀의 입을 다물게 했다. 남근을 문 그녀는 당과糖菓를 문 어린아이마냥 조용해졌다. 나는 강휘영의 머리를 쓰다듬고, 부인의 가슴을 주무르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하하하, 도령도 참―."
자신의 가슴을 주무르는 날 보며 부인은 살며시 웃어 보였다. 음기를 담은 눈웃음. 이것으론 부족하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흠, 어쩔까. 어차피 곧 있으면 지루한 연회인데, 미리 기운을
써도 되지 않을까?
고민을 마친 나는 시비를 불러 이부자리를 깔라 명했다. 깔린 이부자리를 보며 슬슬 일어나려 할 무렵, 큰 소리가 방을 울렸다.
드르륵, 쾅―!
거칠게 내실의 문이 열렸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문을 살피던 나는 혼이 나갈 것처럼 놀랐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우리의 목표인 호예린이었다.
"저, 저, 소, 소장주 되시오?"
나는 내가 호예린을 본 적 없다 연기해야 하는 것도 잊고 무
심코 말했다. 내 수상한 말 때문인지 호예린은 안색을 찌푸렸다.
"당장 그 손을 놓아라. 잘리고 싶지 않다면."
호예린은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이미 뽑힌 검신에서는 시린 빛이 연신 번뜩였다.
나는 가슴을 주무르던 손을 떼었다. 손을 번쩍 들고선 비굴한 웃음만 지어 호예린을 보았다.
제기랄, 이런 상황은 예상치도 못했다. 지금까지 쭉 연무장에서 수련만 하더니. 이번엔 도대체 왜 나왔단 말인가.
"웃어? 지금 상황에 웃음이 나오는가? 지금 그게 네 마지막 웃음이 될 수 있음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아니, 대관절 저에게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그녀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나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호예린의 성격은 이미 호광원에게 다 들었다. 겉으로는 저래 보여도 신중한 성격의 그녀는 날 바로 베지는 못할 것이었다.
"크윽―! 대낮에 집안의 안주인을 희롱하고서······. 지, 지금도 그런 짓을 하며 네 죄를 몰랐다 말할 생각인가!"
호예린은 붉어진 얼굴로 내게 삿대질했다. 나는 그녀가 말하는 그런 짓이 뭔지 몰라 갸우뚱거렸다. 다시 자세히 살핀 그녀의 손은, 내 하물을 향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구음을 멈추지 않는 강휘영. 나는 워낙 놀라 그녀를 잊고 말았다. 나는 강휘영에게 그만하라 말했다.
강휘영은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내게 떨어졌다. 강휘영이 입을 벌리자, 길게 늘어진 투명한 즙과 내 양물이 내보여졌다. 이를 본 호예린은 침음성을 삼켰지만, 경거망동하지 않고 나를 기다렸다.
나는 호예린의 인내심에 감탄하며 말했다.
"희롱이라니요? 저는 분명 부탁받은 일을 하는 것인데 이것이 어찌 희롱이란 말입니까?"
"부탁을 받아? 네가 누군가의 부탁이라도 받고 부녀자의 유, 유방을··· 희롱하였다는 말이냐?"
"유방이라··· 전 그런 걸 만진 적이 없습니다만."
"방금 똑똑히 본 것을 거짓으로 무마하려고―!"
"허허, 이것 참. 제가 만진 건 젖통입니다. 젖통."
나는 이리 말하곤 호예린의 어미에게 물었다.
"부인, 제가 만진 게 무엇입니까?"
"소첩의 냄새나고 더러운 젖통입니다."
호예린은 입을 떡 벌리고 그 광경을 보았다. 정녕 저리 말하는 게 자신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나는 그녀를 골려주기 위해 다시 한 번 물었다.
"따님께선 부인의 말을 의심하는 모양이군요. 다시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제 딸이 무식한 어미를 닮아 한 번 들어선 안 되는 모양입니다. 대협께서 만진 건 제 냄새나고 더러운 젖통이고···."
"그만! 그만!!!"
호예린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마냥 달아올랐다. 그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말을 더듬었다.
"부, 부, 분명히 사술을 쓴 것이겠지···. 네, 네 이놈···. 감히 그런 사술을 써 어머니께 추잡한 말을 하게 하다니···."
"예린아, 이 어미가 젖통이라 하는 건 사술이 아닌―"
"그만! 제발 그만하십시오!"
호예린은 이제 울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이제 긴장을 하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를 골릴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사실 큰 소리를 내는 게 목적이었다. 장원 어디선가 노닥거릴 게 분명할 노인. 그가 이 소란을 듣고 찾아오길 바라고 이런 소란을 낸 것이었다.
허나 내 기대와는 달리, 찾아온 건 다른 사람이었다.
"허어, 도대체 무슨 일인고?"
호광원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왔다. 그는 일을 하다 달려왔는지, 먹물에 적셔진 붓을 그대로 들고 있었다.
호예린의 얼굴이 참담하게 변했다. 자신의 어미가 외간 남자 앞에서 가슴을 보이는 걸 무슨 수로 설명할지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다행인진 모르겠지만, 호예린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아, 왕 도령. 제 부인은 마음에 드십니까?"
"대협의 설명대로였습니다. 부인의 가슴은 지금껏 만져본 가슴 중에서 제일이더군요."
"허허, 물 빠진 가슴에게 이 무슨 과찬의 말씀을. 그래도 다행입니다. 제 부인은 아직 늙지 않아 도령에게 몸을 내줄 수 있으니."
나는 차마 호예린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울고 있을지, 분노하고 있을지, 어느 쪽이든 보기 끔찍한 광경일 것이었다.
호예린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사태에 초연했는지, 아무 감정 없는 허탈한 목소리였다.
"아버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 예린아. 소개가 늦었구나. 이 고귀한 공자께선 양섬문의···."
"그런 건 들을 생각도 없습니다! 지금 도대체 무얼 하시는 겁니까!"
호광원은 호예린의 고함을 듣자 얼이 빠졌다. 호예린은 초연한 태도를 버리고 흐느끼는 듯 외쳤다.
"이해하려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이 고함은 분노를 담아 지르는 고함이 아니었다. 불가해한 상황에 놓인 한 인간의 물음. 유일한 안식처인 자신의 아버지에게 물어 어떻게든 자신을 유지하려는 그런 고함이었다.
호예린의 울음은 돌아온 대답에 간단히 조각나고 말았다.
"호예린······.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년이―! 지금 도대체 도령 앞에서 무슨 망발을 하는 것이냐!"
호광원의 분노는 더 이어가지 못했다. 호광원의 대답을 들은 호예린은 짧은 신음성만 몇 번 내지르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수라장의 종말. 강휘영은 어정쩡한 자세로 나를 보았고, 호광원의 부인은 나를 향해 딸의 무례를 사죄하였다. 호광원은 쓰러진 딸을 보고 언짢은 표정으로 있는 그때, 천장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
"혼자서도 잘하는군. 돕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야."
태연한 모습으로 옷의 먼지를 털어내는 노인. 그를 보며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했다.
"젠장! 보고 있었으면 좀 돕지 그랬소!"
"도우려고 몰래 천장에 붙어 있었지. 칼을 휘두른다 싶으면 냉큼 막을 생각이었으니깐."
노인은 간단하게 말했지만 나는 믿음이 가지 않았다. 아무리 사람이 빨라도 검을 휘두르는 속도보단 못할 게 당연할 지언데···.
노인은 내 찌푸린 인상을 보더니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제대로 일을 해냈군. 이년의 정신은 완전히 깨어졌어. 이제야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겠구만."
노인은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쓰러진 호예린에게 다가갔다. 호예린에게 귀엣말을 하고 강제로 눈꺼풀을 열어 눈을 마주 보게 하는 그를 보며, 나는 내가 할 일은 따로 있음을 깨달았다.
"연회는 취소하도록 하십시오. 이 방에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하고."
내 말을 들은 호광원은 일을 처리하겠다며 밖으로 나섰다. 나는 강휘영과 부인을 이끌고 상방을 떠나며 생각했다.
내가 오늘 한 일은 한 사람의 정신을 파멸시키는 일이었는데, 이상하게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며칠 동안 노인은 상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식사도 잠도 모두 그곳에서 해결하며 호예린을 바꾸는데 열중이었다.
나는 그동안 호가장에서 이상한 소문이 흘러나가지 않도록 조정했다. 장원의 문을 닫은 건 호예린이 병에 걸려서이고, 아직도 병환이 남아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니 양해해달라.
적당히 지어낸 변명이었지만, 다행히 대부분 사람들은 납득하였다. 금지옥엽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호광원은 이미 유명했기에 달리 처리를 할 필요도 없었다.
사건의 내막을 아는 내겐 참 웃긴 일이었다. 소중히 여긴 딸의 정신을 잃게 한 건 호광원 그 자신이라니.
호광원의 진심어린 일갈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쉽게 일이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노인과 강휘영이 합공해 제압하고, 끝없는 연회를 반복하는 게 고작이었을 게 분명했다.
이렇게 됐으니 호광원에게 감사를 느끼는 게 맞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인형이 된 그에게 차마 하지 못할 능욕. 나도 한 수 거들었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새 호가장에 온지 십여 일이 지났다. 그동안 호의호식하며 지냈지만, 왠지 마음이 불편하였다. 이 불편함의 원인이 무엇인가 열심히 궁리할 즈음, 내게 강휘영이 달려왔다.
"사제! 거기 있는가!"
"무슨 일입니까, 사저."
강휘영은 급히 달려왔는지 숨을 헐떡거렸다. 숨도 제대로 돌리지 못한 그녀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사부님이 위급하네. 어서 빨리 오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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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호가장-- >
*나는 강휘영을 따라 상방으로 달려가며 물었다.
"위급하다니요? 도대체 어떤 상황인 겁니까?"
"사부님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네. 의원을 부르는 게 더 시급하다만··· 사부님은 사제를 먼저 불러오라 하셨네."
나는 대강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만난 날, 피를 토하던 노인. 이번에도 그때와 같은 상황인 게 틀림없었다.
상황을 안다는 게 이해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폐병 발작이 다시 일어났다면 의원을 부르는 게 우선일 터. 어째서 날 불러오란 것인진 알 수 없었다.
상방의 문은 활짝 열려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강휘영은 의원을 부르겠다며 곧장 떠났다. 나는 홀로 들어가 노인과 호예린을 보았다.
숨을 몰아쉬는 노인. 그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호예린. 일단은 호예린에 대한 처리는 끝난 것으로 보였다. 나는 긴장을 풀고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노인의 눈은 파르르 떨리며 겨우 떠졌다. 평소의 강인한 눈
빛은 어디로 가고 연약한 시선만이 나를 향했다.
"지금 이게 괜찮은 걸로 보이나···. 멍청한 소리를···."
그는 숨을 한 번 몰아쉬곤 다시 말했다.
"뒤처리는··· 내게 맡기마···."
노인은 이 말을 마치고 그때와 같이 혼절하였다.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와 호예린을 보았다. 뒤처리라면 호예린의 세뇌를 말하는 것일 텐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인가?
호예린의 걱정스러운 시선. 그 끝이 노인을 향하는 걸로 봐선 분명 무언가 암시가 들어가긴 한 모양이었다. 나는 면밀히 파악하기 위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 소장주 되시오?"
호예린은 내 말을 듣고 나서야 나를 보았다. 피암시자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공허한 시선은 아니었다. 암시가 끝난 상태에서 보이는 평범한 눈빛이었다.
"소장주···?"
되묻는 울림이었다. 호예린은 자신이 호가장의 소장주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상태로 보였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했다. 호예린이 노인을 향해 보인 시선. 양섬문과 강휘영.
대강 답은 나왔다. 나는 포권을 취했다.
"아, 다른 사람과 착각을 했습니다. 저는 양섬문의 왕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