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돈과 사람(1)
[관계도]
관계도는 동료 용사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관계도는 –5~5까지 존재합니다.
카야 : 1
‘뭐야 이 뜬금없는 지표는?’
카야는 내게 던전행의 이유를 물어봤을 뿐이었다. 상당히 진지한 분위기에서. 근데 갑자기 이런 지표가 개방이 되었다고?
또 한 번의 불안정성이 올라갔다. 하지만 앞서 겪었던 것들보다 차원이 달랐다.
공포의 상자방에서 겪은 ‘강제 추방’ 기믹은 어느 정도 허용 범위 안이었다. 어디까지나 상자방의룰렛 안에 엿같은 요소가 1개 추가되었고, 재수 없게 처음부터 그걸 뽑았다고 보면 됐다.
하지만 이 관계도라는 건 그런 식으로 커버칠 수 없었다. 아예 게임의 장르가 달라지는 수준이었다.
희망, 사랑, 꿈 이런 것들과 거리가 오억 광년 정도는 떨어진 이곳. 누구하나 언제 뒤져도 이상하지 않은 이곳.
게임 <더 롱 테러>에서는 캐릭터의 사이드 스토리나 캐릭터간의 케미는 거의 전무한 수준에 가까웠다. 정 붙이다가 툭하면 뒤져버릴 수 있으니, 제4의 벽을 넘어 플레이하는 게이머들이나 캐릭터 당사자들 간에도 비지니스적으로 대하는 게 서로가 편한 것이었다.
그런데 굳이 이런 지표가 뒤늦게 떴다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인가?
‘무작정 합리적인 게이머의 시선으로 클리어하는 걸 지양하라는 건가? 동료 용사들은 소모품이 아니라, 정말로사선을 함께 넘나드는 전우처럼 여기라고?’
별것 아닌 동료들에게도 정을 느끼고 가까워졌다가 그들이 죽으면 더욱 더 좌절하게 만들기 위한포석이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피해망상인 건가?
아니면 단순히 이 게임 특유의 불친절함이 발휘된 것일 수도 있었지만….
어느 쪽이든, 최적의 클리어 루트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나는 관계도라는 항목을 보자마자 찬물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말하기 어려운 것입니까. 이해합니다.”
내 분석과 고민으로 인한 침묵을 대답하기 싫은 것으로 해석한 것일까. 카야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낡고 해진 1인용 소파에 몸을 낑겨넣었다. 어떻게든 자세를 잡아 잠을 청하려는 모양이었다.
“거기서 불편하게 뭐해. 침대로 와.”
“대장의 돈이 없었으면 애초에 여관에 머무를 수도 없었습니다. 당장 노숙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
“내가 안 충분해. 보는 사람이 죄 짓는 거 같다고.”
나는 카야의 손을 잡고 강제로 일으켰다. 평상복 차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게가 꽤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녀를 침대로 인도했다.
“엄청 넓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같이 못 잘 정도로 엄청 좁지도 않아. 짧긴 하지만 던전에 갔다왔는데 적어도 쉴 땐 최대한 편히 쉬어야지.”
“…그렇습니까.”
“당연한 거 아냐? 아까처럼 자다간 오히려 몸 상태가 더 악화되겠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한쪽에 누웠다. 그러자 카야도 조심스럽게 몸을 뉘었다. 최대한 내 몸과 닿지 않으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다보니 침대 끝에 걸쳐서 옆으로 누워있는 모양새였다. 살짝만 구르거나 톡 건드려도바로 방바닥에 처박힐 것 같았다.
가만. 생각해보니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도 하룻밤 같이 잤었는데, 어떻게 같이 잔 거였지?
“그러다 떨어질라. 조금 더 안쪽으로 누워도 괜찮아.”
“괜찮습니다.”
“아니면 나랑 같이 누워있는 거 자체가 불편해?”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뭔데.”
카야는 여전히 등을 보인채로 중얼거렸다.
“둘 다 불편하게 눕는 것 보다는, 한 명이라도 편하게 눕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
나는 카야가 왜 이러는지 아리송했다. 그런 이유를 댈 거였으면 처음부터 소파에서 일어나질 말던가. 침대에 누웠으면서 그런 자세로 불편하게 눕는 게 같이 눕자고 말한 사람 입장에서 더 불편한 거 모르나?
그렇게 입을 열려는 순간, 관계도가아른거렸다.
카야 : 1
숫자 하나에 불과한 관계도. 보통 이런 거 기본값은 0 아닌가.
그런데 그녀는 내게 던전행의 이유를 물었고, 관계도가 해방됐으며, 해방되자마자 –5부터 5까지 존재하는 관계도 수치에서 1이 나타났다.
그만큼 그녀와 나 사이의 관계에서 중요한 질문이라는뜻을 내포한 것일까. 아니면 그녀와 함께한 짧은 시간동안 내게서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불친절한 시스템은 그런 걸 설명해주진 않았다. 내가 즐겨보던 어떤 소설에서는 시스템이 아주 친절해서 다른 캐릭터들 속마음까지도 주절주절 다 나오거나 심지어 시스템과 주인공이 대화하며 흥정까지 해서 목표도 수정하고 그러던데.
내가 겪는 시스템은 정말 최소한도의, 꼭 해줘야만 하는 설명만 툭 던져주고 방생하는 느낌이었다.
쓰읍.
‘던전행 전에 같이 잘 땐 아무런 감흥 없이 옆에 누웠던 카야가 지금은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건… 아까 질문에 침묵해서 그런 것일까.’
머리가 아팠다. 내 <더 롱 테러>의 플레이타임은 3천 시간이 넘었지만, 거기엔 호감도작이라 불리는 건 1분도 포함되지 않았다. 자신이 없었다. 깨가 쏟아지고 달짝지근한 꿀이 흘러내리는 알콩달콩 미연시 같은 게임은 손 대본 적도 없었다. 현실이든 2D든!
하지만, 그녀와 이대로 밤을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예감이 날 휘감았다.
‘씨발 연애 한 번 못 해보고 여자의 ㅇ도 모르는 내 본능 따윌 믿어도 되는 건가.’
나는 그녀를 강제로 편하게 눕히는 대신, 그냥 입을 열었다.
“용사대의이름은 왜 이렇게 지어졌는지 알아?”
“….”
갑자기 입을 열자 그녀의 대답은 없었지만 카야의 몸이 살짝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듣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계속 중얼거렸다.
“Heroes Against Terror. 공포에 맞서는 용사들. 나는 나 같은 용사들과 함께 던전을 헤쳐나가는 용사대를 꾸리고 싶었어. 전설적인 용사도, 뛰어난 무력의 용사도 아닌 겨우 1레벨짜리 햇병아리의 말 치고는 광오한 말이지만… 난 저 던전을 정복하려 하면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껴.”
이 캐릭터, 헨드릭의 마음과 지구에 있을 한유진의 마음을 적당히 뒤섞었다. 내가 이 던전을 백 번도 넘게 클리어하고, 그 몇 배 이상을 실패했다는 건밝힐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말은 진심이었다.
나는 이 게임이 좋았고, 재밌었다.
그래도 공포의 대상인 던전에 들어가는 걸 좋다고, 재밌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알아서 해석하도록 적당히 뭉개는 게 필요했다.
아직 우리 사인 모든 걸 털어놓을 정도의 관계는 아니지 않나.
“이미 자연 현상처럼 되어버린 저 공포를 한낱 나 따위가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안 해. 사상 초유의 폭염이 발생한다고 해서, 저 이글거리는 태양이 원망스럽다고 해를 떨어뜨릴 수 있어? 홍수가 났다고 하늘의 구멍을 메울수 있고? 지진이 난다고 울부짖는 땅을 닥치게 만들 수도 없지.”
“….”
카야의 몸이 살짝 이쪽으로움직이는 게 보였다. 인간보다는 뾰족하고 엘프보다는 덜 뾰족한 귀가 이쪽으로 쫑긋거리는 것도 보였다.
“수녀 앞에서 이런 말 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운명이란 걸 나 개인적으로는 별로 안 좋아해. 내가 죽어라 노력한다 해도 내 의도와 반대되는 것이 운명이라서 반드시 그쪽으로 흘러간다면, 그것만큼 허무하고 좆같은 것이 없잖아. 하지만 예외가 있어. 저 던전은 내가, 그리고 내가 꾸린 용사대와 함께 정복해야 한다는 게 ‘운명’처럼 느껴진다는 거.”
“대장은, 저와 마찬가지로 초행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어찌….”
카야는 말을 삼켰다. 무슨 말을 하려 한 걸까.
“던전행은 처음으로 인정한내 운명이야.용사대도 운명이고, 그런 용사대에 처음으로 합류한 카야, 너도 운명이지. 용사대는 운명공동체라 할 수 있고.”
“운명, 공동체….”
“나는 나 같은 사람들과 함께 용사대를 꾸리고 싶어.”
나는 앞서 했던 말을 반복하며 입을 다물었다. 어찌, 잘 포장됐으면 좋겠는데.
나는 힐끔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카야가 완전히 몸을 똑바로 눕힌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우반신과 내 좌반신이 맞닿고 말았다.
얇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감촉에 흠칫하고 말았다.
“대장의 마음속에 그런 깊은 뜻을 가지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제게 속을 털어놔주셔서 감사하고, 또 죄송합니다.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는커녕 실망스러운 모습만 연속해서 보여드렸는데….”
카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운명, 그리고 운명 공동체라는 말이 제게 이렇게 와닿은 적은 처음입니다. 수도원을 떠날 때, 그리고 처음으로 대장을 만날 때심장이 두근거렸던 것은 이를 가리키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건 그냥 떨리고 긴장해서 그런 거 아닐까.’
어째, 포장이너무 잘 먹히는 그림인데?
“겉모습도 흉하고 재주도 일천한 잡종에 불과한 저를, 거리낌 없이 대장의 운명에 받아들여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제가 태어나고 나서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제 존재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겉모습이 흉하다고? 네가? 내가 본 여자들 중에 네가 제일 예쁜데?”
“…………….”
‘쓰읍.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걸어버린 태클이 즉시 퇴장감인 것이었나. 카야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다른 건 몰라도 저 외모를 흉하다고 하는 건 못 참지. 그럼 난 반건조 오징어만도 못하게 되는 건데.’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상당히 오글거리는 말을 해버린 나와 여전히 경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카야는 이 이상 말을 이어나가기가 어려웠다.
‘씨발, 따지고 보면 칭찬한 건데 분위기는 왜 이러지.’
나는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도망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 이후로 한참동안 누군가 날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
[‘인스턴스 던전’ 항목이 해금되었습니다.]
[인스턴스 던전은 ‘던전’과는 별개로 세일럼 인근 혹은 ‘던전’ 내부에 존재하는 또 다른 종류의 던전입니다.]
[인스턴스 던전은 같은 용사대가 아니더라도 함께 입장할 수 있습니다.]
“씨발 가지가지하네. 이게 바로 좆차개방 뭐 이런 거냐? 알려줄 거면 빨리빨리 알려달라고 제발….”
“일어나셨습니까, 대장.”
“아, 카야. 언제 일어났….”
약올리는 것 같은 시스템 메시지에 다시 한 번 욕을 씹고 있던 차, 어제나 그제보다 힘이 들어간 것 같은 카야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쪽으로 고갤 돌린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에 앞서서 세일럼 지부에 들르고 싶은데… 대장의 허락을 받고 싶습니다.”
어제의 평상적인 수녀복이 아닌, 다른 형태의 수녀복을 입은 카야가 내 눈을 어지럽혔다.
“‘진심’인가.”
“…예? 예. 진심입니다.”
끄덕-
나는 이 세상에 떨어지고 난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준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 그렇게 된 거, 나도 같이 가자.”
“예? 하지만.”
“얼마 안걸리는 일일 거 아냐? 뭐, 개인적인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끄덕-
카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색 머리카락이찰랑거렸다.
“그 전에, 먼저 나가줄래? 준비하고 나도 바로 나갈 테니까.”
“예. 대장. 1층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녀가 나간 후, 이불을 들추며 중얼거렸다.
“진정하라고….”
그나마 코피는 안 쏟는 타입이라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