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첫 인던(3)
5. 첫 인던(3)
나는 반사적으로 코와 입을 한 번에 가렸다. 카야도 내 모습을 본 건지 행동을 따라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유진이 상태이상 ‘중독’(3턴)에 걸립니다.]
[유진이상태이상 ‘혼란’(3턴)에 걸립니다.]
[유진은 상태이상이 지속되는 동안 피아의 구분이 어려워집니다.]
‘중독, 혼란?’
이 정체불명의 연기는 복합 디버프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카야는 하고 지켜봤지만 그녀도 나랑 다를게 없었다.
“카야! 해독제하고 성수 준비해! 언제든지 마실 준비해야 돼!”
“예! 대장!”
연기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괜히 조급하게 마셨다가 다시 걸리면 애꿎은 해독제랑 성수만 날리는 거였다.
‘피습(적 기습)이나 압도만 안 당하면 내 턴에 약 먹고 디벞 풀 수 있어.’
내 속도는 다행히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선턴을 잡을 자신이 있었다.
[근육을 녹이는 고통이 용사의 정신에 흠집을 냅니다.]
[유진 남은 체력 14/15]
[카야 남은 체력 13/14]
[유진 멘탈리티 –2]
[카야 멘탈리티 –3]
해독제를 마시지 못한 채 시간이 좀 흐르자 중독 데미지가 1틱 들어왔다. 근데 짜증나는 건 멘탈리티까지 같이 까였다는 것이다.
‘별 거지같은….’
이를 악물고 흐릿한 시야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가운데, 저 멀리서 거뭇거뭇한 형체가 떡하니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거다!’
딱 봐도 연기의 근원처럼 보였다. 하기야, 이런 개 같은 연기가 함정이나 자연현상일 리는 없었다.
“카야.”
“예. 저도 보입니다.”
나는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그러자 거뭇거뭇한 형체의 모습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였다.
“저게, 무슨….”
“이, 이, 이.”
나는 처음으로 보는, 굳이 비교하자면 공포의 상자방에 있던 공포의 상자보다더 흉측하고 이상한… 그런 구조물이 새까만 오오라를 풍기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걸 내가 느낀대로 표현하기에는 내 어휘력이 너무 빈곤했다.
기기괴괴와 흉측함과 아득함과 불이해.
대충 저런 개념이 한데 뒤섞여 살짝 보기만 해도 짙은 혐오감과 구토감을 유발하는, 그런 구조물이었다.
나는 굉장한 거북함과 혐오감을 느꼈고, 카야는… 무덤덤한 얼굴이 거세게 일그러진 상태였다. 불구대천의 원수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철퇴를 휘둘러 저 구조물을 박살내고 싶은 것 같았다.
‘그건 동감이야.’
나는 카야에게 해독제와 성수를 마시라고 했다. 그녀가 마시고 나도 따라 마셨다.
[유진이 상태이상 ‘중독’에서 벗어났습니다.]
[유진이 상태이상 ‘혼란’에서 벗어났습니다.]
[유진은 다음 전투에 한해 정신적 상태이상에 대한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사악한 것을 정화하는 성수의 효능 그 두 번째, 정신적 상태이상 저항력을 상당히 끌어올려주는 효과가 메시지로 나타났다. 적어도 혼란 같은 디버프가 다시 걸릴 일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안심이 되었다.
‘저걸 거야. 증거라는 거.’
의뢰주 아저씨가 한 번 보면 절대 모를 수가 없을 거라고, 말로 표현하긴 꽤나 난해하다는 거.
씨발, 증거라는 게 저런 거였으면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건데.
침을 한 번 삼키고 거북함을 억누르며 한 발자국 더 다가가자 분위기가 일변했다.
“조심!”
구조물만 있던 불길한 공간에, 시커먼 연기가 세 덩이 솟구치더니 그대로 몬스터 세 마리가 튀어나온 것이다.
“침입자… 넌, 못 지나간다….”
“제단을, 욕 보이는 자….”
“마땅히, 그 죄를 치러야 할 것이다.”
“-죽음으로.”
[정예 괴물, <제단의 수호자>와 조우했습니다!]
**
정체불명의 구조물이 제단이라는 것과 저 괴물놈들이 그걸 지키는 수호자라는, 아주 유용하기 짝이 없는 정보가 내 망막을 더럽혔다.
‘그딴 것보다, 정예 괴물이라는 거.’
세마리가 나왔는데 정예 괴물이라는 건, 보통 한 마리씩나오는 정예 괴물에 비해 한 개체씩은 약할 게 뻔했다.더 롱 테러에서도 그런 정예 괴물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다개체 정예괴물은 단개체 정예괴물보다 각기 스펙은 떨어지지만, 독특한 기믹 같은 게 튀어나와 게이머들을 엿 먹이곤 했다.
‘일단 유념해야 할 건 링크랑 불멸 정도.’
링크는 피해를 안 받은 다른 놈이 대신 피해량의 일정 부분을 받아내는 것이었고, 불멸은 전 개체를 일정 턴 안에 조지지 않으면 일정 턴 내에 부활하는 것이었다.
‘지금 상황에선 불멸보단 링크가 낫지. 오백 배 정도.’
괴물은 셋, 우린 둘.
만약 저놈들에게 불멸 특성이 있다면, 원샷원킬을 내지 않는 이상 우린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저놈들을 상대하다가 말라죽는 미래가 보였다.
‘본 던전도 아니고, 만약 여기서 저 놈들이불멸 뜨면… 그냥 얌전히 뒈질게. 씨발 개 똥망겜.’
[제단의 수호자]
최대체력 :77
공격력 : ?~?
방어력 : ?
속도 : ?
하지만 그런 각오는 무색하게도, 눈에 보이는 괴물의 기본 스펙은 정말 물음표 그 자체였다.
세 명이서 하나, 그런 건가? 그런 것 치고는 왜 체력 말고 나머지 전체가 물음표….
[속도 체크]
[유진 : 7]
[카야 : 4]
[제단의 수호자 : 3]
생각은 거기까지라는 듯, 속도 체크가 이루어졌다. 결과를 보고는 살짝 웃음이 나왔는데, 생각 이상으로 저놈의 속도는 시궁창이었다. 속도가 느린 편인 카야보다도 속도가 느렸고, 이건 굉장한 호재였다.
턴제에서 선턴의 중요성은, 백 번 말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너도 어디 한 번 낙인맛 좀 봐라.”
[수배범 발견]
[유진이 제단의 수호자를 수배범으로 낙인을 찍습니다.]
[유진이 제단의 수호자에게 1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76/77]
[낙인은 3턴 간 유지됩니다.]
[낙인이 유지되는 한, 모든 물리적 데미지가 25% 증폭됩니다.]
내 클래스, 현상금 사냥꾼(트헌)의 존재 의의 1.
낙인.
자신의 데미지뿐만 아니라 나머지 동료들의 물리 공격까지 뻥튀기시키는, 단일 대상에 한해서 말도 안 되는 성능을 보여주는 디버프.
디버프 형식이기 때문에 괴물의 저항력이 높다거나 재수가 없어서 낙인을 찍는데 실패한다면, 메인 딜러의 한 턴을 꽁으로 날려먹는다는 단점이 존재했지만… 그거야 디버프 스킬의 공통적인 단점이었으니 굳이 더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타타타탓-!
콰아앙-!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카야가 제단의 수호자에게 8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68/77]
“…어?”
“대장….”
지금까지 분명, 콰직이나 콰득같은소리를 냈던 카야의 철퇴는 무언가에 단단히 가로막히는 소리를 냈다. 단순히 치명타를 띄우지 못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낙인을 먹였다. 카야의 무기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상태다.
근데… 고작 데미지가 8?
저놈의 방어력은 대체 몇이라는 얘기지?
“넌… 못지나간다….”
[수호자의 태세]
[제단의 수호자가 굳건한 방어의 자세를 취합니다.]
[제단의 수호자의 방어력이 5 증가합니다.]
[제단의 수호자의 모든 저항력이 50% 증가합니다.]
[제단의 수호자가 굳건한 방어의 자세를 유지하는 동안 매 턴 2의 체력을 회복합니다.]
[제단의 수호자(방어)]
최대체력 : 77
공격력 : 5~5
방어력 : 10(5+5)
속도 : 3
[남은 체력 70/77]
“미친….”
방어력 5 추가에 체젠 2?
그나마 정예괴물 치고 저 병신같은 공격력과 속도는 최후의 양심이라도 되는 건가?
우리가 존나 허접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인던 자체가 우리 수준과 안 맞는 건지.
더 롱 테러에선 용사와 던전의 수준이 너무 안 맞으면 용사들이 쌍욕하며 탈주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로, 아예 편성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었다.
‘씨-발.’
방어력 10이라니.
저 섬뜩이는 낙인 표시와 예기를 드러낸 도끼날이 이렇게 초라해보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저놈 공격력도 약하니, 두드려보긴 해야 했다.
“씨발!”
[대가리 분쇄]
[유진이 제단의 수호자에게 7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63/70]
“이 정도로는… 끄떡없다….”
낙인 25% 증폭에 인간형괴물에겐 4데미지 보정이 들어가는 대가리 분쇄를 쳐맞고도 고작 7데미지.
괴물새끼의 한마디가 꼭 네 공격은 좆도 아니라고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저 새끼가… 카야.”
“예. 대장.”
치명타가 펑펑 터지지 않는 이상 장기전을 각오해야 했다. 다행히, 카야의 나머지 스킬들은 어느 정도 용사대의 유지력에 기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절정이다. 카야.’
“하아아앗…?”
[2스킬. 절정]
- 자신 버프
- 최대 공격력 1, 속도 1 증가
- 매 공격 적중시 무작위 아군 체력 1 회복
[카야가 절정을 맞이합니다.]
[카야의 최대 공격력이 1, 속도가 1 증가합니다.]
[카야의 공격이 적중할 시, 카야를 포함한 전체 아군 중 무작위 한 명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
[절정은 3턴 지속되며, 중첩될 수 있습니다.]
카야의 얼굴이 붉어지고 눈동자가 반쯤 풀리며, 뜨겁고 달짝지근한 공기가 그녀 주위로 푹푹 퍼지는 건 기분 탓이 아니니라.
‘절정이라는 게 그 절정은 아니겠지. 신적 고양감, 뭐 이런 거겠지. 알지. 아는데. 존나 제작자 취향….’
절정은 실제 더 롱테러 전투수녀의 클래스 스킬 중 하나였다. 게임 상에선 전투수녀를 많이 안 쓰는 편이었고, 절정 스킬은 더욱 쓸 일이 없었기에… 카야가 저런 모습이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이다.
“어찌, 제단 앞에서, 그런, 위선자의, 빛을…!”
그런데 카야의 신성력(흥분)이 무언가 트리거를 건드려버린 것일까?
고슴도치마냥 웅크리고 있던 괴물놈이 갑자기 급발진하며 달려들었다!
“스러져라…!”
“씨발!”
[수호자의 격노]
[제단의 수호자가 유진에게 1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3/15]
[유진이 상태이상 ‘기절’(1턴)에 걸립니다.]
[항거할 수 없는 거력에 유진이 뒤로 밀려납니다.]
[유진은 다음 턴에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습니다.]
[무력감에 공포심이 차오릅니다.]
[유진 멘탈리티 –3]
[제단의 수호자가 취한 굳건한 자세에체력이 차오릅니다.]
[남은 체력 65/77]
“대자아아앙-!”
괴물이 휘두른 커다란 무언가, 방패로 추정되는 물체에 제대로 맞은 나는 형편없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1열에 서 있던 나는 강제로 카야 뒤로 밀려났고, 소모성 물품을 사용하는 거나 위치 이동을 포함해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유진이 턴을 넘깁니다.]
[유진이 상태이상 ‘기절’에서 벗어났습니다.]
기절은 최상급 cc기였고, 기절에 걸린 나는 허무하게 내 턴을 넘길수밖에 없었다. 아니, 넘겼다는 것도 어폐가 있는 게 그냥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내 턴이 삭제됐다. 지랄맞고 짜증나고… 또 내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 당한다는 게 스스로가 한심했다.
처음으로 내 앞에 서게 된 카야는 절정의 영향인지, 아니면 내가 형편없이 굴러서 그런지는 몰라도 상당히 흥분한 모습이었다.
가라.
어차피 나나 카야나, 당장 쓸 수 있는 딜링기는 각자 하나밖에 없었다.
“감히, 대장을!”
꽈아아앙-!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전율적인 일격!]
[카야가 제단의 수호자에게 22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43/77]
[용사들의 마음에 전율이 흐릅니다.]
[유진 멘탈리티 +3]
[절정의 효과로유진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유진 남은 체력 14/15]
방패를 두드리는 타격음이 대충 생각해도 두 배 이상은 시끄러웠다. 그리고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검은색 무언가가 뭉텅이로 떨어져나갔다. 제대로 타격이 들어간 것이었다.
“좋았어!”
끄덕!
1회차 던전행과는 다르게, 이번 인던에선 완전히 카야의 턴이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카야의 모습은 저딴 괴물들보다도 훨씬 굳건해보였다.
“제단을,욕보이고, 수호자인, 우리를, 해치려, 하다니… 파멸을 맞이하게 되리라.”
[제단의 수호자가 치밀한 계략의 자세를 취합니다.]
[굳건한 방어의 자세가 해제됩니다.]
[제단의 수호자의 속도가 2 증가합니다.]
[제단의 수호자의 공격력이 1~3 증가합니다.]
[제단의 수호자의 턴이 끝날 때마다 무작위 용사에게 무작위 상태이상을 부여합니다.]
“위선은, 추악한, 것이니. 곧, 드러나리라!”
뭐 어떻게 할 것도 없이, 검은 무언가가 카야의 몸에 쏙 들어갔다.
“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