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준비(1)
기록적인 거?
지금 이 아저씨가 뭘 물어보는 거지?
아직 안 보여준 대가리 두 개로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건가? 아니면… 뭔가 알고 있는 건가?
더 롱 테러였다면, 어쩌면 지금 우리의 인던행은 대충 <이단 증거 수집> 퀘스트였고 퀘스트 NPC는 의뢰주 아저씨였으며, 클리어 조건이 제단 파괴 혹은 이단의 ‘기록물’ 제출 따위였을지도 모르지.
일단은 모르는 척 되물어봤다.
“기록적인 거, 라고 하심은?”
“확실히 이단이라고 하지 않았나. 제단까지 있다고 했고. 어느 교단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제단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겠나. 수호자라는 존재까지 있을 정도면, 이단에게 있어서 그 의미는 더 커다란 것이겠고. 그러니 제단 안에, 아니면 수호자가 무언가를 지니고 있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지.”
내가 생각하기엔 적당히합당한 추론이었다. 하지만 굳이 ‘기록적인 거’라고 말한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나는 일단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인던의 크기는 생각보다 더 컸고, 애초에 한두 번 왔다갔다 해서 해결할만한 의뢰도 아니었다. 일단은, 먹튀하지 않고 증거를 가져왔다는 것 자체로 의뢰주 아저씨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구축했다 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조사해줬으면 하는 건 어디까지나 내 욕심이야. 조사를 여기서 그만두는 것도 어디까지나 자네 자유고.”
“일단은 동료와 상의하는 게 먼저일 것 같습니다. 조사를 더 진행하든, 그만두든 어떤 결론을 내리든 다시 이곳에 오겠습니다.”
“좋아. 그렇게 하지.”
증거가 될 머리를 한쪽 구석에 놓고 2금화를 챙겨서술집을 빠져나갔다. 이번 인던행에서 얻은 눈에 보이는 소득은 정예 괴물을 잡고 나온 2금화까지 합해서 4금화.
물론 아직 상당히 많이 남은 물품들과 무기 업글 비용까지 생각하면 그 몇 배 이상의 소득을 얻었지만, 굴릴 수 있는 돈은 4금화와 은화 몇 개가 전부였다.
‘이 돈으로는 스킬 체인지는 어림도 없겠는데.’
그나마 가능할 스킬 레벨업은 불가능했다. 스킬 레벨은 용사 레벨 이상으로 올릴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미리 알아볼 겸, 아이쇼핑이라도 해볼까.’
몸은 힘들었지만 지금 쉬러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싫을 것 같았다. 스스로의 마음에 채찍질을 하며 튜토리얼 때 가보고 안 가본 용사훈련소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용무가 어떻게 되시나요?”
“스킬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클래스는요?”
“현상금 사냥꾼하고, 전투 수녀 쪽입니다.”
“네. 잠시만요.”
훈련소 직원은 접수대 안쪽을 뒤적거리더니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힐끔 보니 용사대 이름이랑 클래스, 현재 습득한 스킬들, 그리고 수준(레벨) 같은 걸 적어야 하는 문서였다. 얼른 적어서 되돌려주자 직원이 눈을 찌푸렸다.
“HAT의 헨드릭 용사님?”
“예.”
“수준이 1이시고, 기본 스킬들을 배워가신 지 얼마 되지도않으셨는데… 지금 수준에선 마땅히 추천드릴만한 스킬들이 몇 개 없어요.”
걱정해주는 거냐, 아니면 귀찮아서 그러는 거냐.
걱정해주는 거면 쓸데없는 오지랖이고, 귀찮아서그러는 거면 선 넘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솔직히 저 표정이랑 말투 보면 99% 후자인 거 같지만.
하지만 난 겨우 1렙. 굴러다니는 돌만큼 흔한 1렙용사였다. 세일럼 시 직영인 용사훈련소 소속 말단 직원에게도 하고 싶은 말을 필터에 걸러야 했다.
“도움이 될 만한 다른 스킬들을 미리 견식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하아아….”
직원은 나 들으라는 듯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이 씨발년이. 레벨 존나 높아져도 그딴 태도일지 두고 보자고.
속으로 눈앞의 직원을 씹어대자, 잠시 사라졌던 직원이 몇 권의 스킬북들을 툭툭 접수대에 쌓기 시작했다.
“한 번 살펴보세요. 딱 첫 번째 페이지까지만 보시고, 그 이상은 보시면 안 되고요. 만약 스킬북이 발동되면, 구매하신 걸로 간주할 테니 유의해 주시고요.”
“감사합니다.”
나는 잽싸게 스킬북들을 들고 구석에 있는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현상범 사냥꾼 클래스의 스킬북부터 펼쳐봤다.
[막타!]
- 괴물의 체력이 50% 이하일 때 데미지 보정+10%
- 괴물의 체력이 10% 이하일 때 데미지 보정+20%
“아니, 이건 왜 이따구로….”
대가리 분쇄와 더불어 주력 뎀딜 기술인 [막타!]는 눈이 썩어버릴 것 같은 능력으로 바뀌어 있었다. 저 10%나 20%가 굉장히 큰 수치 같지만, 지금의 내가 사용해봤자 +1, +2나 다름없었고 추뎀 조건 또한 굉장히 하찮았다. 애초에 남은 체력이 10% 이하면 절대적 수치로도 얼마 안 남은 상황이니, 추뎀 자체의 의미도 퇴색됐고. 물론 스킬의 레벨이 올라가면 수치가 올라가고 추뎀 조건이 완화되겠지만, 그건 다른 스킬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이걸 쓸 바엔 1렙부터 추뎀 2가 붙어있고, 인간형에게는 4의 추뎀이 붙어있는 데다가 심지어 명중률 보정도 33까지 달려있는 대가리 분쇄가 훨씬 좋았다. 후반 가면모르겠지만, 지금 내 코가 석잔데 후반은 얼어죽을.
‘씨발, 잠깐. 만약 대가리 분쇄 대신에 이게 붙었다면….’
소름.
못 볼 걸 본 것처럼 재빨리 덮은 나는 다른 스킬북들도 펼쳐봤으나, 지금 시점에서 익힐 수 있는 스킬의 수준이 다 거기서 거기였다. 애초에 스킬 풀이 그렇게 넓은 게임도 아니었고, 진짜 좋은 스킬은 보물상자에서 득하거나 던전 상점에서 쌍욕나오는 가격에 구매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아쉬움을 달래며 이번엔 전투수녀 스킬 북들을 살펴봤다.
[전투수녀의 참회]
- 자신의 체력을 1 자해
- 자신의 멘탈리티를 6 회복
- 자신의 각종 저항력 상승
‘정신 나갔군.’
전투수녀의 참회나, 기존에 가지고 있는 전투수녀의 고행이나 하나같이 자해를 베이스로 가지고 있었다. 스킬북 정면에 온몸에 채찍 자국이 나있는 수녀의 모습이 그려져있었는데,카야가 이 스킬을 사용한다고 상상하니 속이 거북해졌다. 백 번 양보해서 효과가 엄청 좋으면 또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바로 걸렀다.
[회개하라]
- 지정한 괴물에게 일정 확률로 상태이상 ‘기절’ 부여
- 괴물이 상태이상 ‘기절’에 걸릴 시, –50% 보정치의 공격을 가함
- 괴물이 상태이상 ‘기절’에 걸리지 않을 시, -50% 보정치만큼 자신의 앞에 있는 동료의 체력을 회복함
“오.”
드디어 쓸만한 스킬이 나왔다. 최상급 cc기인 기절이 달려있는데다가, 기절이 실패해도 자신의 앞에 있는 동료에게 힐이 들어간다는 보험이 있었으니까. 힐이 들어가는 위치가 제약이 있고, 데미지 면에선 별로 기대할 수 없어서 전투력이 어느 정도 있는 전투 수녀가 사용하기엔 조금 그렇지 않나 싶었으나… 현재 하드cc가 전무한 우리 용사대의 상태를 고려했을 때 굉장히 끌리는 스킬이 아닐 수 없었다.
혹시 이거 말고 다른 괜찮은 걸 놓치지 않았나 싶어서 다시 한 번 싹 훑어봤지만, 전부 하나씩 나사가 빠져있었다.
“혹시, 이 스킬북은 얼마나 합니까?”
“전투 수녀 클래스에 회개하라 스킬북… 20금화네요. 첫 구매면 10% 할인이 적용돼서 18금화고요.”
“….”
씨발.
뭐, 그래. 어차피 온전히 내 돈도 아니었고, 살 돈이 있었다고 해도 먼저 카야랑 상의를 하는 게 맞겠지. 내가 사용하는 스킬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애초에 살 생각은 없었어. 없었다고.
씨발.
욕이 절로 나오는 가격에 얌전히 스킬북을 반납하고 훈련소를 나왔다.
“…오늘은 이만 쉬자. 가격 듣자마자 확 지치네.”
용사대 강화의 길은 너무나 험난했다.
**
쏴아아아-
“하아아….”
살인적이고 비상식적인 물가를 자랑하는 세일럼에서, 그나마 ‘양심’적인 것이 뭔지 꼽으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말할 수있는 게 바로 이것.
여관 방에 따뜻한 물로 몸을 씻을 수 있는 욕실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공간은 좁았지만, 사적인 공간에서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는데 그게 대순가.
약간 어설프게 몸을 휘감았던 핏빛 붕대를 전부 풀어내고 온수가 나오는 수도꼭지에 몸을 맡기자, 곧 욕실 바닥은 핏물로 가득했다.
몸 곳곳에 남은 말라붙은 핏가루와 딱지들이 씻겨나갈수록, 뽀얀 피부와 단련됐으면서도 여성적인 굴곡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신체가 드러났다.
신체의 주인, 카야는 이번에 다쳤던 곳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흉터는, 생각보다 미미하네.’
구석구석 몸을 체크하다가, 돌연 자신의 팔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았다.
“냄새… 그렇게 심했나.”
카야의 얼굴이 붉어졌다. 온수 때문인지, 민망함 때문인지는 그녀도 몰랐다.
“대장….”
신성력 덕분인지 흉터도 자세히 쳐다보지 않는 이상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아물었고, 냄새도 빠져나간 걸확인한 그녀는 곧 자신을 이끄는 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고 말았다.
분명 경험적인 측면에선 그녀와 다를 바 없을 텐데. 수준도 똑같고, 장비도 비슷한데.
아직 뭘 대단한 걸 이룬 것도 아닌데, 그의 지시를 따르는 게 두렵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믿음이 갔다.
‘운명. 운명 공동체.’
침대에서 그가 말했던, 심장을 떨리게 했던 단어 또한 기억이 났다.
그가 운명이라는 단어를 내뱉은 순간, 그는 카야의 운명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 또한 그의 운명이 되고 싶었다.
맨 처음, 자신이 믿고 따르는 여신에게 신성력을 받았을 때 느꼈던 떨림과는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
그런느낌을, 낯선 남자에게서 받았다는 게 신기하고 또 그렇기에 운명이구나 싶었다.
그렇게 대장을 생각하다보니, 그가 붕대를 감아줬을 때의 감촉이 떠올랐다.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았었는데.
“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대장은 자신을 걱정해서, 동료를 걱정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행위를… 수녀인 자신이 이런 그릇된 생각을 하는 건 옳지 않았다.
‘난… 더러우니까. 나는 불행의 상징이니까.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건 여신의 종이라서 가능한 거니까….’
여신의 철퇴이자, 대장과 함께 던전의 끝을 볼 자.
자신은 그걸로 충분했다. 그거면 된 것이다.
머리에 거품을 내며, 카야는 눈을 감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녀는 아직 완벽히 낫지 않았나, 라고 생각했다.
똑- 똑- 똑-
잡념을 지우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만족스럽게 씻어낸 그녀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약간은 낙후된 듯, 물방울이간헐적으로 바닥에 떨어졌지만 카야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건 아니었다. 그녀는 수건으로 몸을 꼼꼼히 닦고는 구석에 놓아둔 새 속옷을 입고 욕실 문을 열었다.
“후우….”
씻고 나니 자신의 엉망이 된 갑옷에서 나는 피냄새를 더욱 선명하게 느낀 카야는, 대장이 오기 전에다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갑옷을 들기 위해 허리를 굽히던 순간이었다.
벌컥-
“카야. 나 왔….”
“………….”
“아, 어어. 음, 좀 이따가 다시 들어올게.”
“대장.”
“어, 어?”
“여긴 대장과 제가 같이 쓰는 방입니다. 저만의 방이 아닙니다. 마치 저만의 방에 몰래 들어온 것처럼 행동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그, 그건 맞긴 한데.”
걸으면서도 눈이 슬슬 감길 정도로 피곤했던 나는 갑작스레 시야에 들어온 뽀얀 피부의 향연과, 이쪽으로 향한 탄탄하면서도 쭉 뻗은 하체. 그리고 수수하지만 살짝 젖어서 착 달라붙어있는 속옷까지.
단숨에 피로가 확 날아가는 아찔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끼익-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여전히 등을 돌린 상태의 카야가 말했다.
“…대장의 배려 덕에 전 먼저 씻었으니, 대장도 편하게 씻으시길.”
아니, 존나 침착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기에 괜찮은 줄 알았는데… 그렇게 온 몸이 빨개지면 어떡하냐.
그렇게 생각하는 내 얼굴은 또 얼마나 빨개졌을지.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체를 가리며 후다닥 욕실로 직행했다. 다행히 안 들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