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화 〉준비(2) (16/218)



〈 16화 〉준비(2)


헨드릭이 욕실에 들어가고 난 후.

얼굴을 도저히 볼 자신이 없어 뻣뻣하게 굳은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카야가 한숨을 토해냈다.

‘어, 어쩌지.’

속옷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속살을 남에게 보여준  자체가 처음 있는 일.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카야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어려서부터 항상 더러운잡종, 천한 년 같은 모욕적인 언사를 귀에 박히도록 들어온 탓에 카야는 자존감이 박살이 나 있는 여자였다. 그나마 자애와 관용의 여신인 라엘라를 따르며 어느 정도 사람의 구실은 하게 되었지만, 어렸을 때 겪었던 모진 경험들이 카야라는 하프엘프의 근간에 깊이 뿌리를 내린 것이었다.

수도원에서 견습 과정을 받을 때에도 웬만하면 얼굴을 가리고 다녔고, 다른 견습 수녀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혹독한 육체 훈련 또는 기도에 몰두했었다.

그녀에겐 자신의 얼굴과 몸매, 그냥 자신 자체가 더럽고 천하지만 여신께서 자애를 베풀어주셔서 그분의 수녀로 있을 수 있다는, 그런 ‘개념’이 박혀있었다.

그렇기에예전 헨드릭에게서 ‘예쁘다’라는 말을 듣고 크게 당황한 건 전혀 연기가아니었고, 지금도 크게 당황했지만 애써 침착하게 대응한 것도 그녀 자신보다는 대장인 그를 위해서였다.

그에게 괜한 피해를 끼칠까봐.

더럽고 천한 자신의 몸 때문에 사이가 어색해지고, 이전과 같은 관계가 틀어질까봐.

그래서 ‘운명’이 갈라질까봐.

그건 참을 수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번째로 얻었던 행복이 라엘라의 수녀를 만난 것이었고,  번째로 얻었던 행복이 라엘라의 자애를 느낀 것이었다면.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지금, 헨드릭의 용사대에 합류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전투 수녀도 수년데.

마치, 남자를 유혹하는 천한 여자처럼 보였다면 어쩌지? 물론, 더럽고 천한 몸이니 대장은 거들떠도  봤겠지만….

평상복을 입고 걸레에 물을 살짝 묻혀 갑옷 앞에 주저앉을 때까지도 그녀의 생각은 끊이지가 않았다.

‘대장이 실망했다면 어쩌지.’

똑같이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내게 먼저 쉬라고 배려까지 해주었는데. 대장이라면서 추가로 일까지 하고 들어왔는데, 그런 천박한 꼴을 보이다니….

시간이 흘러 닦기 힘들 정도로 굳어진 핏자국을 박박 문지르다가, 카야의 눈가가 조금씩 젖어들었다. 수 년 간의 고된 육체 단련 시간에도 근육통에 눈가를 찡그렸을지언정 눈물을 보인적은 한 번도 없었던 그녀의 눈꺼풀이 평소보다 배는 빠르게 깜빡였다.

타이밍 절묘하게 헨드릭이 여관에 귀환했을 뿐인, 그런 해프닝에 불과했지만… 카야의 머릿속에선 한  부정적으로 뻗어나간 시나리오가 끝을 모르고 확장됐다.

어느새 뇌내 시나리오는 버림받은 그녀가 헨드릭의 발밑에 양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장면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달칵-

시나리오의 끝을 알린 건 다름 아닌 욕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고, 카야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눈앞을 보니 걸레는 붉게 물들긴 했는데 자신의 갑옷은 한쪽 부분만 깨끗해진상태였다. 무의식적으로 같은 곳만 계속 문지른 탓이었다.

‘최, 최대한 자연스럽게.’

아까처럼 침착하게 대하면, 어쩌면 아까 일은 없던 일이  수 있을 것이다. 카야는 그리 생각했다.

“대, 장…?”

“아. 크흠. 욕실이 좁아서 옷까지는 어떻게 놓을 곳이 없더라고.”

속옷 차림의 헨드릭을 보자마자, 그녀의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버리기 전까지는.

**


“그, 상관없긴 한데 기왕이면 잠깐만 고개를 돌려주면 안 될까?”

“아, 아! 예! 죄송합니다!”

뜨뜻-한 물에 샤워하고 나오니 빤히 쳐다보는 카야의 시선과 마주쳤다. 빌어먹을 욕실. 속옷까진 어떻게 물이 안 닿게 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옷은 그게 힘들었다.

설마. 애초에 여관이라서, 옷을 욕실에서 입고 나올 것을 상정하지 않은 인테리어였나?

‘씨발 뭐라는 거냐 나는.’

그딴 의도로 인테리어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모태솔로의 지나친 폭주였다.

어쨌든 다른 사람이  몸을, 그것도 옷을 입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건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었고 내가 그걸 지적하자 카야의 목이 마치 기름칠 안 된 기계마냥 뻣뻣하게 돌아갔다.

하기야. 그녀는 수녀였고 수도원밖으로 나온 지 얼마 안 됐음을 생각하면, 그녀도 이쪽 방면엔 순수하다고 보는  맞겠지.

‘레즈가 아닌 이상에야.크흠.’

씨-발 음란마귀야 사라져라.

애초에 카야가 날 그렇고 그렇게 생각할 리도 없었지만, 만일  혼자 착각해서 실수했다가 그녀가 용사대를 탈퇴한다면?

‘릴랙스하자고. 그저, 알몸도 아니고 서로 속옷차림을 몇 초 정도 본 게 다잖아?’

속옷차림이라니, 씨발 전혀 릴랙스가 안 되잖아!

가뜩이나 샤워하는 내내 속옷차림의 카야가 떠올라서 뒤지는  알았다고! 그것도 이쪽으로 내밀어진 엉덩이와 쭉 빠진 다리가… 쓰읍, 좀 과장해서 딸치는 거 참는게 정예 괴물이랑 전투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릴랙스하기엔 나한테 너무 심한 자극이었다.

그래서 난 특단의 조치로 튜토리얼 종료시 떠올랐던 메시지 로그를 끌어올렸다.

실패시 죽음.

그제서야 날뛰던 심장과 신축성 뛰어난 어떤 막대기가 진정이 되었다.

그래. 이게 맞지.

두큰두큰 불끈불끈, 이럴 여유가 어디 있어? 레벨 업 하기도 빠듯한데 말이야.

가벼운 셔츠와 바지를 걸쳤을 뿐인데 놀라울정도로 안정감을 되찾은 나는, 그제서야 카야의 옷차림과 손에 들린 걸레를 발견했다.

그리고, 불과 수 초 전 다짐한 게 무색할 정도로 다시 한 번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카, 카야!  자꾸 내 가슴에 불을 지르는 거냐고! 겨우겨우 진화시켰는데….’

왜 하필 실내에서 ‘진심’ 수녀복을 입고 있는 건데!?

제작자 새끼야, 저런 복장을 수녀가 입고 돌아다니는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물론! 눈은 즐겁지만!

뭐? 개좆같은 세상에서 눈요기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삐져나온 카야의 옆다리와 상당히 대놓고 드러나는 상체의 곡선에 아찔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강력한 자극의 차단을 위한 일차원적인 반응. 별다른 의도는 없었고 내 무의식이 벌인 행동이었다.

근데….

“죄송, 합니다.”

“…어?”

왜 카야가 나한테 무릎을 꿇고 있는 거지? 어째서? 눈이득  건 난데, 되도 않는 야한 상상을 한 건 난데 왜…?

눈앞의 아찔한 시각적 자극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맞물렸다.

“카, 카야. 왜 그래?”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니, 그니까 뭘?’

평상시였다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카야를 상대로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분석하고 대응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상했다. 주사위를 굴려서 6만 나오는 것처럼, 이상한 우연이 겹쳤다.

나도 당황한 상황, 카야도 아마 당황한 상황.

한 번 급발진  차가브레이크도 없이 막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잘 하겠습니다. 더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그러니 절, 저를….”

“카야. 실망이라니.  소릴 하는 거야 아까부터.”

응? 실망?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실망이라는 단어가 브레이크를 걸었다.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 모습이었다.

덥썩-

혼란스러운 와중에 카야는 내 다리를 부여잡았다.

“저를, 저와 쭉 함께 해주십시오. 대장이 운명, 운명 공동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체 뭔 소릴 하는 거냐고 씨게 묻고 싶었지만,  다릴 잡고 날 올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 진심으로 절박해보였다.

실망이라는 단어에  번 브레이크가 걸리고, 그녀의 절박한 표정에 다시 한 번 브레이크가 걸리니 그제서야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는 뒤로 물러나려던 몸을 멈추고는 양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그러자 그녀가 오묘한 소릴 내뱉었다.

“아….”

“카야. 네가 갑자기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진정  하자.”

“대장….”

“어디 안 가니까. 어디  없어지니까. 어?”

마구 흔들리던 그녀의 눈동자가 점차 진정되는  보였다. 대체… 뭐지.

일단 확실한 건, 몇 번 느꼈던 대로 카야의 멘탈은 생각보다 약하다는 것. 이전엔 정예 괴물에게 강력한 멘탈 공격을 받았다는 합당한 근거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뭐 그런 것도 없는데 이러는 건 문제가 있었다. 혹시나 그녀의 프로필을 훑었으나 부정적 특성이 새로 박힌 건 없었다. 관계도도 이상 없었고.

그녀가 진정된 듯 하자 일으켜 세웠다. 그녀에 대한 흥분이 가라앉자 다시금 피곤함이 솟구쳤고, 그대로 침대에 다이빙했다. 카야가 조심스럽게 옆에 눕는 느껴졌다.

“카야.”

“…예, 대장.”

“너는 왜 던전행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 말해줄 수 있어?”

“예?”

내 질문이 예상과는 달랐던 탓일까. 카야의 목소리가 살짝 삑사리가 났다. 나는 모른 척 했다.

“저번엔 네가 물어봤었잖아. 그래서 나도 알고 싶어졌어. 왜 너처럼 신실한 수녀가, 굳이 이곳까지 와서 던전행을 목표로 하는 바람에 개고생을 하는지.”

“그건….”

일부러 재촉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카야가 보이는 이상한 태도는, 인던에서 겪었던 멘탈 공격 때문일 수도 있었고 나는 이 상황을 해소함과 동시에 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방금의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제가 이곳, 세일럼에 온 이유는.”

슬슬 매트릭스와 이불의 푹신함에 눈이 감길 무렵, 카야의 목소리가 내 정신을 깨웠다.

“여신님께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계시?”

“예.”

이런 게 갑자기 분위기 계시라는 건가.

내가 다른 의미로 당황해 침묵하자 카야는 괜히 우리 말고 아무도 없는 방을 휘휘 둘러보더니 아까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계시라고 해봐야 길고 거창한 걸 들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신님께서 제게 직접 말씀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여신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 딸 카야, 세일럼으로 가려무나. 그곳에서  방황은 끝을 맺고, 진정한 운명을 깨달을 수 있을 거란다.

“세일럼은 던전의 도시. 저는 그걸 던전행을 하라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제가 관용의 길을 걷고 있었다면 모를까, 전 자애의 길을 걷고 있던 전투 수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가 말한 운명이라는 게….”

“예. 전 제 운명을 세일럼, 정확히는 던전행에 있다고 생각했고 용사지원소에 이름을 등록했습니다. 아무리 여신님의 계시라 해도, 아무리 던전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혼자서 던전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첫 뽑기에 등장하는 용사들의 설정이 이렇게 엮이나? 세일럼에 용사짓하러 오는 이들  사연 없는 놈들이 어딨겠냐만….

“하지만 저를 용사대로 받아들여주는 용사는 꽤 오랜시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 실력이 일천한 것도 있고, 던전에 대한 경험도 전무했으며, 또 잡종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

“초조해질 무렵, 헨드릭님이 나타났습니다.”

카야의 목소리에 갑작스런 활기가 묻어났다. 아니, 열기라고 해야 하나. 가까이서 속삭인 탓에, 그녀의 입김이 내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기분 탓일까. 입김이 한  뜨거워진 것 같았다.

“헨드릭님은 그런  받아들여주었습니다.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프엘프인 제게 어떤 그릇된 시선도 없었습니다. 던전 안에서 추태를 부렸는데도, 그때만 따끔하게 혼내시고 사적인 모욕이 없었습니다. 저와 같은 경험 없는 용사임에도 불구하고, 듬직했습니다. 신뢰가 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가다간 여신님의 계시가 가리키는 내 운명은 언제,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대장은 무얼 위해 던전행을 나서는지.

“그리고 그때. 저는, 여신님께 들었던 제 진짜 운명을 찾았습니다.”

어느새 카야의 얼굴이 바짝 달라붙는 수준까지 가까워졌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내려다보았다.

“대장. 헨드릭, 당신이 긍정한 최초의 운명이라 말한 것이 던전행이기에,  또한 던전행을 나서는 것입니다. 당신이 제 운명이니까.”

꿀꺽-

정말 이렇게 진지한 상황에서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게 말도 안 되고 어처구니없었지만… 그리 속삭이는 카야의 목소리가, 너무나 섹시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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