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이단과 금단 사이(7)
셰이가 회복됐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 용사대에 드리워진 안개가 걷어진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가 언제 그렇게 죽을 것 같이 앓았냐는 듯, 평소처럼 헤프게 웃으며 카야에게 달라붙은 상태였다. 몸 상태가 상태다보니 힘은 빠져있었지만.
문제는 셰이가 침대를 차지하다보니 안 그래도 피곤이 누적되어 있는 나와 카야가 편히 쉴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돈이 넉넉했다면 더 넓은 방으로 옮겼겠지만, 이미 낸 돈이 아까운 상황이란 말이지….’
어쩔 수 없었다. 카야와 자신만 있었다면 그녀가 부끄러워할지언정 둘이서 함께 침대에 자면 오케이였지만, 안정을 취해야 하는 환자가 있었다. 푹신한 침대를 포기하고, 나는 필수품이 들어있는 짐을 뒤적거려 소형 텐트를 꺼내 설치하기 시작했다. 잠깐이지만 훈련소에서 진흙탕에 A형 텐트 친다고 개고생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씨발.
그만큼 이 텐트도 수면을 위한 최소한의 기능만 가능한 텐트였으니까. 여관방 업그레이드도 돈 때문에 포기한 1렙따리 용사가 비싸고 좋은 텐트를 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무튼 내가 그러고 있으니 카야는 내 의도를 바로 알아챈 모양이라 별 말 없었으나,침대에 누워있던 셰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내게 물었다.
“뭐하세요?”
“셰이 네가 어느 정도 괜찮아졌으니 나랑 카야도 이제 자야하지 않겠어?”
“헤.”
뭐야 그 바보 같은 반응은.
피식 웃으며 뚝딱 설치를 마쳤다. 크기는 기억 속 A형 텐트보다 조금컸지만, 설치하는 건 훨씬 더 쉬웠다. 그 안에 옷가지와 배낭으로 된 임시 베개 두 개를 넣고 카야에게 손짓하자 그녀가 잠시 주춤하다가 내게 다가왔다.
“미안.”
“미안해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잠깐만요! 지, 진짜 거기서 자는 거예요?”
“자야지. 지금도 당장 드러눕고 싶은데.”
“아니!”
“뭐가 아닌진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해.”
“지금 저 때문에 대장님이랑 언니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뭐 노숙하는 것도 아니고, 호들갑 떨 일도 아니었다.
“네가 빨리 회복해서 털고 일어나는 게 더 도움되는 거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다시 푹 쉬기나 해. 우린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맞습니다.”
“그래도….”
“잔다. 잘 자라.”
“아앗! 대장님! 언니!”
이미 들어간 카야가 제자리에 눕는 걸 확인하곤, 나도 좁은 입구에 몸을 들이밀었다.
‘역시 좁긴 좁아.’
협소한 공간 때문에 거의 딱 달라붙어있는 나랑 카야. 카야의 숨소리는 조용했지만, 왠지 잠들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카야를 보듯, 그녀도 날 의식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으로 입구를 가렸을 뿐, 방음은 전혀 안 될 걸 알기에 들릴 듯 말듯 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카야.”
“…예. 대장.”
역시, 바로반응이 왔다.
“바닥, 딱딱하지 않아?”
“견딜만 합니다. 수습기간 때도 흙바닥에서 잔 적도 꽤 있었습니다.”
“난 너무 딱딱한데. 등 배길 거 같아.”
대답은 없었지만 카야가 어쩔 줄 몰라하는 게 뻔히 보였다. 사경도 해치고 돌아온 남자가 설마하니 이런불평을 내뱉을 줄은 몰랐던 모양.
표정변화에 저도 모르게 큭큭 웃은 나는 팔을 뻗어 카야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녀가 목을 움츠렸다. 몸이 빳빳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대, 대장. 셰이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그래서라니. 아, 아무리 대장과 제가 그, 그런 사이라 하더라도.”
“그런 사이가 뭔데?”
아 재밌다. 스트레스 풀리네.
겉으로 보기엔 차갑고 딱딱하고 냉철할 것 같은 미녀가, 실제로는 순진하고 여린 면이 있다는 것에서 오는 갭.
자존감이 지하를 뚫고 내핵까지 처박혀있던 자가 관심과 정을 알아버렸을 때, 아닌 척 하면서도 그것을 좋아하는 모습.
카야는 놀리는 맛이 있으면서도, 챙겨주고 싶게 만들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얼굴이 다시 토마토처럼 붉어져있겠지.
“그, 그, 그. 대장과, 제가, 감히. 하, 하, 하.”
“나랑, 네가. 그래서?”
“하, 하, 하나가 된, 그, 그런 사이… 말입니다!”
“쉬이- 셰이가 있다고 말한 거 너잖아. 조용히 해야지.”
“하읍!”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손바닥으로 입을 가볍게 막았다. 입술이 꾹 다물려있는 게 느껴졌다.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간 걸 보니, 첫 경험 때만큼 굳어있었다.
저런. 가뜩이나 피곤할 텐데.
나는 다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자연스럽게 그녀의목 뒤로 팔을 넣어 팔베개를 해주었다. 그리고 살짝 끌어안았다.
- 흐읍!
카야가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고, 이내 체념인지 각오인지 모르겠으나 눈을 감고는 슬며시 얼굴을 내게 가까이하는 게 보였다.
‘하하. 나만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 다행이긴 하네.’
기분 좋았지만, 공개플레이 같은 걸 할 수는 없었다.
- 가능!
‘씨발 뭔 가능이야. 나도 섬세하다고! 이제 겨우 한 번밖에 안 했는데 무슨 가능이야.’
카야와의 그 날 때 깨어난 음습한 자아새끼가 잠시 날 충동질 했으나, 빠르게 가라앉혔다. 셰이가 없었다고 가정해도, 존나 힘들어서 불가능했을….
“…대장.”
“아니야.”
내게 안기면서 자연스럽게 교차된 그녀의 다리에, 내 자지새끼가 닿아버린 것.
나는 당황하지 않은 척,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바닥이 딱딱하고 차니, 몸이라도 부드럽고 따뜻한 걸 덮고 있으면. 서로가 좋지 않겠어?”
“….”
잠시 날 멍하니 올려다보던 카야는 내 품에 조금 더 파고드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상당히 부끄러워하네.
그녀의 부드러운 몸과 따뜻한 체온과 은은한 체향, 그리고 주기적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심장박동에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날 빤히 내려다보고 있던 카야와 눈이마주쳐서 식겁한 걸 빼고는, 밤은 무사히 지나갔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피로도 풀렸고 체력도 어느 정도 회복했다. 그건 셰이도 마찬가지였고.
나랑 카야는 고민하다가 제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내가 침대 밑에 두었던 2번째 제단을 꺼내자 생글거리던 셰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언제나 봐도, 참으로 표정 변화가 급격한 여자였다.
“그건….”
“우리가 싸웠던 이단이 지키던 제단인 것 같아.”
“제단이요.”
“어. 그리고 이건 두 번째야.”
나는 첫 번째 인던행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처럼 강한 괴물을 만나서 전투한 것과, 이것과 유사하게 생긴 제단을 박살냈다는 것까지.
“네가 유스티티아 교단에서 얼마나 자세한 걸 듣고 우리에게 협력하러 왔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앞으로 네가 할 일은 눈에 보여. 임시 동료에 불과했던 넌 네가 보고 겪었던 것들을 보고하기 위해 유스티티아 교단에 돌아갈 것이고, 유스티티아 교단과 라엘라교단은 우리가 갔던 곳을 더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하겠지.”
셰이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걸까. 말을 계속했다.
“솔직히, 난 교단과 이단 이런 거에 전혀 관심 없거든. 이 의뢰도 보상이 좋아서 한 것뿐이고, 셰이 너와 임시로 같이 싸우게된 것도 어쩌다 보니 그런 흐름이 된 것뿐이야. 그래서, 난 일정부분은 숨기기로 했었어.”
믿을 수 없으니까.
확실히 내 용사대에 합류한 카야와는 별개로, 인던행이 끝나면 언제든 교단에 돌아갈 ‘외부인’인 셰이에겐 우리의 처지와 상황을 전부 다 공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그녀를 간절하게 노리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하지만 난 과감히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독단은 아니었다. 카야와 새벽에 조용히 상의한 결과였다. 그녀 또한 셰이에게 고마움, 그리고 든든함을 느끼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이왕 함께할 동료라면 셰이도 좋다고 간접적으로 말한 그녀였다.
나 또한 원했고, 카야 또한 원했으니.
진심을 걸 타이밍이었다.
“넌, 우릴 지켜줬어. 그리고 죽을 뻔했지. 네가 앞에서 든든하게 버텨줬기 때문에 우린 끝내 그 괴물을 격살할 수 있었고, 무사히 빠져나왔어. 근데 그 이후에 깨어난 넌, 우리에게 어떠한 자랑도,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지. 마치 그게 당연한 일이라는 듯, 그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는 듯. 그냥 아무 언급도 하지 않고, 평소처럼 웃어보였어.”
입이 근질근질했을 텐데.
온몸이 아프고, 궁금한 건 많고 답답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얌전히 쉬라는 내 말에 따라주었다. 의뢰가 끝났으니 이젠 ‘대장님’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난 그런 널 원해. 카야도 그런 널 원해. 우리 용사대, 공포에 맞서는 용사HAT는 그런 널 원해. 그러니, 너도 우리가 누군지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 숨기기로 했던 걸 알려줄 생각이야.”
“부담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저희 나름대로 감사 표현의 고백이니.”
쭉 듣고있던 카야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셰이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언니. 듣는 사람 입장에서 부담스럽지 않은 고백이 어디 있어요. 그것도 생판 남도 아니고,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겼던 동료들의 고백이라는데. 이렇게 진지한 분위기까지 잔뜩 잡아놓고, 어떻게 부담을 안 가져요?”
“그, 그건.”
너무나도맞는 말이라 카야는 손쉽게 격침됐다. 그러나 셰이는 배시시 웃으며 입을 뻐끔거리는 카야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중갑을 입고 있었을 땐 몰랐는데, 생각보다 셰이도 만만치 않은… 크흠.
“그래도 들을래요. 부담스럽겠지만, 들을래요. 죽을 위기에 처한 저를 그곳에 버리지 않고 끝내 세일럼에 귀환한 것만으로도, 대장님과 언니 또한 제게 은인이거든요. 은인이 고백할 게 있다는데, 들어야죠!”
“셰이님….”
“부담 주는 게 미안하면, 님자는 빼요 언니. 동생한테 님자 붙이며 존대하는 언니가 어디 있어요?”
“그.”
“어서요.”
“…이.”
“안 들리는데요?”
“…셰이.”
“네, 카야 언니. 후후후.”
어안이 벙벙해졌다. 모습이 분명 보기는 좋은데, 마치 셰이가 카야를 조교하는 듯한….
“그래서요, 대장님? 제게 숨기고 있다는 게 뭔데요?”
여전히 카야의 머리를 끌어안고 있는 셰이의 금빛 눈동자와 마주치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졌다. 둘이 친해지면 좋은 거 아니겠나.
나는 그녀에게 숨기려고 했던 의뢰주 아저씨에 대한 것을 전부 밝혔다.
‘셰이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의뢰주 아저씨에게 받을 보상을 완전히 포기해야 할 수도 있지. 하지만.’
[관계도]
카야 : 4
셰이 : 1
관계도가 올랐다는 건, 그만큼 긍정적으로 가까워졌다는 뜻. 언제 어떤 것 때문에 나와 그녀의 관계가 올라갔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내가 지금 숨기고 있는 걸 셰이에게 말하는 이 행위 자체가 최소한 손해는 안 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손해?
실력 있지만 뭔가 켕기는 게 있을 것 같은 길드 소속 대장장이에게 받을 수 있는보수 무언가.
이득?
든든한 국밥같은 탱커로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는 포텐셜을 가진 ‘천재’ 특성 보유자의 용사대 영입 가능성 증가.
저 둘을 천칭에 매단다?
이득 쪽이 아득하게 무거워서, 천칭축이 박살날 정도로 비교가 안 되는 비교였다.
“대장님.”
“어.”
셰이는 내 말을 듣고 한동안 생각에 잠기다가, 고개를 퍼뜩 들더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앞에서 대놓고 가슴에 파묻혀있던 무언가를 꺼내더니 척-하고 내게 내밀었다.
“이건…?”
뭐지 싶어 받았는데 태양에 매달려있는 천칭 모양의 은색 장신구였다.
‘방금 전까지 셰이 가슴 속에 있어서 그런가, 뜨뜻미지근한 게 묘하게….’
그 와중에 이상한 생각이 들던 찰나, 옆에 있던 카야가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장신구를 보더니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카야? 왜 그래?”
“대장님.”
“어?”
셰이는 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장신구가 내 손 안에 감춰졌다.
“어디 가서, 잃어버리시면 안 돼요?”
“갑자기 그게 무슨.”
셰이가 벽에 기대어놓은 자신의 클레이모어와 중갑을 한 차례 쳐다본 뒤, 방문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잠시 맡겨주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