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이단과 금단 사이(8)
- 난 그런 널 원해.
“하으.”
- 난 그런 널 원해.
“정말.”
- 난 그런 널 원해.
“짜릿해요.”
- 난 그런 널 원해.
“그렇게 진지하게, 진심을 담아서 말해버리면.”
- 난 그런 널 원해.
“누구라도 넘어가지 않을까요? 이미 카야 언니도 그렇게 넘어갔으려나? 완전히 푹 빠져있던 것 같은데.”
- 난 그런 널 원해.
“하으.”
유스티티아 교단의 성전사 셰이는, 밖을 나갈 때면 9할 이상은 유스티티아 교단을 상징하는 문양이 들어간 중갑을 입거나, 가끔씩은 수녀복을 입었다. 하지만 어떤 한 여관에서 나온 그녀는 중갑도, 수녀복도 아닌 원피스 차림이었다.
원피스는 멀리서 보면 수수해보였지만, 가까이서보면 수수하다기보단 옷을 입는 사람의 단아함과 기품을 받쳐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옷이 날개가 아니라, 옷이 신발이 되어주는 느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지나가던 사람들은 길든 짧든 그녀에게 시선이 쏠렸다.하지만 그 중 누구도 함부로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꼭, 고위 귀족 같은 이질감이 그녀에게 느껴졌으니까.
“흥흐흥~ 흥흐흥~ 흥 흥 흐응~”
사람들이 자길 쳐다보든지 말든지, 그녀는 콧노래를흥얼거리며 한 수도원으로 향했다.
한 손엔 횃불, 다른 한 손엔 천칭을 들고 있는 여신상이 자리잡고 있는 유스티티아교단 세일럼 지부.
그 입구에서 문지기를 맡고 있는 수습 성전사들이 셰이를 보곤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셰이님! 그, 그모습은 어찌 된 일입니까?”
“아~ 신경 쓸 거 없어요. 그나저나, 전사장님은 안에 계세요?”
“전사장님께선 아마 자리를 비우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수고하세요?”
“예! 셰이님도 고생하십시오!”
셰이가 싱긋 웃자 수습 성전사들은 얼굴을 붉히며 힘차게 답했다.
유스티티아 교단에서 정의의 길을 걷고 있는 남자 성전사들에게, 아름답고 착하고 사교성 있고 유능하기까지 한 셰이는 아이돌같은 존재.
아닌 척 하면서 자신을 열렬하게 바라보고 있는 두 성전사들의 시선이 사라지자 셰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저렇게 티날 정도로 날 좋아한다는 사람들도, 나랑 같이 임무나 던전을 두 번 연속 가겠다는 사람은 없었어요. 날 꺼림칙하게, 생긴 것만 예쁜 괴물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피했죠.’
그녀는 성전사들을 이끄는 수장인 전사장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대장님이랑 언니는, 아닌 것 같아요.’
- 난 그런 널 원해.
전사장의 사무실에 방문을 두드리는 순간까지, 셰이의 머릿속에는 헨드릭의 한마디가 계속 반복되었다.
똑똑-
“셰이에요. 안에 계신 거 다 알고 있으니, 들어갈게요?”
셰이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는 빈 방을 보고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잠시 둘러보더니 고개를 들어올렸다.
“전사장님. 징그러워요.”
“뭐가 말이냐.”
“적어도 옷은 입고 수련하시면 안 돼요?”
“대답도 안 했는데 네 멋대로 들어온 건 네 쪽이 아니냐.”
꽤 높은 천장에 거미처럼 매달려있던 중년의 남성이 가볍게 착지했다. 그는 딸랑속옷 하나만 입고 있었고, 그대로 셰이의 맞은편에 앉으려다가 그녀의 눈빛을 보고는 대충 로브 같은 걸 걸쳤다.
“더 징그러운데….”
“입으라고 할 땐 언제고. 어쨌든 할 말이 있어서 온 것 아니냐. 그것도 나한테 직접 말하고 싶을 정도로 중요한 말이. 빨리 말하기나 해라.”
그래, 말해 뭐하겠어.
셰이는 애써 징그러울 정도로 수북한 털을 시야에서 배제했다.
“저, 용사대에 들어갈까 해요.”
“또?”
“네.”
“불쌍한 영혼들이 또 생기겠어.”
“제가 잘못을 저지르고 다니는 것처럼 얘기하시네요.”
“어떤 면에서는 그러지 않겠냐. 뭐, 셰이 네가 용사대에 들어갔다가 용사대가 박살이 난 것도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는데. 굳이 그걸 보고하기 위해 내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죠, 전사장님.”
“이단에 대한 보고는 수녀장에게 가서 말해라. 이번 일은 그쪽이 주관하기로 했으니까.”
“그것도 말고요.”
셰이는 책상을 짚으며 일어났다.
“용사대에 들어가겠다는 말. 진심이에요.”
“……진심이라.”
팔짱을 끼고 반쯤은심드렁하게 대꾸하던 전사장의 태도가 변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를 마주봤다.
유스티티엘 교단 세일럼 지부의 가장 강한 심판자는, 사람과 잘 어울리지 않지만 누구보다도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다. 지금처럼 눈을 제대로마주보는 것만으로, 사람의 진심이나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그눈으로, 눈앞의 세일럼 지부 역대 최강의 재능을 가진 천재 성전사가 정말로 자신의 길을 확고히 했다는 것을 보고 말았다.
그 진심을 보고 나니 수많은 훈련, 수많은 실습, 수많은 기도와 교리 수업, 수많은 용사대 지원 등 그녀가 수도원 안팎에서 겪었던 일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내놓은 천재. 동시에 자신의 첫 번째 제자이자 수제자.
‘유스티티아시여.’
전사장은 수제자에 대한 감정을 추스렸다.
“이번 협력행에 대한 보고는?”
“나가면 곧바로 수녀장님께 보고하려구요.”
“그러냐.”
“네.”
전사장은 잠시간 셰이를 보다가, 구석에 처박혀 있던 어떤 물건을 그녀에게 툭 던졌다.
“가져가.”
“…전사장님.”
“난 더 이상 안 쓰는 거고, 제자가 평생 처음으로 진심을 가졌는데 기념품 하나 주지 못해서야 면이 안 서지. 네가 쓰던지 다른 사람한테 주던지 팔아먹던지 내다버리던지는 알아서 해라.”
“…감사해요. 스승님.”
“오냐.”
전사장은 눈을 감았다.
“멀리 안 나간다.”
“나중에 또 올게요?”
“만면에 빛과 공정한 정의를. 항상 조심해라.”
“…만면에 빛과 공정한 정의를. 스승님도요.”
**
“하, 하하, 하하하.”
“좋으십니까?”
“넌 안 좋아?”
“…저도 좋습니다.”
셰이의 갑작스런 행동, 그 이유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확실히 알아낸 듯한 카야에게 물어보니 내 기대가 담긴 짐작이 맞았다.
셰이가 우리 용사대에 합류하고 싶다는 것.
물론 단순히 그것뿐이었으면 카야가 그렇게 멍청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셰이가 내게 ‘잠시 맡긴다고’ 건네주었던 교단의 상징이 걸린 목걸이.
수녀든 성전사든 사제든, 교단에 정식으로 소속이 되면 교단을 상징하는 장신구를 몸에 걸치고 다니는 공통된 규율이 있었는데 그걸 타인에게 맡긴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과 더불어 신앙심까지 두고 간다는 의미였다.
돌아오지 않는다면 목걸이를 회수할 수 없을 것이고, 셰이는 대외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단 중 하나를 잃게 된다. 결과는 그렇게 치명적이지 않지만, 천 년 넘게 내려오며 유지되는 전통이라는 게 그랬다. 그리고 그렇게 무거운 의미가 있는 만큼, 자신의 장신구를 건네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그런 모습을 남이 보는 건 더더욱 없었다.
요컨대 카야는 셰이의 과격한 표현에 놀랐었다는 얘기.
“아. 그래서 의뢰주 아저씨가 카야, 네 목걸이를 담보로 하겠다고 했을 때 그렇게 놀랐던 거였나?”
“…모르셨습니까?”
“난 또 카야의 진심이 통한 줄 알았지.”
“제 진심이기도 했습니다.”
“아하.”
카야는 담보로 하겠다고 약속만 했지 의뢰주 아저씨에게 맡기진 않았었는데, 셰이는 아예 맡긴 것도 모자라 장비까지 싹 두고 갔으니.
뭐 어찌됐든 경사 난 게 아닌가. 의뢰주 아저씨한테는 단물만 쏙 빼먹은 거 같아서 좀 미안하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아저씨도 날 이용해서 뭘 하려고 계획한 게 있을 테니 1렙짜리한테 그만한 보수를 준 게 아닐까 싶었다.
먹을 건 먹고, 잘 빠져나왔다. 나머지는 교단이 알아서 할 테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진행 상황은.”
“9할.”
“그런데.”
“교단이 들이닥칠 예정이니까. 그것도 빛과 자애가.”
“어째서 들킨 것이지?”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그쪽이 준 게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빨리 새어나갈 리는 없으니까.”
“불가능한 일이다. 수준이 1짜리 용사 둘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내가 따지고 싶다는 것이다! 어중이떠중이들 걸러내는 것도, 의식을 흐트러트린 것도 다 제대로 됐는데 왜 그 허접한 놈들이 암시에 걸리지 않았냐는 거다! 그쪽이 준 약, 그쪽이 설치해준 마법진 모두 사용했는데!”
“진정해라.”
“그쪽이 먼저 추궁하지 않았어도 화딱지가 나지도 않았겠지. 계약 내용을 잊은 건 아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아주 조급하고 화가 나는 상황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테니까.”
“계약을 잊을 리가 있나. 원인을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야 대응을 하던 회피를 하던 다음 계획을 세울 테니.”
좁고 어둡고 으스스해서 마치 폐가에 가깝게 생긴 집 안쪽에서 비밀스런 만남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세일럼을 등진 상황이니, 원활한 변장과 도망을 위해 그 덥수룩한 수염을 깎는 것을 제안하지.”
“이봐. 언제부터 우리가 서로의 개인적인 것에 관심을 두었다고 그런 망발을 지껄이는 거지? 그런 시답잖은 말로 시간 끌지 않는 게 좋을 텐데. ‘계약’했으니 말이야.”
“물론. ---- --님께서 항상 지켜보시니, 그걸 어길 생각은 없다.”
수염이 풍성하게 자란 남자의 맞은편에 앉은, 아무런 특징이 없는 검은색 가면을 쓴 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둘 사이 허공에서 한 줌의 검은 연기가 불타오르더니, 잠시 후 연기보다도 더 까맣고 요사스럽기까지한 빛을 내뿜는 구슬이 나타났다.
손가락을 튕긴 남자가 재차 튕기자 구슬이 수염 남자에게 날아가더니, 잠시 이리저리 휘돌다가 오른손에 휙 깃들었다.
“크읍-!”
수염 남자는 왼손으로 검은 연기에 휩싸인 오른쪽 손목을 부여잡고 이를 악물었다. 고통과 환희가 뒤섞인 묘한 신음을 내뱉었다. 평범한 남자가 들었다면기겁하며 귀를 막을정도의 소리였지만, 적어도 이 폐가엔 그런 호들갑을 떨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약 10분 정도가 지나고 검은 연기가 모조리 사라진 후. 수염 남자는 전신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가면 남자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듯, 여전히 무미건조한 어조로말했다.
“계약의 조건은 지켰다. 엄밀히 따지면 가불해준 셈이지. 이쪽에도 책임 사유가 있다는 걸 인정해서 특별히 그리 한 것이니, 그쪽도 조만간 계약에 합당한 대가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하하하하! 당연하지! 당연하고말고!”
“다음에 만날 땐, 조금 더 건설적으로 만났으면 하는군. 다음 장소와 때는 이쪽에서 나중에 알려주지.”
수염 남자는 가면 남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오른손만을 바라본 채 폐가를 나서고 있었다.
그런 수염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가면남자의 가면 안쪽에선, 뒤틀린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