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2화 〉1구역(2트)(5) (32/218)



〈 32화 〉1구역(2트)(5)

“대장….”

“후우… 미안. 진짜, 면목이 없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정말로.”

카야의 입술에서 피가 나는 순간, 그리고 그 피가 섞인 침을 먹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내가 악몽에 시달리는 사이 날 돌보기 위해선지중갑을 벗은 카야의 상의가 반쯤 벗겨져 있었고, 그녀의 어깨와  곳곳이 울긋불긋했다.

그녀의 얼굴도 눈물자국이 말라붙어있었지만,내 얼굴은 그보다 더 심하겠지.

어찌됐든 정신을  차리고 카야를 아프게 한 것이 미안했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그녀를 살포시 껴안아 쓰다듬어주었다.

“저기… 대장님?”

“아.”

“하, 하하. 크흠.”

그렇네.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니었지 참.

셰이도 중갑을 벗은 상태였다. 그녀 또한 눈가가 좀 부어있었다. 던전 안에서 갑옷을 벗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그걸 지적할 입장은  되었다.

“저도 갑자기 밀려드는 악몽 때문에 굉장히 기분이 우울하고 슬프고 화도 나고 그랬는데… 대장님이랑 언니가그렇게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걸 보니까 괜찮아진 거 있죠?”

“미안. 배려를 못 했네.”

“아니에요. 정말로 괜찮았어요. 대장님은 몰라도 카야 언니도 저렇게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모습이….”

“셰이.”

“뭐 어때요. 헤헤.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보기 좋았어요.”

셰이는 카야의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보며 헤프게 웃었다. 나랑 카야의 행각을 그렇게 봐줬다면 다행인 일이지만… 그래도 지킬 건 지키고 해야 할  해야 했다.

나는 카야를 품에서 놓아준 뒤 셰이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다가가서 그런지 그녀는 흠칫거렸다. 그래도 도망가지는 않았다.

“대, 대장님?”

“미안.”

“에이, 괜찮다니까요. 정말로!”

“아니, 너도 악몽에 시달린 건 똑같았을 텐데. 배려하지 못했고, 챙기지 못했어.”

“….”

“무슨 악몽을 꿨는지 묻진 않을게.”

카야도 마찬가지고, 셰이도 마찬가지다. 남의 트라우마는 함부로 캐거나 건드리는 게 아니었다. 이번에 내가 유달리 심하게 겪은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료들이 겪었던 악몽이 내가 겪었던 악몽보다 약하다고 단정지을  없었다.

“제일 늦게 정신 차리고 제일 꼴사나운 모습을 보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잘 버텨줬어.”

“…대장님.”

“고생했어.”

나는 수고의 의미로 셰이의 어깨를 토닥여주려 했다. 알게 된 지 얼마   동료에게도 충분히 할 수 있을 법한 수준의 가벼운 스킨십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은 순간.

짜악-

“아.”

“대, 대장님. 이, 이건.”

쏜살같이 튀어나온 셰이의 손이 내 손을 탁 쳐낸 것이다. 다치거나 아프진 않았지만, 조금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멘탈리티가 많이 까이기도 했고, 사소한 것에서감정이 쌓일  있었다.

“아, 아아. 아니에요. 이건.”

“미안. 불쾌했을 수도 있는데, 또 내 생각만 했어.”

“아니,그게 아니라….”

무심코 카야에게 하듯 해버렸다. 반성했다. 셰이는 카야가 아닌데. 카야랑 성격도 다르고, 관계도도 다른데.

[용사들의 마음속에 공포가 스며듭니다.]
[셰이 멘탈리티 –4]
[카야 멘탈리티 –3]
[유진 멘탈리티 –3]

이런 젠장.

악몽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린 후유증이 생각보다 큰  같았다. 여기도 괴물만 안 나왔다 뿐이지 던전 안이었다는 것을 망각한 것.

“카야, 셰이. 둘 다 무장해. 아직 안 끝났어.”

“아아. 예. 대장.”

“…네.”

둘은 금방 갑옷을 착용했다. 둘의 표정이 예상한 것과는반대였는데, 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자책할 줄 알았던 카야는 얼굴이 붉어진 것 빼고는 덤덤했고 오히려 셰이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이야기를 듣고 멘탈 케어를 해주고 싶었지만, 이곳은 휴식처가 아니었다.

“카야. 어느 정도 지났는지 대충 알아?”

“적어도 제가 깨어났던 시간과 대장이 깨어났던 시간은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5분 정도….”

“그렇구만.”

실제 시간은 그렇게까지 흐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말은, 가만히 있을 때 멘탈리티가 까이는 속도가 그만큼 빠르다는 뜻일 거고.

“셰이.”

“녜엣?”

“부탁해.”

“아….”

“걱정 마.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린 이겨낼 수 있어.”

[공포의 상자 결과]

나랑 카야가 아무 말 없이 바라보자 셰이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상자에 손을 댔고.

[공포에뒤따르는 절망]

“…아.”

“아아아아아아악!”

“끄흐으으읍!”

[모든 용사가 최대 체력의 30%만큼피해를 입습니다.]
[셰이 남은 체력 11/17]
[카야 남은 체력 10/14]
[유진 남은 체력 9/15]

메시지가 뜸과 동시에, 전신에 엄청난 격통이 찾아왔다.

…우린 한동안 멘탈리티가 까이는 걸 신경 쓰지도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쳐야만 했다.


**

뚜벅- 뚜벅-

던전은 기본적으로 어둡고조용했다. 으스스함은 기본 옵션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답답함과 초조함이 더해졌다. 그런 현상은 멘탈리티가 까일수록 더욱 가속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름값 제대로  ‘공포의 상자방’을 통과한 우리는, 몸과 마음 양쪽이 너덜너덜해진 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1-2를 날로 먹은 것에 대한 반동인가.’

실시간으로 밸런스 패치를 하는 것 같았다. 이게 옳게  최고난도 플레이라고 조정하는 것 같았다. 1렙짜리 셋이 모여 1-2에 나타난 정예 괴물을 그렇게 쉽게 잡는 게 말이 되냐는 듯, 1-3에서 싸움 한  없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멘탈리티]
셰이 : -48
카야 : -45
유진 : -44

좋지 않았다. 원래 더 롱 테러에서 용사대의 운명이  순간에 엎치락뒷치락 한다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다. 1-2를 나서고 쌩쌩했던 컨디션이, 걸레짝이 되어돌아왔다.

  좋은 요소는, 멘탈리티가 골고루 까여있다는 점이었다. 누구 하나 멘탈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줄줄이 소시지처럼 연쇄적으로 멘탈 터져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테니까.

우리 사이에 도는 침묵은 공기를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차가운 공기는 피부에 머물렀지만,  싸늘한 감각은 피부를 거쳐너덜너덜해진 마음속에 침투했다. 속옷만 입고 시베리아 벌판에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갈림길은 없었다. 그래서 말을 꺼낼 명분도 없었다. 쭉 나아갔다. 중간에 함정이 발동됐지만 운 좋게 피할 수 있었다. 소소하게 멘탈리티가 회복됐지만, 그런 우릴 놀리듯 곧바로 멘탈리티가 하락했다.

답답했다. 분명 이동 중 잡담을 금한 건 나였다. 하지만 이 이전의 침묵과 지금의 침묵은 느낌이 달랐다. 그냥 분위기 자체가 침울했다. 좋지 않았다. 지금, 멘탈리티 붕괴 악순환의 초기 지점에 서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일단 카야부터 살펴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겉으로 보기엔  문제는 없어보였다.

‘셰이.’

그렇다면 문제는 셰이였다.

카야의 트라우마를 건드렸던 트리거가 ‘그녀의 몸을 보고 뒤로 흠칫한 것.’이었다면, 아마도 셰이의 트라우마를 건드린 건 그녀의 어깨를 건드렸던 것일 확률이 높았다.

던전행 이전과 아까를 비교하면, 딱 한 가지였다.

갑옷 위로 어깨를 두드린 것과, 맨 어깨를 두드린 것.

정말 사소한 행동 하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나 싶어 자책하고 원망하다가 갑자기 울컥했다.

‘이거 너무하는  아니냐고 씨발.’

차라리 부정적 특징이나 관계도 항목에 이런 걸 나타나게 해달라는 건 너무  욕심인가? 아무리 사연 없는 용사가 없다지만, 이건 뭐 살짝 건드렸는데시한폭탄을 개봉해버린 느낌이지 않은가. 그나마 카야는 던전 밖에 있을 때 어떠한 외부 위협 없이 해결했지만, 셰이는… 세이는 어떡한단 말인가.

[어둠이 용사들의 마음을 뒤덮습니다.]
[셰이 멘탈리티 –4]
[카야 멘탈리티 –5]
[유진 멘탈리티 –3]

‘이런.’

멘탈리티 하락 메시지 때문에, 밝기가 상당히 어두워진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밝기가 어두운 채로 던전에 있으면 멘탈리티 하락 속도가 증가하기 때문에 반드시 밝은 상태를 유지해야 했는데, 이건 진짜 초보도  할 실수였다.

치이익-

뒤늦게 기름을 채워 밝기를 올렸지만 이미 까인 멘탈리티는 돌아오지 않았다.

‘엉망진창이다.’

밝기가 오르며 셰이의 모습이 살짝 보였지만 자세한 표정은   없었다. 하지만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 말뿐만 아니라 특유의 활발함까지 없어진 상태였다.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면 모를까, 있다가 없으니까 그만큼 더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는 것일까.

셰이의 바뀐 분위기는 생각보다 용사대에 끼치는 영향이 컸다.

‘차라리 전투가 벌어졌으면 좋겠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답답했다. 막, 목에 가래가 잔뜩 낀 거 같고. 소리를 악 지르고 싶고. 하지만 이럴 때는 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좆같았다. 분명히 좋은 일인데, 나쁘지 않은데 좆같았다. 아무도 잘못한 게 없었지만, 상황은 그냥  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분명 이성은 ‘던전’의 공기 때문이라고, 정신 차리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감성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누굴 탓하고 싶어졌다.

분명 잘못 흘러가고 있으니,누군가 잘못했으니까 이렇게 된 게 아니겠는가. 그러다보니 1-3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래.

난 분명히 좋은 걸 뽑았는데.

내 뒤에 연속으로 멘탈리티 –30, 체력 –30%를 뽑았단 말이지.

멘탈이 갈린 것도 모자라, 그 상태에서 육체적 고통까지 가해지니아주 걸레짝이 되었어.

뭐? 순전히 운으로 좌지우지되는 거에서, 단순히 운이 나빠서 그렇게 된 거라고?

그래서 어쩌라고 씨발, 결과가 시궁창인데. 운이 안 좋았다고 이게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잘 했어야지.

노력했어야지.

상자를 그렇게 거부하니까, 상자도 꼴받아서  먹인  아닐까? 어? 어떻게 생각해. 아니라고?

씨발! 괜찮냐니! 괜찮을 리가 없잖아! 누구 때문에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걸, 애써 묻어두었던 걸 떠올렸는데!

나도 좆같은데, 남의 좆같은 것도 떠안아야 돼? 내가 유치원 선생님이야? 정신과 의사야? 카운슬러야? 나도좆같고, 너도 좆같은데, 왜 난 두 배로 좆같아야 하는데. 어?

누군 그렇게 무게 잡을 줄 몰라서 그래? 누군 좋아서 입 다물고 있는 줄 알아?왜 씨발 용사대 분위기를 씹창으로 만드냐고. 어?

씨발진짜지랄염병떨고있어좆같게씨발년들이…!

턱-

갈 곳 잃은, 애초에 원인 불명인 연쇄적 분노가 끊긴 건 한순간이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니, 코앞에 굳게 닫혀있는 문이 있었다. 정황상 1-4의 문인 것 같았다.

“카야. 셰이.”

“….”

“카야?”

“…예, 대장.”

한 박자 늦은 대답과 침묵이 거슬렸다. 이렇게 커다란 문이 있는데, 바로 앞까지 다가갈 때까지 눈치 채지 못했는지. 왜 동료들은 내게 어떠한 언질도 하지 않았는지 신경 쓰이는  있었으나… 머리도, 가슴도 답답해 터질 것 같았다.

씨발, 도끼로 뭐라도 빠개고 싶다.

한유진이었으면 기겁할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휴식처에 입장했습니다.]
[휴식처에선 던전의 영향을 매우 적게 받습니다.]
[휴식처에서는 섭식과 휴식의 효율이 증가합니다.]

“하….”

모닥불을 피울 수 있을만한 공간, 상대적으로 덜 음습한 공간.

그토록 바라던 공간이었지만, 당장이라도 도끼를 휘둘러 뼈를 박살내고 뇌수를 흩뿌려….

도끼로 뇌수를….

뇌수를….

내가 지금,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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