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1구역(2트)(6)
휴식처.
더 롱 테러에선 장작 위에 불 모양의 아이콘으로 표시되는 이 공간은 사실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휴식처를 제외한 던전의 모든 곳은 가만히있어도 지속적으로 깎이는 멘탈리티 때문에 휴식도 불허. 전투중이 아니면 체력이나 멘탈리티 회복도 불가. 식량을 까먹어서 조금씩 회복할 수야 있지만, 배고플 때 먹지 않는 이상 식량 낭비였으니 적금 털어서 당장의 카드를 돌려막는 셈이었다. 재수 없으면 연속 8번까지 괴물과 싸운 적있던입장에서, 휴식처가 어떻게 이렇게 안 나올 수가 있냐며 욕을 퍼부었던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거지같은 던전에 존재한 예외적 공간인 휴식처에서 휴식을 취할 땐 멘탈리티가 까이지 않았다. 심지어 체력과 멘탈리티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휴식처가 많으면 좋은 거 아니냐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할 수도 있겠지만, 더 롱 테러를 조금만 플레이 해보면 그런 생각도 쏙 들어가게 된다.
왜?
휴식처에 많이 들르면 그만큼 덜 싸웠다는 뜻이고, 그럼 얻는 게 별로 없으니까.
수많은 더 롱 테러 게이머들은 경험, 그리고 데이터를 통해 한 구역에서 몇 번 쉬는 게 가장 적절한가에 대한 계산을 끝마쳤다.
2번. 플러스마이너스 1번.
휴식처의 개수가 0번으로 갈수록 용사대는 괴멸의 공포에 빠질 것이고,9번에 가까워질수록 적자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로 수없이 검증된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1-4에 등장한 휴식처는,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지금 아주 시기적절한 등장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
“….”
따뜻한 모닥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싸늘했다.
- 무슨 일, 아니 혹시 내가 무슨 말 했어? 무슨 이상한 말 한 거야? 대답해줘. 솔직하게.
- …욕을 하셨습니다. 대장이.
- 내가? 뭐라고?
- 그….
- 씨발진짜지랄염병떨고있어좆같게씨발년들이. 라고요.
휴식처에 들어서고 불까지 피운 다음, 안전한 곳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도 안 하는데다가 날 피하기까지 하는 둘을 보며 참다못해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리고 카야와 셰이의 대답을 듣고 나자, 분위기는 더 이상 끝을 모르고 쳐박혔고….
셰이의 프로필을 처음 볼 때 그녀의 발작을 걱정했었는데,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생각만 한 줄 알았던 게,육성으로 튀어나오는 건 만화나 소설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건만. 내 자신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멘탈리티]
셰이 : -61
카야 : -59
유진 : -60
이 늪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휴식 중 멘탈리티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정감이 찾아왔지만, 문제는 그것만으론 해결되지 않았다.
급속도로 경직된 용사대의 분위기를 어떻게든 해동하고 기름칠을 해야 했다.
“카야. 셰이.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듣기만 해도 된다는 말이야.”
둘 다 대답은 없었으나 내 말을 씹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선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네. 아니, 미안. 너희들에게 던전에서 흘러나오는 공포에 먹히지 마라, 의식하지 마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제일 먼저 먹힐 뻔했어.”
타닥- 타다닥-
불똥이 튀는 소리가 가까스로 침묵을 메웠다. 하기야, 내 욕이 아니더라도 각자 멘탈리티 수치 보면 그녀들도 정신상태가 많이 힘든 거겠지. 겨우겨우 참고 있는데 내가 급발진해서 갑분싸 만든 거고.
“대충 얼버무리거나, 하얀 거짓말을 할까 방금 전까지도 치열하게 고민했어.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는 거에 비해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
당장은 하얀 거짓말로 넘기는 게 더 좋을 수 있었다. 욕의 대상이 ‘던전’이었다든가, ‘이 상황 그 자체’였다든가, 악몽의 대상이 ‘여자들’이었다든가. 그런 식으로 부정적 감정이 향하는 더미를 만드는 건 쉬웠다. 하지만 여긴 던전 안이었다. 나중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 크흐. 병신년들. 그걸 믿었어? 이 도움 안 되는 씨발년들아! 그거, 네년들이라고 네년들!
…나중에 홰까닥 미쳐버린 내가 저렇게 말해버릴 가능성이 충분히 그려졌으니까.
그리고 미리 이런 선례를 만들어놔야, 그녀들도 솔직히 털어놓지 않을까 싶었다.
어쨌든 솔직하게 내 머릿속에 있던 것들을 모조리 털어낸 후.
카야와 셰이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충격이라도 먹은 걸까. 표정을 당최 읽을 수가 없었다. 상당히 씁쓸했다.
‘좋은 관계를 잘 구축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관계도]
카야 : 4
셰이 : 1
셰이와의 관계도가 떨어져있었다. 카야와의 관계도가안 떨어진 건 의아했지만,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셰이가 무척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말을 걸긴 좀 그랬다. 물어봤자 딱히 대답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방구석 아싸 출신에겐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이런 거에 족보나 공략이 있을 리도 없고… 잠이나 자자.’
더 롱 테러에선 섭식 버튼을누르면 체력이, 휴식 버튼을 누르면 알아서 용사들의 멘탈리티가 일정량 회복됐지만, 여기선 그런 거없었다. 모든 걸 스스로 해야 했다.
‘한숨 자고 나면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있겠지. 차라리 그 때 이야기 하는 게 낫겠어.’
나는 미리 설치한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잘 자라는 인사는 끝내 들리지 않았다.
**
“…언니.”
“예.”
헨드릭이 자신의 텐트로 들어간 뒤.
여전히 모닥불을 쬐고 있던 셰이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언니는… 아무렇지 않았어요?”
“뭐가 말입니까?”
“악몽 꿨을 때랑… 대장이 확 변했을 때. 말이에요.”
“무서웠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렇게 침착할 수 있어요?”
“그건 셰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저는!”
버럭 소리를 높이던 셰이는 헨드릭이 들어간 텐트 쪽을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며 다시 목소리를 죽였다.
“저는,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결국은 침착하게 있지 않습니까.”
“이건, 그냥. 유예. 네. 유예가 된 것 뿐이에요. 카야 언니가 침착하게 있어주니까, 내가 뭐 어떻게 되기 전에 대장님이 저렇게 변했으니까. 응. 잠깐 때가 미뤄진 거예요. 해소된 게 아니라.”
“괜찮을 겁니다.”
“어째서요?”
“결국 대장님이 정신을 차리셨으니.”
셰이는 순간 어처구니없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보다 먼저 이 용사대에 합류했다던 하프엘프는, 자신보다 훨씬 어릴 게 뻔한 남자에게 맹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봤자 자신과 며칠 차이 나지도 않을 텐데, 도대체 왜? 저 남자에게 뭐가 있어서?
“이해가 안 돼요. 난, 나는… 솔직히 악몽도 악몽이었지만, 대장님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어요.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내가죽을죄를 진 것 같았고, 당장이라도 그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다 속죄의 의미로 자살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단 말이에요.”
“자살이라니, 그런 단어는 입에 담지 마십시오. 셰이.”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제가 느꼈던 감정이 그 정도였다는! 그런데 언니는 어째서….”
“대장은 제 은인이니까. 그리고 제 운명이니까. 그래서 믿고 있으니까. 결국은 원래대로 돌아왔으니까. 그래서 괜찮습니다.”
셰이는 말문이 막혔다. 평소 말수가 적고 느린 편인 카야의 확신이 들어있는 즉답은, 그만큼 파급력이 컸다. 카야가 일부러 거짓말 하는 위인이 아니겠지만, 그걸 둘째 치더라도 그녀가 내뱉은 짧은 문장 하나하나가 불변의 진실을 내포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조금은 침착해질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조금이었지만.
“대장은 용사대를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대장의 계획을 따르는 우리는 잘 모르는 것일 테지요. 우리 둘이 겪는 고난이 1이라고 한다면, 대장은 1.5에서 2를 겪고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대장의 행동이 어떻게든 이해가 되기도 하고 또 제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안타깝기도 합니다.”
“….”
“게다가 우리는 아직 그수준이 일천하긴 하지만 각기 여신님을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오랜 시간 위대한 존재를 이정표 삼아 흔들리지 않은 길을 걸어온 우리들에 비해, 대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공포에 조금 더 잘 흔들리고, 조금 더 잘 물들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제가, 셰이가 대장을 잘 받쳐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카야는 배낭에서 압축 장작을 꺼내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조금씩 사그라들던 모닥불이 다시 살아났다.
“언니는… 강하네요.”
카야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얼굴엔 쓴웃음이 걸려있었다.
“맨 처음 던전에들어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았지만… 그때 저는 두 번째 방에서 정신이 붕괴될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에.”
“라엘라님껜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대장님이 제 빛이었습니다. 대장님의 뒤만 따랐습니다.”
자신이 모시는 여신을 두고 다른 이, 그것도 한낱 필멸자를 ‘빛’이라 표현한 카야. 셰이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그러다보니 죽을 줄 알았던 곳에서 생환했고, 제 운명을 알게 됐으며, 진정한 나 자신을 아끼고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셰이도 만나게 되었고.”
“언닌, 도대체.”
“저는 즐겁습니다. 대장의 뜻을 따르고 그 뒤를 따라 걷는 것이. 진정한 저를 찾고, 진정한 운명을 함께 하고, 진정한 동료를 맞이하며, 진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 그 길엔 온갖 시련이 우릴 방해하겠지만. 저는 대장이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완주할 것을 믿습니다. 설령 제 자신이 불안하더라도, 저를 믿어주는 대장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섭고 두렵고 힘들더라도… 괜찮습니다.”
“…부럽네요.”
“저야말로, 셰이가 부럽습니다.”
“네?”
“만능. 셰이를 한단어로 표현하자면, 만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외모도, 능력도, 성격도, 신실함도. 어느 하나 빠질 것이 없는… 남자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여자인 것 같아서 부럽습니다.”
“에이. 제가 무슨 만능이에요. 언니가 더 대단하죠. 벌써부터 신을 따르고 자신을 사랑하며 운명을 찾았잖아요. 그리고 이미대장하고 깊은 사이인 것 같은데… 아니에요?”
“저는….”
카야는 말을 흐렸다. 얼굴이 상당히 붉어져있었지만, 화제 때문인지 꽤나 오랜 시간모닥불에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는 구별이 안 갔다.
“가장 부러운 건, 다름 아니라 셰이의 종족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네? 제가 인간인 게 왜 부러워요? 딱히 제가 인간이라서 좋다거나 싫다는 건 아니지만, 어지간하면 오래 살지도 못하고 젊은 모습도 오래 못 가는 종족인데.”
“알다시 저는 하프엘프입니다, 셰이.”
“그렇죠? 근데 그게 왜요?”
“하프엘프는, 선천적불임입니다.”
“…녜에?”
갑작스레 종족의 결점을 드러낸 카야의 말에 셰이는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냈다.
“대장의 처음과 제 처음이 우연히 겹쳐지긴 했지만, 이 이상 깊어지는 건 저만의 욕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는, 곁에 오래 있으면 불화의 씨앗이 되는 것을 수도 없이 많이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저, 저기요? 언니?”
“게다가 대장이나 저나, 지금도 그렇지만 언제 어디서 목숨이 다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저 같은 결함 있는 여자에게 얽매이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결함 있는 여자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셰이.”
“언니!”
셰이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화제 덕분일까. 조금 전까지 셰이를 감싸던 부정적인 분위기가 상당히 사라져있었다.
셰이는 알까. 카야가 화제를 교묘하게 틀었다는 걸.
셰이와 대조적으로 시종일관 차분한 카야는 셰이의 양손을 마주잡으며 말했다.
“대장은 상자가 있던 방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셰이를 쭉 신경 쓰고 있었습니다. 셰이가 대장을 신경 쓰고 있듯이. 그러니, 셰이.”
카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밤이 지나면, 지금의 감정은 상당히 흩어질 겁니다. 그러기 전에, 대장과 일대일로 깊은 대화를 나눠보십시오. 서로간의 감정을 교류하고, 오해가 있으면 해소하십시오.”
그러면, 한 층 더 대장을 신뢰하게 될 테니까.
카야는 마지막 말을 속으로 삼키며, 셰이를 헨드릭의 텐트로 인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