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1구역(2트)(7)
- 솔직하게. 그것만 명심하면 됩니다.
‘언니도 참, 완고한 면이 있네요.’
셰이를 헨드릭의 텐트 앞에 인도한 카야는 헨드릭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짧게 전해주고는 자신의 텐트로 들어갔다. 비록 카야가 강제하지는 않았지만….
‘그 표정을 보고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여전히 혼란스럽고 두려웠다. 악몽도 악몽이었지만, 순간 자신을 쏘아보던 헨드릭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카야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헨드릭에게 은혜를 입고, 헨드릭 덕분에 인생이 통째로 바뀌었다는 그녀의 말을 믿기로 했다.
“크흠, 큼!”
부스럭-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헛기침을 하자 안쪽에서 인기척이 났다.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잠에 들지 않은 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 …셰이?
“네, 대장님.”
- 할 말 있어?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할 말이 있어서요.”
셰이는 침묵이 싫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렇고, 과거부터 쭉 그랬다. 침묵은 대부분 나쁜 일의 전조였다. 그랬기에 그녀는 침묵을 피하거나, 직접 깨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카야의 호의를 내팽개치긴 싫었고 헨드릭과 이야기해봐야 한다는 것도 내심 동의했다.
- 들어와.
다행히 침묵은 금세 깨졌고, 셰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헨드릭의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
몸은 당장이라도 잠을 처자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지만, 정작 바닥에 몸을 눕히자 눈이 감기지 않았다. 밤새서 더 롱 테러를 했던 때보다 눈이 더 뻑뻑했지만, 군대에서 완전군장으로 행군을 했을 때보다도 몸이 더 피로했지만 잠이 안 오는 것이었다.
좆같게도.
눈을 감으면, 악몽이 반복됐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공포스러웠던 열쇠로 문이 따이던 장면, 이유도 모르고 존나게 쳐맞는 장면,울고불고 씨알도 안 먹힐 용서를 구하는 장면, 탈출하려다 뒤를 돌아봤을 때 소름 돋았던 장면….
1-3에서 겪었던 악몽이 파편화되어 중구난방으로 반복재생됐다. 그러다보니 눈을 감기가 싫었고, 그만큼 눈은 더 뻑뻑해졌다.
씨-발
셰이의 목소리가 들린 건 성수라도 마셔볼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때였다. 조금 전 분위기도 그랬고 지금 상태에서 독대하는 게 좀 그렇긴 했지만, 그녀와 뭐라도 이야기를 하다보면 좀 낫겠지 싶어서 결국은 그녀를 들여보냈다.
“텐트가 좁아서 아까처럼 넓게 떨어져있진 못할 거야.”
“괜찮아요.”
누워서 이야기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앉아서 그녀를 맞이했다. 하지만 텐트의 높이는 굉장히 낮았다. 허리랑 목을 쭉 펴면 정 가운데에 앉지 않는 이상 머리가 텐트에 닿았다.
‘가뜩이나 힘들어 뒤질 거 같은데 이런 불편한 자세로 얘기한다고?’
에라 모르겠다.
나는다시 몸을 뉘었다. 그리고는 옆을 톡톡 두들겼다.
“공간이 공간이다보니 편하게 얘기하자.”
“어, 어어….”
“피곤하잖아.”
힐끔 쳐다보니 셰이는 평상복 차림이었다. 유일무이한 휴식처에서도 중갑을 입고 있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당연했다. 하지만 스킨십을 꺼리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 입장에선 좁은 공간에 나와 단 둘이 ‘평상복’ 차림으로 있는 것 자체가 굉장한 부담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텐트에 들어오겠다는 말을 한 게 이상하잖아.’
한숨을 쉬고 싶었지만 참았다. 거부감이 클 텐데도 굳이 내 텐트 안에 들어올 정도라면, 존나 중요한 이야기겠거니 생각했다. 나는 추가적인 말 대신 몸을 최대한 구석으로 옮겨 공간을 확보했다. 이 텐트는 A형 텐트보다 살짝 넓은 것 같으니 이 정도 간격이면 피부가 맞닿을 리는 없으리라.
내 무언의 액션을 셰이도 해석한 것인지, 머뭇대다가 정자세로 누웠다. 잘못하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굉장히 뻣뻣한 자세였다. 참고로 그녀의 몸도 반대쪽 구석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 몸도 덩달아 빳빳해지는 기분이었다. 즉, 전혀 편하지 않았다.
“할 말이라는 게 뭐야?”
“그, 대장님.”
“듣고 있어.”
“말하고 싶은 게 있고,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일단은 말하고 싶은 것 먼저 말할게요. 대장님.”
“어.”
“상자가 있던 방에서 대장님의 손을 뿌리쳤던 건, 죄송해요. 고의가 아니었어요.”
“그거야 내가 미안한.”
“아뇨! 아니에요! 그렇게 넘어가면 되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에요!”
“셰이?”
“아아… 미안해요.”
좁아터진 텐트의 양극단으로 떨어진 우리 거리만큼이나, 셰이와 나 사이의 대화도 무언가 맞물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녀가 내 손을 뿌리친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유감도 없었다.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했던 건 전혀 형식적인 게 아니었다.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면, 극도로 조심하는 게 맞았다.
실제로 나도, 빌어먹게도 악몽 때문에 가라앉아있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른 거지만, 꽤 오랜 시간 스킨십은커녕 가벼운 악수나 터치조차도 자지러질 뻔하지 않았나. 대인기피증은 기본 베이스였고.
내가 신경 쓰이고 빡쳤던 건, 나도 모르게 그녀의 트라우마를 건드렸다는 것과 그것 때문에 용사대의 분위기가 씹창났다는 것이지 그녀가 잘못한 건 딱히 없었다.
하지만 셰이의 생각은 또 달랐던 것 같다.
“혹시, 조금 이따가 이 안을 좀 밝혀줄 수 있어요?”
“갑자기?”
“그냥… 응. 대장님이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으니까, 저도 조금은 털어놓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아니, 굳이 무리할 필요 없어. 내 눈치 본다고 그러는 거는….”
사락-
셰이의 대답 대신,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왜, 옷을 입거나 벗을 때 나는 소리가 들리는 거지?
혼란에 빠졌다.
갑자기 옷을 입을 린 없잖아. 그렇다면, 답은 하나….
셰이가 지금 내 텐트 안에서, 옷을 벗고 있다는 얘기잖아!
“셰이. 너 지금.”
“됐다… 다 됐어요. 이제 밝혀주세요.”
“셰이.”
“어서요… 지금 제 결심이 사라지기 전에요.”
쥐어짜내는 듯한 셰이의 목소리를 못 이긴 나는 랜턴에 가까운 마법횃불을 꺼내들었다. 기름을 살짝 넣고 점등하자 눈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던 텐트에 불그스름한 빛이 퍼졌다. 그러자 내 눈앞에 나타난 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셰이의 뒷모습이었다. 매끄러운 곡선과 과하지 않으면서도 탄탄해보이는 등근육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 이게 무슨… 대체. 무슨 일을 겪어왔던 거야 이 여자는!’
그녀의 등엔 굵은 뱀이 지나간 흔적마냥 등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 깊게 찢어진 걸 봉합한 듯한 흉터. 심한 화상을 당해고 불완전하게 회복된 흉터. 살이 뭉텅이로 파였다가 회복한 듯한 흉터. 그밖에도 원인을 쉽게 짐작할 수 없는 흉터들까지….
흉터. 흉터. 흉터, 흉터.
맨살을 찾는 게 힘들 정도로, 그녀의 등은 흉터 천지였다.
“어때요? 많이 흉하죠?”
“너, 너….”
“차마 앞까지 보여주긴 좀 그래요. 그나마 등보단 덜하지만.”
입이 달싹거렸다. 그녀에게 뭐라 말해야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슬픔? 동정? 위로?
내가 아무리 병신이라도, 지금 상황에서 저런 것들이 오답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등엔, 몸서리칠 정도의 ‘악의’가담겨있었다. 내가 과거에 겪었던 것들은 사실 새 발의 피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렇다보니 웬만하면 맨살을 드러내고싶지 않았어요. 바로 피부에 닿는 평상복이나 수녀복도요. 잠잘 때랑 씻을 때만 빼고는 항상 갑옷을 입었어요. 지금은 뭐, 쉴 수 있을 때 편히 쉬어야하니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지만요.”
아주 소량의 기름을 넣은 탓에, 불은 금방 어두워졌다. 셰이의 등에 있는 흉터도 점점 어둠에 가려졌지만… 이미 망막 뒤에 새겨진 그녀의 등은 더욱 더 생생한 기억으로 내 뇌에 문신처럼 새겨졌다.
“그러니까 그때 대장님의 손을 쳐낸 건 꽤나 오래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는 뜻이에요. 절대 대장님이 싫다거나, 대장님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이해했어.”
“다행이에요.”
다시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옷을 입는 소리겠지. 저 흉터를 보니, 그녀의 악몽을 유추할 수 있었다.
저건 전투의 흔적이라고 볼 수 없었다. 분명, 집요한 고문 또는 실험…같은 것의 흔적이겠지.
나는 그녀가 자신의 몸까지 보여주면서 하려는 질문이 뭔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대장님.”
“어.”
“저는 이단을 증오해요.”
“그래.”
“이단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
“그리고 여긴 이단, 그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이고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소굴이고요.”
공포라는 정신 나간 걸 숭배하는 집단이 자리잡고 있으니, 얼추 맞는말이었다.
“그래서, 일말의 여지없이 싹 죽여버리고 싶어요. 정보? 필요 없어요. 회개의 가능성? 고려할 가치도 없는 일이에요.”
셰이의 목소리엔 열기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놈들은 세상의 오물이에요. 그것도 자발적으로 그 오물을 뒤집어 쓴 오물이라구요.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 되지도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리고 해를 끼쳐요. 해충이나 해수는 다른짐승의 먹잇감이라는 최후의 역할이라도 있지만, 그놈들은 그 어떤 역할도 맡지 않아요.”
“그렇지.”
“대장님. 저는, 던전의 완전한 멸망을 원해요.”
완전한 멸망.
더 롱 테러식으로 표현하면 컴플리트 클리어.
그 단어에 포함되어 있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엄청 무거웠다. 그녀가 겪었을 삶과 등에 진 흉터들을 생각하면, 훨씬 더 무거웠다.
일찍이 격렬하게, 그리고 오래 타버려 숯덩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뜨거운 열기를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이단에 대한 증오.
그것이야말로 항상 헤프게 웃음을 머금던 셰이라는 아름다운 성전사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악마같은 흉터를 몸에 지닌 천사같은 외모의 성전사가 품은 꺼지지 않을 증오.
“저는, 이런 저를, 대장님이 계속 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그걸 묻고 싶었어요.”
그걸 네가 이번 한 번이 아닌, 던전을 멸망시킬 때까지 쭉 감당할 수 있겠느냐.
흉터 많은 아름다운 성전사가 그렇게 고하고 있었다.
“셰이.”
“네, 대장님.”
“바로 대답하지 않고 역질문 던져서 미안한데,넌 왜 나에게 네 장신구를 맡겼던 거야? 고작 한 번 같이 싸웠을 뿐인데.”
“진심이, 느껴졌으니까요. 이 용사대는, 대장님은 진짜로 던전을 돌파하려고 하는구나. 이런 진심이요.”
진심.
참 오묘한 힘을 가진 단어다.
웬만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단어였다.
“솔직히 대답하자면, 난 네 재능에만 주목했어. 처음 봤을 때부터 욕심났거든. 너 같은 뛰어난 탱커가 우리 앞을 지켜주면 좋겠다는, 그래서 꼭 영입을 성공해야 하는 욕심나는 인재 정도로만 생각했었어.”
“그랬나요.”
“하지만 싸우고 나서, 특히 네가 죽을 뻔 하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어. 네가 말했던 진심. 나도 그걸 느꼈지.”
이 성전사와 끝까지 가고 싶다.
게이머로서의 욕심과 기대감이 상당히 섞이긴 했지만, 그녀에 느꼈던 감정들.
장하다. 고맙다. 멋지다.
이것들이 거짓이라는 얘기는 아니었다.
“너를 계속 품고 갈 수 있겠느냐고? 나야말로 다시 묻겠어.”
다시 한 번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정식으로 제안했다.
“유스티티아 교단의 성전사 셰이. 너는 보잘 것 하나 없는 불신자인 나, 헨드릭을 따라 던전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향할 준비가 됐어?”
불이 완전히 꺼져 서로의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필요 없었다. 서로의 뜻을 주고받는 건, 목소리로 충분했다.
잠시간의 침묵 후, 셰이의 대답이 들렸다. 그 대답은 올곧았다.
“됐어요.”
“내 지시를 따르고, 동료를 아끼며, 적의 공격을 제일 먼저 막아낼 준비가 됐어?”
“됐어요.”
“너를 믿고, 나를 믿고, 동료를 믿으며 끝까지 나아가 마침내 나타날 가장 기나긴 공포에 맞설 준비가 됐어?”
“됐어요.”
학대 받고 자라난 방구석 아싸 게임 폐인이 빙의한 특출난 거 하나 없는 현상금 사냥꾼.
종족차별 속 온갖 폭언폭행으로 인해 자존감 박살난 자기혐오자 전투 수녀.
여기에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이단에 대한 증오가 제1감정이 되어버린 거짓된 웃음의 파괴지향적 성전사 하나가 포함되는 건, 그다지 놀라운 일도, 대단한 일도 아닌 것이다.
“죽음이 우릴 갈라놓기 전까지, 용사대의 목적은 변질되지 않을 거야. 내가 아는 두 여신님께 맹세할게. 따스한 자애와 냉철한 관용을. 그리고 그, 뭐였더라.”
“…만면에 빛과 공정한 정의를.”
깜깜했던 텐트 안, 셰이의 목 근처에서 작은 빛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