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2화 〉1구역(2트)(25) (52/218)



〈 52화 〉1구역(2트)(25)

‘아이고, 삭신이야….’

온몸이 쑤셨다. 눈은 뻑뻑했고 입안은 텁텁했고 어디선가 꾸리꾸리한 냄새가 났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가위라도 눌린 듯 온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으응….”

‘홀-리.’

때마침  원인 제공자의 목소리가 귀에 다이렉트로 꽂혔다.

‘우리, 이 자세로 잤던가?’

카야는 내 위에 엎드린 자세에서 내 목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불편한 건지 조금씩 몸을 뒤척였다. 웃긴 건, 잠을 자고 있으면서도 내 몸 위에서 안 내려온다는 것이었다.

‘곤란한데.’

무거워서가 아니었다.

이러다가 아침부터 잔뜩 흥분한 나머지 다시 그녀를 탐할  같았으니까.

“카야. 카야.”

“….”

“일어나야지.”

그녀는 여전히 색색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가슴 눌려서 아프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고 말았다.

와.  감기네.

“흐엣!?”

“푸흐흐흐.”

“…대장!”

몇 번을 들어도 저 놀라는 소리는 웃기단 말이지. 차마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낄낄 쳐웃자 화들짝 잠에서 깬 카야가 살짝 투정을 부렸다. 그러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선 후다닥 물러나 담요로 이불을 가렸다. 그래봐야 좁아터진 텐트라 거기서 거기였지만.

“나가있을 테니 정비하고 나와.”

“아… 그러지 않으셔도.”

“됐으니까.”

‘계속 여기 있으면 못 참을 거 같으니까 그렇지.’

상당히 찝찝하긴 했지만 일단 대충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모닥불 근처에서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면서 컨디션 체크를 했다.

[멘탈리티]
셰이 : -33(무기력)
카야 : 0(집착)
유진 : -30(불굴)

[체력]
셰이 13/17
카야 14/14
유진 17/17

“이건… 상상 이상인데.”

체력은 예상한 대로였지만, 멘탈리티는 예상 이상으로 회복량이 높았다. 단순히 던전의 공포를 신경 쓰지 않고 쉬는 것도 중요했지만, 당사자의 멘탈 그 자체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도 감안이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더롱 테러에서 정신이 망가진 용사는 확률적으로 휴식이나 섭식을 거부해 회복이 안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무리를 해서라도 카야랑 셰이  모두를 케어한 게 틀린 선택이 아니었던 건가.’

물론 셰이의 경우는 도중부터 내 욕망이 섞이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잘 되지 않았나. 이 정도 멘탈리티면 앞으로 걸어가다 뒤로 넘어져 코가 깨질 정도로 재수가 없지 않는 한, 멘탈 붕괴가 일어나 사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셰이 멘탈리티 회복이 덜 됐으면, 3열로 돌릴 생각도하고 있었는데.’

만약 그랬다면,3열에서 성전사의 집념으로 속도나 올리고 정의의 빛으로 힐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용사대의 전력은 뚝 떨어졌을 것이고, 그만큼 클리어가 지연되면 생존확률도 떨어졌을 테지. 확률적 턴 낭비는 둘째 치더라도 말이다.

“잘 됐어,  됐어.”

“흐아아암… 뭐가요? 대장님?”

“아.  잤어?”

“헤헤….”

머리를 긁적이며 텐트에서 나온 셰이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습관적으로 물었던 나도 내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카야 신음소리가.’

더 이상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아예  잔 것은 아닌지, 얼굴에 덕지덕지 달라붙어있던 피로나 무기력이 상당히 없어져있었다.

애초에 스스로 움직이고 말하는 시점에서, 어제 휴식하기 전과의 셰이와는 천지차이였다.

“대장님.”

“어?”

“카야 언니는… 잘 챙겨줬어요?”

“어, 뭐. 그렇지?”

“대장님은 여자 상대하는게 능숙한가봐요? 헤헤.”

“그럴 리가.”

다른 건 몰라도, 방금 셰이의 말에는 단언할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관계가 발전한 여자는 카야가  번째, 네가 두 번짼데.”

“…네에에?”

엄마라는 이름의 괴물은, 배제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내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어제부터 자꾸 거짓말이래. 진짠데. 또 맹세해볼까?”

“…아니에요.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어허. 감히 대장님을 의심하느냐.”

“푸핫. 뭐예요 그게.”

한동안 셰이와 말장난을 주고받다가 카야가 밖으로 나왔다.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굉장히 어색했다.

‘으음, 이미 난 관심에서 멀어진 거 같은데.’

쫄보 같았지만, 기회였다. 몸을 닦아야 한다는 좋은 명분도 있었다.

“나 몸  닦고 올게?”

“예, 대장.”
“네, 대장님.”

후다닥 텐트 안으로 들어가 입구에 귀를 기울였다.

**


“….”
“….”

카야와 셰이는 약속이라도 한 듯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뭐라고 말하는  좋지?’

셰이는 괜히 숯덩이들을 툭툭 건드렸다. 헨드릭과 있었던 일을 카야가 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헨드릭과 카야 사이에 있었던 일도 알고 있었으니, 더더욱 말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셰이.”

“네, 언니.”

“미안했습니다.”
“미안… 네?”

셰이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고는 고개를 홱 들었다. 카야와 눈이 마주쳤다.

“어, 어째서 언니가 사과를.”

“우선, 나나 셰이나 던전의 공포에 영향을 많이 받은 건 사실입니다. 그렇죠?”

“…맞아요. 부끄럽게도 그래요.”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뒤늦게 고백하는 거지만 셰이가 용사대에 정식적으로 합류하고 나서 내내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이요.”

“예. 성직자로서, 특히 자애의 뜻을 가슴 속에 품은 수녀로서는 추악하기 그지없는 감정이었습니다.”

질투, 시기, 그리고 독점욕.

“저만의 과욕이었습니다. 저는 아둔했고, 은혜를 모르는 짐승 같은 여자였습니다.”

“어….”

“셰이.”

“네?”

“전, 대장을 사….”

“사…?”

“사….”

주먹을 쥐었다 폈다 옷에 닦았다 산만하게 굴던 카야.

“저는, 이러면  되는 줄 알지만. 대장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고, 셰이에게 질투했습니다. 셰이의 용맹함과 활약과 재능을 시기했습니다. 셰이가 괴로워하는  알았는데도 불구하고 대장을 사적으로 독점하려 했습니다. 이게 내가 셰이에게 사과하는 이유입니다.”

“…사랑.”

카야는 아까보다 조금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반면 셰이는 좀 복잡해졌지만.

“스스로 억누르지 않고 인정하니, 마음이 좀 개는 기분입니다. 셰이는,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네? 뭐를요?”

“대장 말입니다.”

카야는 라이트 훅 다음 바로 레프트 어퍼컷을 날렸다. 하지만셰이는 이번엔 침묵하지 않았다.

“특이하면서도 중요한 대장님, 그리고… 대체 불가능한 남자라고 생각해요.”

“…대체 불가능한 남자.”

“네. 대체 불가능한 남자.”

카야와 셰이의 눈이 마주쳤다. 둘  물러서지 않았다.


**


모든 준비를 마친 우리 용사대는 1-9를 빠져나갔다. 통로는 언제나처럼 어두웠지만, 휴식처를 갓 빠져나와서인지 왠지 모르게 살짝 밝은 느낌이 들었다. 일단 셰이랑 카야도 상태가 나쁘지않은 것 같았고.

‘궁금하다. 존나 궁금하다.’

다만 두 동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생성된 것 같은 건, 순전히 내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이제 잡생각은 갖다 버리자. 1-10, 보스만 생각하자.’

말랑해진 기분을 미리 다잡았다. 앞서 걸어가는 동료들이 지금은 괜찮아 보이지만, 언제 또 어제처럼 망가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공포의 양날도끼]
- 적용 대상 : 광전사, 약탈자
최대 공격력 3 증가
- 방어력 1 감소
- 일정 확률로 공격이 적중한 괴물에게 상태이상 ‘혼란’ 부여

‘쩝. 판매용이네.’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공전을 잡고 얻은 아티팩트를 뒤늦게 확인했다. 초반에 최대 공격력을 3이나 올려줘서 광전사나 약탈자를 쓰는 조합이라면 중반까지는 무난하게 쓸만한 아티팩트였다.  기준에선 못 깨는 게  힘든 저난도에선 가끔 꼴받아서 4광전사나 4약탈자같은 개병신 같은 용사대로 플레이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 저 아티팩트가 떠서 아주 즐겜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4명이서 줘패다보면 한 마리 정돈 혼란에 걸리는 게 그렇게 꿀잼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거 없고, 귀환하면 바로 상점행이었다.

‘그래도 정예 괴물에서 튀어나온 아티팩트니까 가격은 좀 될 거고… 보스 클리어 보상이랑 구역 클리어 보상은 얼마나 올랐을까?’

난이도가 오르면 보상도 오르는 법.

벌써부터 김칫국을 들이키는 것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당한 기대는 희망과 용기를 끌어올리는 거 아니겠는가.

“대장.”

“…어?”

“돌아가면,  방으로 옮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저번에 저 혼자서 침대에 잤던 거 얼마나 눈치 봤는지 아세요?”

“어어?”

카야, 셰이. 너희들.

“그땐 여건이 안 되서 말 못 했던 거지만, 돌아가면 꼭 제가 만든 요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전 같이 옷 사러 갔으면 좋겠어요. 칙칙한 옷 말고, 멋있는 옷이요.”

“….”

“대장. 우리들을 걱정하고 있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끔찍한 장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미래가 펼쳐질 거라고… 노력해봤자, 발버둥쳐봤자 바뀌지 않는다고. 그런 속삭임도 들립니다. 어제보단 덜하긴 하지만.”

“저도요.”

“하지만.”

카야가 철퇴를 들어올렸다. 셰이도 따라서 클레이모어를 들어올렸다. 휴식처에서 정비한 덕분인지 둘의 무기는 깨끗했고, 예기를 발하고 있었다.

“한  굴복했을지라도.  번은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대장이라는 닻이.”

“대장이라는 등대가 있는 한.”

“중간에 길을 잘못 들었을지라도, 최종 목적지는 올바르게 도착할  있을 테니.”

저벅-
후우웅-!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둘의무기가 정면을 향했다.

…그곳엔 다른 곳보다도 훨씬 거대한 문, 훨씬 어둡고 소름 끼치는 기운이 풍기는 문이 있었다.

“꼭, 저 문 너머에 있는 괴물을 쓰러뜨리고, 대장에게 보답하고 싶습니다. 여러 가지로.”

“저도요. 여러 가지로.”

같은 단어로 말을 끝낸 둘이 서로를 잠시 바라봤지만, 금세 정면으로 고갤 돌렸다.

뭐야. 얘네들 지금.

나한테 너무 걱정 말라고, 위로하는 거야? 그토록 고통 받고 고생했던 너희들이?

“하하… 하하하하!”

“대장?”
“대장님?”

“아니, 아무 것도 아냐. 하하하…!”

근거 없는자신감, 근거 없는 희망이 생겼다. 운빨좆망겜에서 하등 쓸모없는 것에 불과했지만….

“좋네. 좋아. 뭐가 됐든지,  해보자고. 돌아가서 말이야.”

“…예!”
“네! 대장님!”

“가자.”

이번엔 셰이 혼자 밀게 두지 않았다. 카야까지 달라붙어 셋이 함께 밀었다. 그러자 거대한 문이 드르륵 소릴 내며 조금씩 안쪽으로 밀렸다.

쿠우웅-!

곧, 완전히 문이 열렸다.

우린 곧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들어가면 바로 메시지와 함께 괴물이 보였던 다른 방과는 다르게, 문 안쪽이 완전히 암흑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씨, 각성할 때 생각나네.’

어찌 잘 이겨내고 저항했으니 다행이었지만, 그때 봤던 환상들 때문에 얼마나 빡쳤던가. 문 안쪽의 어둠은 꼭 그때가 생각나게 했다.

“대장, 이건.”

“이안쪽에 다른 놈들보다  센 놈이 있다고, 뭔가 있어보이려고 커튼 쳐 놓은 거라 생각해.”

그래서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어쭙잖은 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라, 공포포기무새새끼야.

나는 카야와 셰이의 눈을 한 번씩 마주쳐준 다음, 길이  보이는 암흑 속에 가장 먼저 발을 내딛었다.

이게 지금 더 롱 테러였다면, 내가 문 안쪽으로 들어간 순간 로딩과 함께 보스 등장 컷씬이 등장할 타이밍이겠지.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

“씨발 뭐야!”

확 바뀐 시야. 그리고 고막을 찌르는 듯한 날카롭고 기괴한 소리.

정체불명의 소리는 시간이 지나자 점차 분명해졌다.

- 굴복하라.

절로 무릎을 꿇게 만드는, 위압적인 목소리.

- 그렇지 않은 자.

그리고 마침내 목소리의 정체 또한 드러나기 시작했다.

- 공포에 짓눌려 줌 핏물이 될 것이니.


‘이 새끼는…!’

익숙한 대사. 그리고 어떤 괴물이 안 그러겠냐마는, 굉장히 좆같이 생긴 모습!

[1구역 보스 괴물, <공포의 손>이 등장했습니다.]

기괴할 정도로 크고 흉측한 손을 가진, 피지컬 파 보스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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