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3화 〉1구역(2트)(26) (53/218)



〈 53화 〉1구역(2트)(26)

[1구역 보스 괴물, <공포의 손>이 등장했습니다.]

공포의 손.

 롱 테러 보스 괴물들의 이름엔 공포의 뭐뭐가 많았다. 그 중엔 사람의 장기 이름도포함되어 있었고. 예를 들어 공포의 손, 공포의 눈, 공포의 심장 뭐 이런 식이었다.

이놈들은 공포를 숭배하는 가장 높은 계급의 종복들이며, 다른 평범한 괴물들과는 달리그만큼 공포에게 더 많이 물들고 더 많은 힘을 받았다는 설정이 존재했다. 그래서 보스 괴물로 등장하는 것이고.

[기괴하고 압도적인 격의 차이를 느낀 용사들의 마음이 꺾이려 합니다.]

처음에 이 새끼 일러를 봤을 땐 든 생각은, 저 무식하게 큰 손으로 일상생활 가능한가였다. 그러다 던전 깊은 곳에 처박혀있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괴물 새끼한테 무슨 상관이랴 싶었지.

게임 상에서 수도 없이 마주한 놈이었다.  손을 갈기갈기 찢은 적도,  손에 용사들이 무참히 깔려죽은 적도 많았다. 그래도 플레이타임이 늘어나고 그만큼 판수도 늘어나면서 점점 무뎌졌다. 수많은 경험은 로그라이크 게임에서마저 통계적 판단을 세울 수 있게 했고, 완벽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예상하고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었다. 노데스 클리어에  매다는 게 아닌 이상에야 아무리 망해도 1구역은 어찌저찌 깼었으니까.

하지만.

마침내 완전히 드러난 저놈을, 제4의 벽을 너머 두 눈으로 목도하는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딱딱딱딱-

치아가 서로 부딪쳤다. 뼈를 에는 듯한 오싹한 추위가 느껴졌다. 간신히 눈동자만 돌려 동료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도 나랑 별다를 바 없었다.

내가 있으니 더 이상 공포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동료들은, 선 채로 굳어있었다. 압도적인 ‘격차’에 신체가 움직이는 걸 거부했다.

마음이 꺾이기도 전에, 몸이 먼저 꺾이기 직전이었다.

까드득-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무릎을 꿇지 않기 위해서, 움직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간신히 움직이는 혀를 깨물고, 이를 악물었다. 정신이 버쩍 들만큼의 고통이 핏물과 함께 뒤늦게 밀려왔다. 덕분에 아주 조금더 움직일 수 있었다.

“카, 야…!”

그것도 겨우 한 마디가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는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의 촛불과도 같은 등대나 마찬가지였다.

으드드득-

카야의 갑옷이 비명을 질렀다. 석상처럼 굳어버린 몸을 억지로 움직이는  보였다. 차분한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셰- 이---!”

계주에서 바통 터치하듯, 다시 저항하기 시작한 나 대신 셰이의 이름을 외친 카야. 그녀 또한 나처럼 혀라도 깨물었는지 입술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크으윽…!”

저항하라는 카야의 외침은, 셰이에게도 닿았다. 한쪽 무릎이 반쯤 굽혀진 그녀는 클레이모어를 지팡이처럼 짚고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무릎이 바닥에 닿지 않게, 유스티티아 여신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꿇지 않기 위해.

“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자신을 바라봐주는 대장과 동료를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전신을 좀먹고 있던 공포와 무기력함을.

“개씨발갈기갈기찢어흩뿌려도떠돌이개마저외면할오물만도못한새끼가---!!!”

다시 들을 수 없을 줄 알았던 셰이의 폭언으로 된 일갈과 함께 날려보내며….

“기껏해야이단숭배자새끼주제에어디서그런눈으로우릴내려다봐이씨발새끼가눈깔을터트려버릴라!!!”

그녀의 몸에서 뻗어나온 은색의 광채와 카야의 몸에서 뻗어나온 옅은 녹색의 광채가 어둠에 저항하는 것도 모자라 어둠을 갉아먹고 있었다.

“Volente LaElla.”
“Clemens benignitas et inexorabilis gratia.”
따스한 자애와 냉철한 관용을

“Volente Justitia.”
“Stat lux caelum et justus justitia.”
- 만면에 빛과 공정한 정의를

어느새 온전히 일어선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그러쥐며, 자신이 걸어온 길과 믿음이 함축된경구를 읊으며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갔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곳에 은색 빛을 내뿜으며 선두에서 전진하는 성전사.

세상을 어지럽히는 이단들의 근원지나다름없는 이곳에 죽음이라는 따스한 녹색 빛을 내뿜으며 그 뒤를 받치는 전투 수녀.

그리고 그들 뒤에서 그들의 신념이, 저항이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주는 닻이 되어 안정감을 제공한 그들의 대장.

“같잖은 수작은,  통할 거라고 했지 내가.”

기간은 짧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밀도 높고 힘들었던 고난들과 시련을 함께 견디며 사선을 넘나들어, 마침내 끈끈한 유대감으로 이어진 용사대 HAT가.

공포에 잠식된 이가 둘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격의 차이를 견뎌내는데 성공했다.

[용사대가 <공포의 손>의 격에 저항합니다.]
[위압 굴림]
[용사대 : 6]
[공포의  : 5]

[용사대가 <공포의 손>의 위압을 견뎌냅니다.]
[위압에 걸리지 않습니다.]
[신의 뜻이 잠시나마 용사들에게 희망을 속삭입니다.]
[셰이 멘탈리티 +5]
[유진 멘탈리티 +10]

위압 굴림에서 이겼다는 메시지와 함께, 어둠이 완전히 걷혔다.

“제법이군. 불신자들이여. 과연, 여기까지 온  자체가 자격은 충분하다는 것인….”

“닥쳐, 딸도 못  새끼가. 대가리 딱 대.”

기선제압도 실패한 주제에 어디서 똥폼 잡고 있어 씹새가.

**


[속도 체크]
셰이 : 2
카야 : 5
유진 : 7
공포의 손 : 6

[유진의 턴이 앞서게 됩니다.]

게임이었으면 컷씬에 해당됐을 ‘위압 저항’은 두 동료가 보인 ‘기적’ 덕분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솔직히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휴식 덕분에 좀 나아졌다지만 잠식 상태는 여전했는데, 어째서 저런 힘을 낼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젯밤에 유스티티아님이 반응해주신 것처럼, 정말로 여신님들이 카야와 셰이를 지켜봐주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적어도 더 롱 테러에선 없었던, 히든 요소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건 기쁜 오산이었다. 이런 오산은 얼마든지 벌어져도 좋을, 그런 오산.

지금은 그 빛이 완전히 사라졌지만,  영향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공포의 손]
체력 : 99/99
공격력 : 5~10
방어력 : 5
속도 : 6

‘와씨.’

선턴이라서 잠시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1턴엔 무조건 낙인을 찍겠지만, 일단 스펙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욕을 삼켰다.

절대다수가 1렙짜리, 드물게 2렙짜리가 노는 1구역 괴물이 최대 공격력이 10에 방어력이 5라고? 최대 체력은 99?

저놈이 쓰는 스킬들에 붙어있을 보정치까지 생각한다면….

‘실-력, 하는 수밖에.’

라엘라님. 유스티티아님. 기왕 봐주신 거, 한   부탁드립니다.

우선 낙인을 찍기전에 라엘라님과 유스티티아님을 떠올리며, 경건한 마음으로 성수를 원샷했다. 그러자 각종 저항력이 상승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공격력이나 방어력 같은 게 안 올라가는 게 아쉽긴 하지만, 적어도 cc기나 돗뎀(지속 데미지)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제발 저놈 패턴이 최악으로, 우리 공격은 치명타로.’

[수배범 발견]
[유진이 공포의 손을 수배범으로 낙인을 찍습니다.]
[유진이 공포의 손에게 1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98/99]
[낙인은 3턴  유지됩니다.]
[낙인이 유지되는 한, 모든 물리적 데미지가 25% 증폭됩니다.]

다행이었다. 보스 괴물은 다른 괴물들보다 웬만해서 각종 저항력들이 높았기 때문에, 낙인에 안 걸릴까봐 조마조마했지만 천만다행으로 낙인은 찍혔다. 1뎀마저 소중했다.

“낙인이라. 꽤나 저급해서 불쾌하기 짝이 없군. 낙인은 가장 기나긴 공포께 찍힌 것 하나면 충분한 것을.”

[공포를 느껴라]

“영혼의 뿌리까지 새겨주겠다.”

[공포의 손이 유진에게 낙인을 찍습니다.]
[공포의 손이 유진에게 1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6/17]
[낙인은 3턴  유지됩니다.]
[낙인이 유지되는 한, 모든 물리적 데미지가 25% 증폭됩니다.]
[낙인이 유지되는 한, 모든 멘탈리티 데미지가 25% 증폭됩니다.]
[낙인이 유지되는 한, 모든 저항력이 25% 감소합니다.]

“우웨에에에에엑!!!”

“대장!”
“대장님!”

 빌어먹을 손이 날 가리킨 순간, 온 세상이 마구잡이로 뒤틀리고 뒤섞이고 뒤집히는 감각이 날 괴롭혔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무저갱에 떨어질 것만 같은 공포.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이 진짜 세상이 아닐 것 같다는 공포.

낙인이 찍힌 그 순간, 내 몸은 내가 인지하는  너머에서 찾아오는 숨 막히는 공포를 견디지 못했다.

“흐으, 흐으, 흐으….”

“대장! 정신 차리십시오 대장!”
“대장님! 대장니임-!”

“괘, 괜찮아. 괜찮으니까.”

그래. 도저히 진정되지 않는 두통과 메슥거림은 둘째치더라도, 당장 미칠 일 없고 방어력이랑 최대체력도 상승한 내가 낙인을 맞는 게 정말로 다행이었다.

“스읍, 후우, 스읍, 후우. 카야.”

“예. 지시를.”

“…절정이다.”

“…하아악!”

[카야가 절정을 발동합니다.]
[카야의 속도가 1 증가합니다.]
[카야의 최대 공격력이 1 증가합니다.]
[카야의 공격 적중시 무작위 아군의 체력을 1 회복합니다.]

“하아, 하아, 하아….”

카야 또한 성수를 마신 후, 절정을 발동했다. 얼굴이 붉어진 그녀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사실 전투 중 카야의 속옷이 상당히 곤란해진다는 것만 제외하면, 절정은 꽤나 준수한 자벞 스킬이었다. 아직 스킬 레벨이 낮아서 수치 자체는 미비하지만 속도, 딜, 힐 셋 모두를 챙기는 스킬이었으니까. 게다가 더 롱 테러에선 1이라고 해서 무시할 수 없었다.

‘카야의 속도를 6으로 끌어올려서 다음 턴에 저놈과의 속도 굴림을 노린다. 그리고 타격과 동시에 랜덤 힐로 딜 템포도 최대한 유지하고.’

지금은 퓨어 힐링 스킬의 효율이 떨어졌다. 딜을 구겨 넣으면서 유지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첫 턴 정도는희생할  있었다.

카야의 턴이 끝나고, 셰이의 턴이 되었다. 일단 셰이에게도 성수를 마시라고 한 나는 고민에 빠졌다. 벌써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정의의 심판으로 기절을 노리느냐, 아니면 성전사의 집념으로 셰이의 유지력을 높이느냐.’

현재 셰이의 체력 상황은 13/17. 풀피가 아니었고, 재수 없이 치명타 맥뎀이라도 뜨면….

‘잠식된 상태라 사경도 거치지 않고 다이렉트로 골로 간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전신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첫 라운드부터 전투의 승부처였다. 여기서 내가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미래가 바뀔  있었다.

‘정의의 심판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성전사의 집념은 미들 리스크 미들 리턴 정도 되겠지….’

정의의 심판으로 기절을 성공시킬 경우 저놈의 턴을  번 삭제시킬 수 있었지만, 실패하면 데미지만 넣고 끝이었다. 반면 셰이에게 도트힐이 들어가고 반격의 기회까지 주는 성전사의 집념을 발동한다면 무조건 확정적으로 적의 공격을 감내해야 했다.

‘더 롱 테러였다면, 고민 끝에 집념 쪽을 선택했겠지만… 그것도 괴물의 공격을 어느 정도 받아낼만 하다고 생각해서였어.’

고민을 끝냈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두고 싶지 않았다.

“셰이.”

“네. 대장님.”

“가서 저놈에게 유스티티아님의 지엄한 심판을 보여줘.”

카야에 이어 셰이도 내 지시에 제대로 응했다. 그녀는 ‘네, 대장님.’이라는 평상시의 대답 대신, 한 차례 내 얼굴을 바라봤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직후, 셰이는 클레이모어를 사선으로 든 채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보스놈을 향해 타다닷 달려갔다.

[정의의 심판]

높게 치켜든 클레이모어에서, 희미한 은색 광채가 어렸고.

[빛나는 일격!]
[셰이가 공포의 손에게 14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84/99]
[빛나는 일격이용사들의 마음속 공포를 잠시나마 물러나게 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3]
[유진 멘탈리티 +6]
[공포의 손이 심판에 굴복합니다.]
[공포의 손이 상태이상 ‘기절’(1턴)에 걸립니다.]
[공포의 손은 다음 턴에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습니다.]
[공포의 손에게 심판의 낙인이 새겨집니다.]
[낙인은 3턴간 유지됩니다.]

----------!!!

“그렇지!!! 잘했어! 셰이!!!”

이단을  누구보다 증오하는 자는, 괴물의 비명을 배경 삼아 환하게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실되게 기뻐하는 미소를 지은 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