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4화 〉1구역(2트)(27) (54/218)



〈 54화 〉1구역(2트)(27)

저놈의 첫 턴은 낙인으로 넘어간 점. 셰이의 첫 턴이 치명타에 기절까지 먹인 점.  두 가지가 맞물려, 전투의 시작은 이 이상 좋을수 없을 정도였다.

“죽어버려죽어버려죽어버려죽어버려죽….”

클레이모어를 든 채 섬뜩하게 중얼거리는 셰이는 일단 제쳐두고, 다시 내 턴이 돌아왔다.

이미 기절도 걸려있겠다, 폭딜의 시간이었다.

[대가리 분쇄]
[유진이 공포의 손에게 14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70/99]

“쓰읍….”

정말 아쉽게도 치명타는 뜨지 않았다. 그래도 데미지 범위를 생각해보면 잘 뜬 편이어서, 큰 불만을 가지진 않았다.

다음 턴.

절정 자벞으로 인해 속도가 1 올라간 카야와 보스놈의 속도가 동일해졌고, 속도 굴림이 발생했다.

[공포의 손과 카야의 속도가 같습니다.]

‘제발. 제발. 제발.’

카야의 굴림 승률을 생각해보면, 기대를 안 하는 게 마음이 편하겠지만 그래도 가끔씩 중요할 때 홈런을 터트리는 게  카야 아니겠는가.

[속도 굴림]
공포의 손 : 5
카야 : 4

‘아….’

아깝다. 진짜 아깝다. 4면 카야 치고 진짜잘  건데, 저놈한테 밀려버렸다. 씨발 보스라고 굴림 연속으로 두 번  뜨는 건가.  당연하다는 듯 내려다보는 시선이 좆같았다.

“불신자의 빛으로 심판을 꾀하다니, 우습군.”

“뭐래 손병신 새끼가.”

[공포의 손이 턴을 넘깁니다.]
[공포의 손이 상태이상 ‘기절’에서 벗어납니다.]

보스놈의 턴이 넘어갔다. 카야의 턴이 되었다.

“카야.”

“예. 대장.”

“라엘라님의 따스한 자애를  수 있을까.”

카야가 철퇴를 들며 특유의 자세를 잡았다.

“라엘라님이라면, 가능합니다. 그분의 품은 바다와 같이 넓으시니. 저런 끔찍하고 괴악한 이단숭배자라 할지라도, 자애를 느껴볼 기회 정도는 있지 않겠습니까.”

타아앗-!

언제 봐도 멋있는 카야의 스프린트가 삽시간에 거리를 좁혔다. 기세를 살려 공중에 도약한 카야가 녹색 빛이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철퇴를 정점에서부터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강력한 일격!]
[카야가 공포의 손에게 16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54/99]
[강력한일격이 공포를 잠시 물러나게 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2]
[유진 멘탈리티 +4]
[절정의 공격으로 셰이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
[셰이 남은 체력 14/17]

그아아아아아----!

“그렇지! 그거야! 카야!!!”

카야의 철퇴가 보스놈의 머리를 통쾌하게 가격했고, 내 공격을 받을 땐 반응도 없던 놈이 던전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하아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철퇴를 들고 날 바라보는 카야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반쯤 풀린 눈으로 손잡이 윗부분을 살살 쓰다듬는 게, 셰이와는 다른 의미로 소름 돋았지만….

‘뭐 어때.’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상상 이상으로 제 역할들을 다 해주고 있으니 저 정도는 넘어갈 수 있었다.

‘이제 셰이의  번째 턴….’

[남은 체력 54/99]

지시를 내리기 전, 보스놈의 체력 상황을 체크했다. 두 번의 치명타와 맥뎀에 가까운 평타 덕분에 거의반피를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 안심은 일러.’

다시 한 번 나온 갈림길. 방어와 공격 사이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공격을 택했다.

[정의의 심판]
[셰이가 공포의 손에게 3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51/99]

치명타가 안 터져서 데미지는 미약했다. 어쩔 수 없었다. 저놈 방어력이 5나 됐으니까. 문제는.

[공포의 손이 심판에 저항합니다.]
[저항 굴림]

  기절에 걸려서 그런지 저놈의기절 저항력이 좀 올라간 듯 했고, 바로 저항 굴림이 떠버린 것이다.

‘셰이라면.’

굴림 운이 좋았던셰이라면. 가능성 있지 않을까? 희망을 걸어봐도 되지 않을까?

만약 여기서또  번 기절을 걸 수만 있다면, 어쩌면 보스는 생각보다 쉽게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공포의 손 : 6
셰이 : 4

‘……….’

[공포의 손이 심판을 거부합니다.]
[공포의 손이 상태이상 ‘기절’에 저항합니다.]

아니. 말이 돼? 세 번의 굴림에서 5, 5, 6이 나왔다고? 이게 게임이냐? 이게 게임이야?

다시 턴이 돌아 내 차례가 되었지만,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좋아서 웃는 게 아니었다. 근데 내 웃음이 비웃음처럼 들린 것일까. 기절을 먹이는데 실패한 셰이가 전턴에 보였던 귀기어린 모습은 어디로가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죄송해요, 대장님….”

“아, 아니!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저놈도 꼴에 보스라서 그런 거야. 낙담하지 마.”

“네….”

[무력함이 용사들의 마음을 갉아먹습니다.]
[셰이 멘탈리티 –6]
[카야 멘탈리티 –5]
[유진 멘탈리티 –5]

‘쉐엣…!’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셰이의 기분은 자이로드롭에서 떨어진 것 마냥 축 처졌다. 휴식처에서의 일, 보스놈이 건 위압을 저항했던 일, 그리고 방금의 치명타로 인해 도저히 ‘무력함’에 걸린 용사 같지 않았던 셰이가, 순식간에무력감에 빠진 것이다.

‘씨발 괴물새끼가.’

잘해준 셰이를 탓할 순 없었다. 그러니 보스놈이 잘못이었다. 개새끼, 얌전히 기절이나 쳐먹고 두들겨 맞아서 비명이나 지를 것이지 왜 우리 셰이 기를 죽이고 그러냐. 어? 그러다가 셰이가 턴을 스킵해버리면 어쩌려고!

그런 내 마음이 알 바냐는 듯,다시 내 턴이 돌아왔다. 어영부영 3턴까지 잘 흐르긴 했지만, 진짜 전투는 지금부터라고 해도 무방했다.

‘다음 턴엔 여지없이 공격이 날아오겠지.’

누가 맞든 곡소리가 날 것이다.

‘기절에 걸렸으면 모르겠지만, 셰이랑 카야가 위험해. 한  맞아보고 판단하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상대가 정예 괴물이었다거나, 하다못해 셰이와 카야가 잠식 상태만 아니었어도 보스놈의 공격을 한 번 정도는 맞아준다는 쪽에 무게가 실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보스놈이 2번째 기절에 걸리지 않자, 최고난도라는 난이도 때문에 다소 억눌렸던 평소의 안전지향적 성향이 튀어나왔다.

‘섬광탄… 하, 미치겠네 진짜.’

고민을 거듭할수록 마법횃불의 밝기가 점점 줄어들었다. 동료들은 긴장한  보스놈과 대치하고 있었고, 보스놈은 제 상반신만한 손을 들어올리며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꿀꺽-

목이 탔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가뜩이나 보스놈에게 맞은 낙인 때문에 어질어질한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턴은 아직 내 턴인데, 저놈이 무슨 짓을 할지,  파급력은 얼마나 될지 가늠이 안 됐다. 극도의 긴장감 때문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크다지만, 기대를  할 수가 없겠지.’

판단은 신중하게, 행동은 신속하게.

나는 오랜만에 섬광탄을 뽑아들고는 안전핀을 해제했다.

[섬광탄!]

그리고 전력을 다해 투척했다.

[유진이 공포의 손에게 1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50/99]
[공포의 손이 상태이상 ‘실명’(1턴)에 걸렸습니다.]

“흐음, 또 잔재주를.”

됐다. 걸렸다.

비록 1턴짜리지만, 효과만 제대로 발휘된다면.  한 턴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낙인이 유지되는 마지막 턴에 상황을 봐서 폭딜로 단숨에 끝내버리는 것.

그게 지금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는 미래였다.

“가소롭군. 이런 잔수작으로 공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태산과도 같은 공포]

“보이지 않으면, 모조리 짓누르면 되는 일.”

“씨발…!”

보스놈이 가뜩이나 거대한 손을 더욱  거대하게 부풀렸다. 손이라고 하기에도 어폐가 있을 정도로, 거대하고 또 거대해진 그놈의 손은 딱 봐도 불길한 기운에 둘러싸여있었다.

‘아직 딸피도 아닌데 왜 저 스킬을!’

무지막지하게 커진 손으로 내려찍는다는, 단순무식하기 짝이 없는 공포의 손의 전역 광역기. 광역기라 당연히 단일 공격기에 비해 데미지는 약하지만, 허공에서 무서운 기세로 내려오는 거대한 손을 보면 그딴 생각은 절대 하지 못할 것이다.

집으로 갑자기 산사태가 몰려오면 이런 기분이 들까?

모르겠다. 씨발 그걸 내가  리가 없잖아.

“씨발 버텨어어어-!!!”

“유스티티아님-!”

“라엘라시여…!”

감히 피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미 저놈의 손은 물체의 개념을 벗어났다. 이곳, 1-10을 지배하고 있는 일종의 영역이었다.

이 손 아래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굴복시키고 깔아뭉개 공포를 심어주겠다는 로직만이 통용되는 공간이 형성된 것이다.

‘씨발씨발씨발, 제발 제발 제발!’

체력이 3분의 1, 혹은 4분의 1 이하로 떨어질 때만 사용하던 전역 광역기를 저놈이 왜 지금 사용했는지. 그 사실은 그저 ‘최고난도’라서, 그래서 더욱 좆같아졌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지금은 그딴 원론적인 것보다도, 저 공격에 우리 용사대가 박살나지 않길 기도하는 게….

콰아아아아앙----!!

“아아아아으으으아아아아아악----!!!”

“끄으으아아아아아아아--!!!”

 그대로 태산이 짓누르는 듯한 공포에 생각이 끊겼다.

던전이 붕괴하는  아닐까 싶을 정도의 충격과 공포.

어렴풋이 들리는, 생전 처음 듣는 동료들의 가장 처절하고도 처참한 비명소리.

그리고.

“아….”

뒤늦게 찾아온, 온몸이 으깨진 것 같은.

“아아아아.”

 사람 발에 짓눌린 사마귀가 된 것 같은.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차라리 뒤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아니, 왜  죽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엄청난 고통이 뒤늦게 밀려왔다.

[태산과도 같은 공포가 용사대를 짓누릅니다.]
[공포의 손이셰이에게 10의 데미지를 입힙니다.]
[셰이 남은 체력 4/17]
[공포의 손이 카야에게 12의 데미지를 입힙니다.]
[카야 남은 체력 2/14]
[공포의 손이 유진에게 13의 데미지를 입힙니다.]
[유진 남은 체력 3/17]

시스템적 보정이 아니었다면 진즉 쇼크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고통 속에서도, 내 눈은 본능적으로 전투 메시지를 체크했고, 말도 안 되는 데미지를 보고는 기절하고 싶었다.

그러나 더 소름인 건, 아직 나타나지 않은 메시지가 있다는 것.

“안 돼… 안 돼애애애!!!”

“이러지 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태산과도 같은 공포가 용사대를 짓누릅니다.]
[용사대가 짙은 공포에 몸부림칩니다.]
[셰이 멘탈리티 -25]
[카야 멘탈리티 -20]
[유진 멘탈리티 –16]

막대한 전역 공격에 이어지는 막대한 멘탈리티 공격.

공포의 손의 최강의 공격, ‘태산과도 같은 공포’  한 방에 용사대가 망가져버렸다.

“흐에, 흐에에, 흐헤헤…!”

“크윽, 큭, 우으윽….”

“어리석은 불신자들. 처음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군.”

공포의 손의 턴은 끝났다. 아무리 보스놈이라도  턴에  행동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지금은 저놈 다음 턴인 카야의 턴이겠지. 하지만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셰이도, 카야도, 그리고 나도.

바닥에 벌레처럼 버르적거리고 있었으니까.

[던전의 공포가 어둠을 타고 영역을 넓힙니다.]
[밝기 : 63]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일어날  없었다. 눈동자를 굴리는 것도 엄청난 고통이 수반됐다.

‘하하….’

이야. 단 한방에 이렇게 됐다고.  한방!

좋겠다? 공포포기무새관음증변태새끼야? 내가 설치고 다니는 게 눈꼴시려웠는데, 참 좋으시겠어?

뭐? 치명타가 안 떠서 다행인 줄 알라고? 그건 그런데, 보스새끼 아까 굴림 3연속 그따구로 것도 그렇고 아까 광역기도 맥뎀으로 떴더구만. 거기에 치명타? 양심있냐?

아. 없다고?

씨-발, 이게 게임이냐?

적어도 3구역, 아니 2구역 정도부터 이래야지. 1구역부터 이러면, 이걸 깨라고 만든 거야?

나 그냥 고통 받으라고? 어? 동료들 죽어나가는 거, 동료들 갈아넣으면서 어떻게든 공략한 다음.  멘탈 갈려나가는  보면서 즐기려고? 그럴 거면 나 말고 다른 게이머들도 많았을 텐데, 왜 하필 나야. 대체 왜!

어?

어?

어?

열 받네?


[밝기 : 55]

눈을 깜빡였다. 이를 악물었다. 손바닥으로 던전 바닥을 짚었다. 송곳에 마구잡이로 찔리는 기분이었지만, 참았다.

몸은 겉으로 보면 멀쩡했다.

하지만 짜부라지는 것 같았던 감각은 진짜였다. 저 근엄한 척 내려다보는 씨발새끼의 공격은, 진짜였다.

“일어나….”

“안 돼…!  된다고… 제발…!”

“윽, 크윽, 흐윽.”

“일어나---!!!”

성대가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감내하며.

“돌아가서 여러 가지로 보답해준다던 거, 거짓말이었냐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료들을 채찍질했다.

“카야!!! 셰이!!!”

[어둠에 숨어든 공포가, 이제는 반대가 되기 시작합니다.]
[밝기 : 49]

이게 용사대의 미래라는 듯, 1-10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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