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스펙 업(1)
쏴아아아-
“흐읏…?”
회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드러난 회색 눈동자에는 당혹감이 서려있었다. 분명 어떻게든 일어나서 괴물이 있을 곳에 철퇴를 휘두른 다음, 철퇴에 묵직한 감각이 전해지자마자 모든 힘을 다해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그들의 머리를….
“프후우우… 스으읍, 프후우우….”
“으읏.”
눈 떠보니 욕실 벽에 기대 온수를 맞고 있고, 한쪽 허벅지엔 헨드릭이 엎어져있었다. 둘 다 알몸이었다.
‘여긴… 아. 돌아왔구나. 돌아온 거구나.’
해냈다. 자신이 해냈다. 셰이가 해냈다. 그리고 대장이 우릴 세일럼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정신이 멍했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유추가 가능했다. 다만, 그의 얼굴이 그곳을 향해 있다는 것과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는 과정에서 그곳이 계속 자극된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대, 대장….”
소심하게 불러보지만, 이미헨드릭은 기절한 상황. 몸 구석구석 묻어있는 핏자국이 신경 쓰였던 그녀였지만, 허벅지도 저려오고 엉덩이도 아파오던 그녀였지만. 이 자세에서 움직이기 싫었다.
“여보… 핫!”
자기도 모르게 헨드릭의 볼을 매만지다가 중얼거린 한마디에 소스라치게 놀란 카야. 그녀는 괜히 그들 말고 아무도 없는 욕실을 두리번거리고는 가슴 윗부분을 누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환상… 지독하게 달라붙어 있네.’
인장처럼 머리 한쪽에 쾅 찍혀있는 것은 아닐까. 환상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평생 잊을 수 없는기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아이를 가지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부부 사이가 되는 것 정도는….
‘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카야는 자신의 뺨을 찰싹 때렸다. 헨드릭은, 자신의 대장은 운명의 기로에서 있는 중요한 용사. 한낱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그의 바람을, 그의 운명을 망쳐서는 안 됐다. 가끔씩은, 그도 그녀도 여유가 될 때. 정말 가끔씩은 그녀만의 ‘유진’으로 대할 수 있는 솔직한 시간. 그게 있다면, 카야는….
‘대장이라면, 셰이도.’
품고 갈 것이다. 자신처럼.
독점하고 싶다. 자신만의 보물, 자신만의 운명. 단 둘뿐인 운명공동체. 얼마나 멋진울림인가.
헨드릭의 입술을 매만지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카야는 자신이 평생 이렇게까지 욕심을 부린 적이 있었나 또 한 번 스스로에게 놀랐다.
그리고 그 점마저, 카야는 헨드릭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죽지 못해 살아가던 자신이, 겨우 찾은 신앙심으로 살아가던 자신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원하게 된 자신으로 변하게 된 게, 전적으로 헨드릭 덕분이었으니까.
카야는 이런 자신이 낯설긴 했지만, 결코 싫진 않았다. 오히려 이 감정은 소중했다.
“조금, 조금 정도는….”
그러니 괜찮지 않을까.
시키는 대로 잘 했고, 또, 대장도 이런 상황이니까… 조금쯤은, 사적인 행복을 누려도 되지 않을까.
카야는 자세를 슬쩍 바꿨다. 그리고는 고갤 숙여 입을 맞추었다.
쪼옥-
“…부족해.”
쪼오옥-
“조금만, 더.”
쮸우웁- 츕- 츄웁-
카야의 입맞춤은 점점 더 길어졌다. 점점 농밀해지던 그 소리는, 그들을 흠뻑 적시는 온수소리에 가려졌다. 조금만 하겠다고 다짐했던 카야는 그만둘 생각이 없어보였고, 말릴 사람도 없었다.
“하아아….”
잠시 제풀에 지쳐 입술을 뗀 카야는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헨드릭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마음속에선 이 순간이 영원히 유지됐으면 하는 바람과, 그가 깨어나서 자신의 키스에 호응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서로 충돌했다. 저번처럼 아름답다며, 예쁘다며 자신을 바라봐주고 만져주고 안아줬으면 싶었다.
‘지나친, 욕심이야. 적어도 지금은….’
이미 기절한 헨드릭을 상대로 허락도 없이 키스를 퍼붓고 있다는 자각은 없었지만, 카야에게 마지막 이성은 남아 있었다. 아무리 온수를 맞고 있다지만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욕실에 오래 있는 것도 몸에 좋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기회가 없는 건 아닐 테니까.’
당분간은 자신도, 대장도 던전엔 발도 들이지 않을 것이다. 몸 회복도 해야 하고, 잔뜩 지친정신을 위해서 요양도 해야 하고, 무구랑 소모품 정비도 해야 하고, 아마 새로운 동료도 영입해야 할 것 같고.
사소하든 중요하든 괴롭든 즐겁든 헨드릭과 함께라면, 끝까지 함께할 것이다.
“한 번만….”
그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
실로 오랜만에 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 내가 알기론 비렘수면이 개꿀잠 자는 거고, 렘수면이 얕은 잠을 자면서 꿈도 꾸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기분 좋은 꿈을 안 까먹었으면서도 피로가 상당히 풀린 기분이었다.
‘아님 말고.’
기분 좋은 꿀잠을 잤는데 그게 비렘수면이든 렘수면이든 알게 뭔가.
난 동료들과 함께 살아남았고 무사히 귀환했다. 짭짤한 보상을 얻었다.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양손의 꽃을….
‘…어?’
이게, 왜, 진짜…?
나는 그제서야 내 온몸을 양쪽에서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무언가의 정체를 파악했다.
좌 셰이, 우 카야.
두 동료가, 아니 두 여자가 알몸인 상태로 내게 바짝 안겨있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된다. 꿈은 꿈이었다. 침대가 그렇게 넓은 것도 아니고, 난 분명 욕실에서 카야를 씻겨주려다 쓰러졌고… 아 몰라. 어쨌든 말이 안 된다고.
“환상인가.”
“안녕히 잤어요, 대장님?”
“허억!”
허나 내 부정은 삽시간에 깨져버렸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끼기긱 고개를 돌리니 생긋 웃고 있는 셰이의 얼굴이 보였다.
이세계 판타지 공주님이 이렇게 생겼을까 싶을 정도로 귀티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뽐내는 이목구비. 탐스러운 황금빛 머리에 둘러싸인 헤플 정도로 밝은 웃음.
목까지 이불을 덮어서 그런지 얼굴만 드러내고 있는 셰이가, 어느새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셰, 셰이.”
“좋은 아침이에요. 아, 점심인가?”
“이, 이건 어떻게.”
“아아. 이건 말이죠?”
쿡쿡 장난스레 웃은 그녀가 검지 끝으로 내 코끝을 툭 건들며 말했다.
“깨어나보니까 저는 이쪽 침대에 혼자 누워있었고, 다른 침대에 대장님이랑 언니가 꼭 붙어 누워있던 거 있죠? 둘이서 붙어자는 게 부러워서, 침대를 확 붙여버렸어요. 헤헤.”
가까워. 엄청 가깝다고. 그렇게 달라붙으면서 웃지 마… 위험하다고… 닿는다고…!
“아, 그. 괜찮아? 그 꼴로 쉬는 건 좀 많이 아닌 거 같아서, 일단 허락도 없이 씻기긴 했는데.”
“물론 괜찮아요! 오히려 고마워요, 대장님. 만약 갑옷 입은 상태 그대로 잤다간, 굉장히 불쾌했을 거예요. 그리고, 대장님이라면… 괜찮아요.”
셰이는 헤헤, 웃으며 몸을 꼼지락거렸다. 때문에 가뜩이나 힘이 들어간 하반신에 피가 쏠렸다.
‘유스티티아님. 딸 좀 말려보세요. 네?’
아무리 멘탈 케어를 위해 둘 다 던전에서 안아버렸다는 극단적인 방법을 실행했다곤 하지만 귀환 다음날 아침부터, 그것도 다른 동료가 바로 옆에서 딱 붙어 자고 있는데 흥분하고 덮치는 건 못할 짓이었다.
그들은 동료였다. 창녀가 아니라.
나는 그녀가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그녀의 품을 벗어났다. 덩달아 카야의 몸도 떨어져나갔다.
“후으응… 대장….”
“와.언니 진짜 귀엽네요.”
카야는 갑자기 안고 있던 게 사라져서 허전한 건지 팔다리를 꿈틀대며 잠꼬대를했고, 그건 셰이의 말마따나 꽤나 파격적으로 귀여웠다. 스크린샷같은 게 없으니 아쉬웠다. 아쉬운 대로 머릿속에 저장해두자.
“몸은 좀 괜찮고?”
“네. 온몸이 나른하고 귀찮긴 한데, 막 무섭고 그런 건 훨씬 덜한 거 같아요.”
“다행이네. 그럼 여기서 좀 쉬고 있어.”
“어디 가세요?”
“밥 가지러 와야지. 여관비도 내야하고.”
“딱히 배는 안 고픈….”
꾸우우우….
“크흠. 갔다 올게.”
“이, 이건!”
“최대한 빨리. 알았지?”
“대, 대장니임!”
그거 알아? 셰이? 얼굴 빨개진 너 지금, 카야 못지않게 엄청 귀여운 거?
나는 옷을 챙겨 입고는, 그녀의 뱃소리를 못 들은 척 방 밖으로 나갔다.
**
“HAT용사대의 헨드릭 용사님, 맞습니까?”
“맞습니다만, 누구신지…?”
“세일럼 시 용사담당부 제3용사조사대 소속 예그리나라고 합니다. 질문하고자 하는 게 몇 가지 있으니 협조를 바라겠습니다.”
여관1층으로 내려가자마자 단정한 인상의여자가내게 다가왔다. 굉장히 사무적이고 딱딱한 어조로 ‘용사조사대’라고 말하며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런. 헨드릭 용사님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닙니다. 그저 사실 확인을 위한 질문을 몇 가지 할 뿐입니다. 혹여 제 신분이 의심스러우시다면….”
“혹시 저희 용사대를 여기로 옮겨준 분들에 대한 겁니까?”
“맞습니다.”
“잠시만요.”
예그리나라는 딱딱한 여자가 절도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FM 조교의 숙련된 몸짓도 저것보단 덜하겠다는 생각을 하며,주인에게 숙박비를 내고 이따 방으로 가져가서 먹을 식사를 주문했다. 침대가 두 개일 때부터 눈치 챘지만, 전에 묵던 방보다 큰 방이어서 그런지 숙박비가 올랐다.
‘
존나 배고플 거 같아서 6인분을 주문했더니, 여관주인의 표정이 살짝 좋아진 거 같기도 하고.
하여튼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저 여자와의대화를끝내기로 했다. 구석 테이블에 앉자 그녀가 맞은편에 앉았다.
“어제 세일럼에 귀환하신 것, 맞습니까?”
“예.”
“귀환 당시, 용사대의 상태는 어땠습니까?”
“…둘은 기절한 상태였고, 저 또한 기절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전신에 부상을 입었고 피 또한 상당히 많이 흘렸습니다.”
“혹시 어디까지 기억하십니까?”
“세일럼에 돌아온 직후, 제 용사대를 발견한 최초의 두 사람이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제게 묵고 있던 여관을 묻더니 사람을 불러와 함께 옮기려던 것까지는 기억이 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아케르만이라고 했습니다.”
“혹시 없어진 물건이 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쪽의 말이 일치합니다. 이걸로 헨드릭 용사님에게 할 질문은 끝이 났습니다만, 혹시 궁금한 점이 있으십니까?”
“혹시 무엇 때문에 그런지 알 수 있습니까?”
와. 진짜 간단한 질문 몇 개만 받았을 뿐인데, 표정이랑 어조 때문에 그런가 마치 취조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난 잘못한 것도 없고 또 이참에 세일럼에 대한 지식을 얻을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간단합니다. 이익엔 이익을, 손해엔 손해를.”
다행히 눈앞의 FM조사관은 생각보다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그녀는 깍지를 낀 손등 위에 턱을 얹으며 말했다.
“아케르만 용사님과 그 일행은 헨드릭님을 포함한 성실한 용사님들을 무사히 여관에 데려다줬을 뿐더러 불법적인 이득을 취하지도, 불법적인 손해를 끼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케르만 용사님에게 소정의 보상금이 지급될 예정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던전에 도전하는 모든 이들을 ‘용사’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용사라고 다 같은 용사는 아닙니다. 헨드릭 용사님.”
“무슨, 말씀이신지.”
“직접 던전에 들어가본 적도 없는 자의 주제 넘는 말일 수 있으나.”
순간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듯 했다.
“꽤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용사 관련 문제들을 조사하고 해결하면서 느껴본 바로는… 던전의 끝까지 돌파하려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용사는 지금의 세일럼에 없습니다. 덜 탐욕적이냐, 매우 탐욕적이냐.덜 물들었나, 되돌릴 수 없이 물들었나. 그 차이입니다.”
“….”
“덜 탐욕적이고 덜 물든 용사에게 구조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쉬시는데 방해해서 실례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FM조사관, 예그리니가 성큼성큼 여관을 나갔다.
‘진정한 용사가 없다라….’
그녀가 내 최우선 목표를 들으면 뭐라고 얘기할까 순간 궁금해졌지만, 식사 받아가라는 여관주인의 말에 생각은 끊겼다.
‘뭐, 문제 일으킬 일이 딱히 없는 이상 엮일 일도 없겠지.’
덜 탐욕적이고 덜 물든 아케르만이라는 용사와 그 일행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며, 6인분치 식사를 들고 뒤뚱뒤뚱 계단을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