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스펙 업(5)
“흐윽, 대, 대장. 자, 잠시만…!”
“왜. 왜?”
내 목을 끌어안고 호응해주던 카야가 방을 둘러보더니 뒤늦게 내 어깨를 밀어냈다. 앙탈이나 애교 수준에서 밀어내는 게 아니라 정말로 힘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살짝 흥분이 가라앉았다.
“셰이가… 없어졌습니다.”
“…으음.”
그리고 이어진 카야의 말에 흥분 때문에 눌러두었던 미안함이 급부상했다.
“대장이랑 이러는 게 싫다는 건 아닙니다. 지금도 심장이 쿵쿵 뛰고 있습니다. 다만….”
그녀는 흐트러진 옷을 매만졌다.
“이 옷을 사준 것도 셰이고, 대장이 보고좋아할 만한 옷을 보여주자고 말한 것도 셰이고, 대장이 입고 좋아할 만한 옷을 선물해주자고 말한 것도 셰이입니다.”
“…뭐?”
흥분이 싹 가라앉았다.
“그런 셰이를, 저만 혼자 대장을차지하고 혼자 내쫓는 방식으로 내버려두는 것은….”
어째,그림이 유사한 것 같긴 하지만.
거사 직전의 카야를 내버려두고, 셰이를 찾아 방문을 나섰다. 그래도 그때와는 다른 점이라면, 이걸 카야가 바랐다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으니.
“셰이!”
그 짧은 시간에 셰이는 이미 여관을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녀가 어디로 갔을까 고민했다.
‘젠장, 나도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아무리 카야가 개꼴렸다고 해도….’
거기서 셰이를 밀어내고 카야에게 달려들다니. 적어도 던전 안에서는 텐트가 격리되어 있기도 했고, 망가진 멘탈을 케어한다는 공적인 이유라도 있었다. 내가 만약 방금 전 셰이의 입장이었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상상해봤다.
‘….’
상상을 그만하기로 했다. 애초에 셰이가 계획했다고 하니, 그녀도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리라는 걸 예상했을 확률이 높았다. 카야랑 나랑 관계를 맺었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을 테고.
그래도 그건 셰이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가장 중요한 건.
카야나 셰이에게나, 공식적으로는 동료 이상의 관계는 되지 않았다는 것.
아무리 극한의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그녀들의 몸을 취한 건 마찬가지였는데 그 뒤로 그것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일시적 현자 상태인 나는 자문했다.
나는 정말 카야와 셰이를, 순전히 그녀들의 멘탈 케어를 목적으로 안았던 것인가? 그래서 순전히 멘탈 케어의 수단으로써 그녀들의 몸을 취했다고 할 수 있나?
‘그건 아니지.’
단언컨대 아니었다. 최초의목적은 그랬을지 몰라도, 나 자신도 즐겼다. 그 순간만큼은 그녀들이 내 여자라도 된 것처럼 행복했고, 하나가 되어 같이 절정할 땐 그 어느 때보다 황홀했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냄새, 몸짓, 눈빛, 신음 등 모든 게 사랑스러웠다. 더러운 혼혈이라며, 끔찍한 흉터 가득한 몸이라며 자기 자신을 결함품 취급하는 그녀들에게 화가 났고, 그런 점마저 아름답게 보였다.
심지어 카야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었고, 두 번째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나를 향한 강한 집착을 드러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어디까지나 용사대 동료로서 벌인 일인 것 마냥 굴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카야가 섹시한 모습을 보이자마자 발정난 개처럼 그녀에게 달려들었고.
내 안에, 내 욕망이라면 카야는 군말 없이 다 받아줄 거라는 의식이 깔려있던 것은 아닐까?
‘개씨발쓰레기 짓이잖아 이거.’
지구에서의 나였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인데. 꿈속에서 양손의 꽃을 쥐고 있었다고 해서, 실제로 둘 모두와 몸을 섞었다고 해서.
그녀들은 내가 마음대로 다뤄도 좋을 꽃이 아니었다.
“씨발… 존나 한심하네.”
한 번 보고 안 볼 사이면 모를까, 끝까지 가겠다는 동료를 상대로 아주 잘하는 짓이었다.
섹파? 원나잇?
그런 건 모른다.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얼마 전까지만해도 아다였던 새끼가.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것은 치워버렸다. 내가 아는 걸로, 정면으로 부딪칠 것이다.
‘존나 미친놈 발상이라는 건 아는데….’
나는 카야랑 끝까지가고 싶다.
또한 나는 셰이랑 끝까지 가고 싶다.
나는, 카야랑 셰이랑 함께 끝까지 가고 싶다.
판단은 신중하게, 행동은 신속하게.
“저기, 혹시 어깨 밑까지 내려오는 금발에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하얀색 드레스 입은 여자 본 적 있으십니까?”
“음? 본 것 같기도 하고….”
딸랑-
“아마 저쪽으로 갔던 거 같은데….”
“감사합니다!”
셰이야. 못된 쓰레기 대장님이 미안해.
어딨어?
**
“흥흐흥~흥흐흥~ 흥~ 흥~ 흐응~”
여관을 빠져나온 셰이는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매사에 딱히 목적을 가지고 움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러했다. 가장 깊숙한 곳, 그리고 가장 멀리서 자신의 여신님이 굽어보고 계시니 그 안에서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도 될 테니까….
“흥흐흥~ 흥흐흥….”
카야와 함께 예쁜 드레스를 사고, 맛있는 걸 사먹고, 그 모습을 헨드릭에게 보여줘서 깜짝 놀래키고 그 반응을 보는 것도, 각자 반씩 부담해 헨드릭이 입을 멋있는 옷을 산 것도.
모두 자신의 의지대로 행한 것이고,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갔으니 행복했다.
그래. 행복했다. 기뻤는데.
왜… 안 기쁘지.
“흥, 흐, 흥….”
자신은 바보가아니다. 이유는 알고 있다.
‘카야 언니.’
카야 같은 여자가 그런 옷을 입고 부끄럽다면서 얼굴을 붉혀대면 어떤 남자가 안 달려들 수 있을까? 오히려 헨드릭은 점잖은 편인 거 같았다.
‘…나도 그런 옷, 입을 줄 모르는 건 아닌데.’
옷이 사람을 가리던가. 사람이 옷을 가리지.
셰이는 자신의 팔과 다리를 빈틈없이 감싼 옷을 바라봤다. 역시 케릴린 아줌마의 솜씨는 뛰어났지만… 오늘만큼은 이 천조각들이 너무나 답답했다.
‘그땐… 어두워서, 그랬던 걸 거야.’
습관처럼 떠오른 미소엔 씁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지금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보라. 대놓고 헤벌레 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척 곁눈질로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자신의 모습을 칭찬하고 있을 것이다.
허나 목덜미를 조금만 내놓는다면? 팔다리를 조금만 걷어 올린다면?
저 시선들엔 잘 쳐줘봐야 동정, 대개는 혐오가 담길 것이다.
이 몸뚱이가 아름답다며 품에 안아준 헨드릭도, 어두운 던전 안이 아니라 밝은 곳에서 다시 본다면. 위험에처한 동료를 구하려는 용사대의 대장이 아니라, 그냥 남자로서 다시 본다면.
‘겁쟁이.’
그때처럼 다시 대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두려웠다.
‘카야 언니는… 너무 예뻐.’
무엇보다도 헨드릭의 반응은 진짜였다.
자신을 바라봤을 때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반응이긴 했지만, 카야를 바라봤을 때의 반응에 비하면 온도차가 있었다. 단순히 옷의 노출도 차이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뭐 때문에 그리 느꼈는지 이유를 대라면 명확한 근거는 댈 수 없지만… 그래. 감이었다. 같은 남자를 마음에 둔 여자로서의 감.
셰이는 카야를 어떤 점으로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보다 먼저 시작된 대장님과의 인연, 얼굴, 깨끗한 몸매… 거기에 나한텐 없는 차분함과 진중함까지.’
헨드릭도 너무 좋고, 카야도 너무 좋았지만.
그래도, 자신도 여자였는지… 둘이 꽉 달라붙어 진한 키스를 하는 모습을 태연하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쯤이면 하나가 됐겠지? 언니는 얼마나행복할까?’
행복한 언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위에서, 대장님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내 앞에서 보였던 표정이랑 똑같을까? 아니면 얼마나 더 황홀한 표정을 지을까? 내 몸과 언니의 몸을 비교하고 있을까? 흉터 하나 없는 깨끗한 몸을, 부드럽고 울퉁불퉁하지도 않은 몸을 유리처럼 소중하게 다뤄주겠지?
셰이는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중얼거리며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인적이 드물었고 조용했다. 건물들도 다소낙후되어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왔지…?’
그렇게 빨리 걸었나? 아니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은 것이었다.
외곽에 위치한 사창가.
깊은 밤에는 그 어느 곳보다 화려하고 밝은 이곳은, 아직 밤이 되지 않아서 그런지 그 어느 곳보다 조용하고 어두웠다. 몇 시간만 있으면 금세활기를 띄기 시작하겠지만.
‘있어서 좋을 곳은 아니니, 이만 여관으로 돌아가야, 아니, 적어도 다른 곳으로….’
셰이가 몸을 돌리려 한 그때였다.
“거기 아가씨, 손님이야?”
“…저요?”
“그래, 흰색 드레스 아가씨.”
아가씨라.
생소한 호칭에 되물었지만, 그 호칭은 명백히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옷차림이나 분위기를 보면 이쪽 시궁창에 몸담은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이 시각에 홀로 이 근처에서 두리번거리는 건 둘 중 하나잖아? 특별손님이거나, 특별한 사람이거나.”
“미안하지만 전 둘 중 아무 것도 아니에요. 길을 잘못 들어서 돌아가려 했어요.”
창가에 앉아 긴 파이프를 물고 옆머리를 긁적이던 여자는 셰이를 위아래로 쓰윽 훑더니 피식 웃었다.
“처음 오는 외지인이 아닌 이상, 여길 잘못 들어오긴 힘든데 말이야.”
“그쪽에게 딱히 거짓말 할 이유는 없어요.”
“아하. 뭐 그러시겠지.”
“…뭐라고요?”
여자의 말속에 내포된 비아냥을 포착한 셰이가 표정을 굳히며 되물었지만, 여자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아주 우연찮게 이 누추한 곳에 길을 잘못 들어온 고귀한 아가씨와 그녀를 찾아 헤매다 마침내 찾아온 멋있는 기사 청년의 사랑 이야기라도 찍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는 거고.”
“그게, 지금 무슨….”
“셰이!!!”
‘대장, 님…?’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은 셰이는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어째서, 어째서 지금 대장님이 여기 있는 거야? 언니는? 언니랑 한창 사랑하고 있어야 할….’
“셰이, 대체 왜 이런 곳에… 아니다. 일단 돌아가자. 돌아가서 얘기하자.”
“앗.”
셰이는 헨드릭에게 손목을 잡힌 채 사창가를 벗어났다. 앞서가는 헨드릭의 발걸음은 굉장히 다급해보였다.
**
‘와… 진짜 식겁했네.’
은화를 아끼지 않고 튕긴 보람이 있었다. 은화 1개가지곤 세일럼에서 제대로 된밥 한 끼 챙겨먹기 힘들었지만, 말 몇 마디 털고 받을 수 있다면 거리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묻고 묻고 물어 사창가 사이를 걷고 있는 셰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은화 열다섯 개째였다.
‘운이 좋았어.’
셰이를 붙들고있던 여자가 악질이 아니었다든가, 셰이가 사창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다든가 등등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세일럼의 사창가는 절대로, 여자 혼자서 돌아다닐 곳이 아니었다. 공식 설정에도 세일럼의 거대 쓰레기통이라고 적혀있을 정도였고 이곳에서 직접 들은 풍문으로도 식겁할 정도로, 단순한 육욕 이상의 다양하고 변태적인 욕망들이 모조리 분출되는 곳이었다.
돈에 혈안이 되어 있는 비 길드 소속 상인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다가 운 좋게 한탕에 성공해 그동안 쌓인 울분과 욕망을 한꺼번에 풀어내는 몰락한 용사들, 용사처럼 목숨 걸고 돈 벌기는 무섭고 그렇다고 다른 도시로 가는 것도 두렵지만 돈은 만지고 싶은 어중이떠중이들, 그리고 쏠쏠한 수입 때문에 단속하기는커녕 묵인으로 일관하는 세일럼 시의 입장이 한데 모여 끔찍한 곳이 탄생한 것이었다.
아무리 오후였다지만, 그런 곳에 셰이 같은 여자가 혼자서 오랫동안 돌아다닌다?
용사고 성전사고 뭐고, 그녀의 인생이 여러 모로 끝장날 뻔했다. 설령 예전에 마주했던 FM조사관 같은 사람이 출동해 그녀를 어떻게 구해준다 해도….
‘씨발.’
상상만으로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거기에 셰이에 대한 미안함과 그곳에 자각 없이 함부로 발을 들이민 그녀에 대한 화가 뒤섞였다.
“셰이.”
“…네, 대장님.”
“걱정했어.”
“….”
“특히 카야가 더.”
“왜….”
“왜?”
“왜, 절 찾으신 거예요? 그렇게 예쁘고 매력적인 언닐 두고 어떻게, 대장님은 분명 언니랑…!”
그녀의 표정을 보고, 그녀에게 왜 그런 위험한 곳에 있었냐고 화를 낼 수 있을까. 애초에 나한텐 그럴 자격도 없었다. 카야가 밀어내면서 셰이를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몸을 탐하고 나서 한참 후에야 깨달았겠지.
나는 대답 대신 방문을 열었다.
“셰이!”
“어, 언니…?”
그러자 안쪽에서 카야가 튀어나오며 셰이를 와락 껴안았다. 자기 혼자만 생각했다는 카야와 오히려 그런 카야를 괜찮다며 토닥여주는 셰이.
“일단, 들어가자.”
나는 그녀들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