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이단의 성녀, 금단의 수녀(2)
“이건, 말도 안 돼…!”
까드득-!
카야와 셰이가 정예 괴물인 <공포의 수녀>를 보고 경악했다. 물론 나도 그녀들만큼은 아니겠지만 꽤나 놀라고 있었다.
“불신자들…그 중에서도 허상을 좇는 자들의 기운이 강하구나.”
“타락….”
공포를 숭배하다 못해 맛이 가버린 여타 괴물들과는 달랐다. 시스템은 저 여자를 명백히 괴물로규정하고는 있었지만, 다른 괴물들과는 달리 흉측한 외모도 아니었고 검은색 찰흙같은 이질적인 형태도 아니었다. 심지어 대화가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이름과 원래 소속 교단을 밝히십시오! 그대를 정화하고 다시 여신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도와주겠습니다!”
“흥, 이제 와서? 부질없는 일이구나.”
[속도 체크]
셰이 : 3
카야 : 4
유진 : 7
공포의 수녀: 4
[유진의 턴이 앞서게 됩니다.]
그러나 대화는 너무나 쉽게 끊겼다. 애초에 대화가 아니라 서로 자기 할 말만 했는데 교묘히 맞물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공포의 수녀]
체력 66/66
공격력 4~8
방어력 2
속도 4
피지컬은 별 볼일 없었다. 이미지 상 멘탈리티 공격을 주로 할 것처럼 보였지만, 쉽게 쓰러트릴 수 있는 상대처럼 보였다.
하지만 도저히 괴물이라고 볼 수 없는 저 겉모습이 문제였다. 당장 저 시커먼 로브를 벗기만 해도 카야나 셰이에게 자매님 소릴 하며 안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지금껏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닮은 괴물이라 생각하며 망설임 없이 도끼를 휘둘렀던 내가 처음으로 도끼질이 망설여졌다.
‘사실 세뇌나 잠식 같은 걸 당해서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저렇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도끼로 두개골을 빠개버리면 정화고 뭐고 아무 것도 못하는 게 아닐까? 세일럼 지부에서 봤던 목걸이의 주인도, 저런 식으로 변해있는 건 아닐까?
아니, 당장 눈앞의 여자가 목걸이의 주인이 아니라는 확신은 있나?
“씨발….”
스펙만 보고 마냥 쉽게 생각했던 나는 도끼를 집고 나서야 진정한 난관에 봉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이 흘러 마법횃불이 흔들리고 손잡이에 땀이 차던 그때, 카야의 차분한 목소리가 파고들어왔다.
“대장.”
“어.”
“대장은, 대장의 본분을. 저희는 저희의 본분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별다른 말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묘한 힘을 주었다.
우리들은 신경 쓰지 말고, 네 할 일 해라.
그녀의 말은 내겐 그렇게 들렸고, ‘본분’이라는 단어 덕분에미혹을 떨칠 수 있었다.
‘그래. 지금 당장 내 할일은 바뀌지 않았어.’
설령 저 여자가 목걸이의 주인이라 해도 지금 상태에선 적대할 수밖에 없었으니.
타타타탓-
[대가리 분쇄]
[유진이 공포의 수녀에게 17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49/66]
“꺄아아아아악!”
피부가 갈라지며 피가 튀었다. 피는 선명했고, 비명소리는 더 선명했다. 아무런 메시지도 안 떴지만, 저 비명소리가내 멘탈을 조금 흠집을 낸 것 같았다.
“미개하기 짝이 없는 폭력을 휘두르다니!”
[카야와 공포의 수녀의 속도가 같습니다.]
[속도 굴림]
카야 : 3
공포의 수녀 : 4
[공포의 수녀의 턴이 카야의 턴보다 앞서게 됩니다.]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
공포의 수녀는 피가 주르륵 흐르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원망을 토해냈다. 저 가녀린 몸집에서 나왔다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지독하고 섬뜩한 목소리였다.
[공포의 복음]
“기존의 허망한 믿음이 꺾이고 내면의 공포를 인정하게 되는 그날, 새로운 운명이 열리게 될 지어다!”
“크윽!”
[공포의 수녀가 셰이에게 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공포의 수녀가 카야에게 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공포의 수녀가 유진에게 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광역기를 맞았지만 전부 0 데미지였다. 공포의 수녀의 낮은 공격력과 전체적으로 올라간 용사대의 방어력 때문이었다.
[공포의 속삭임이 용사들의 정신을 갉아먹습니다.]
[셰이 멘탈리티 –11]
[카야 멘탈리티 –8]
[유진 멘탈리티–10]
허나 예상대로 공포의 수녀의 공격은멘탈을 뒤흔들었다. 고작 10 내외 정도 깎인 게 뭔 대수냐고 할 수 있겠지만….
“정신, 정신 차리십시오! 그릇된 믿음을 떨쳐내십시오! 제발!”
“그만둬요! 정말로 믿음을 저버린 거예요?”
“한줌의 빛으로 공포를 막을 순 없는 법이니, 불신자들이야말로 헛된 방해는 그만두고 쓰러지거라!”
내가 겉모습 때문에 도끼질을 망설였듯, 동료들은 공포의 수녀의 공격 행위 그 자체에 충격을 받고 있었다.
“강제로, 타락한 게 아닐 수도 있단 말입니까….”
이세계에서 사제든 수녀든 성전사든 신의 길을 걷는 자들이 되기 위해선 공통적으로 몇 년 이상의 고된 수행과 굳건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육체와 정신. 그 양쪽이 갖춰져야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길’을 걷는 자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금의 공격으로, 저 수녀가 ‘강제로’ 타락되어버린 것이 아닌가하는 기대가 깨져버린 듯 보였다. 철퇴를 쥔 카야의 손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카야.”
“…예.”
“어쩌면, 한 명이 아닐 수도 있겠어.”
카야는 이를 악물었다.
“이럴 수밖에 없는 어리석은 딸을 용서해주십시오, 라엘라시여.”
잠시 라엘라님을 향해 짧은 기도를 읊던 그녀는 모든 망설임을 내버린 채 그 어느 때보다도 흉포한 기세로 철퇴를 휘둘렀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통렬한 일격!]
[카야가 공포의 수녀에게 24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25/66]
[공포를통렬히 물리치는 일격에 용사들의 마음속에 희망이 차오릅니다.]
[셰이 멘탈리티 +3]
[카야 멘탈리티 +3]
[유진 멘탈리티 +3]
“아아아아악!!!”
아니야.
아니라고.
‘공포’를 통렬히 물리치는 일격에, 용사들의 마음속에 ‘희망’이 차오르고 있다고?
이게? 어딜 봐서?
앞뒤 안 따지고 보면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 셋이서 괴롭히는 그림인데?
저게 진짜 공포에 물든 괴물이라면, 어째서 괴물을 공격하는 우리가 더 괴로운 거냐고. 어?
치명타를 적중시킨 카야나, 그걸 확인한 나 모두 전혀 기쁘지 않았다. 카야는 굳은 표정으로 목걸이를 매만지고 있었다.
이제 셰이의 턴이었다. 셰이를 쳐다봤다. 그녀는 반쯤 뭉개진 얼굴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공포의 수녀를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통하게 외치던 그녀는 없었다.
이단.
철컥-
짧은 중얼거림. 그리고 흉흉한 기세를 발하는 클레이모어를 들고 자세를 취하던 셰이가 고개를 뒤로 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딱딱한 어조로 ‘명령’을 부탁했다.
“명령을, 내려주세요. 대장님.”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당장이라도 폭언을 내뱉을 것 같은,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 같은… 그런 복잡한 감정을 꾹꾹 눌러담은그녀의 바람대로 명령해주었다.
“정의의 ‘심판’을.”
“…네. 대장님.”
맹렬히 쇄도했던 카야와는 다르게 셰이는 그어느 때보다 차분히 걸어갔다. 저벅저벅저벅 그녀의 부츠 소리가 꼭 카운트다운을 세는 것 같았다.
스스로 ‘이단’이 되어버린.
‘금단’을 저지른수녀에게 찾아올 죽음의 카운트다운을.
“버러지같은년. 공포에게도버림받을년. 누구를섬길자격도없는년.”
서걱-
[정의의 심판]
**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셰이의 정의의 심판은 기절을 먹였고 다음 라운드에 무난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노피격은 아니었지만 결과만 보면 노피격에 가까웠으니 원래라면 성장을 기뻐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이었지만.
“….”
“….”
분위기는 씹창난 상태였다. 이게 만약 이단놈들의 작전이었다? 감히 박수를 보낸다.
‘검게변형된 목걸이가 걸려있었어.’
걸레짝이 되어버린 ‘이단’ 수녀는 목걸이의 주인은 아니었다. 시체에서 그걸 확인한 순간 애써 덤덤한 척 했던 카야와 셰이의 얼굴이 일그러진 건 꿈에 나올까 무서울 정도였다.
공포 숭배자로 타락했으면서 그 목걸이를 지니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교단에 있던 목걸이는 시체가 지닌 목걸이보다 더 심하게 변형되어 있었는데, 그렇다면 목걸이의 주인은 지금 어떤 상태일지 안봐도 뻔한 것에 대한 분노.
분노는 중첩되었지만 당장 그걸 해소할 방법이 없었고, 그렇기에 그녀들이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짙은 분노가 사방팔방 퍼지고 있었다.
‘근데,그 목걸이는 어째서?’
어설픈 애정표현이나 위로는 역효과 날 것 같아서 나는 조용히 따라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정예 괴물로 나타난 타락 수녀마저 목걸이를 끼고 있었는데, 그 목걸이는 어째서 교단에 있는 것인지.
이미 죽었는데 우연히 발견?
아니면.
‘일부러 흘렸다든가?’
첫 번째 가정이 맞다 치면 거기서 더 뻗어나가지 못하고 또 의미가 없으니 두 번째 가정이 맞다고 여기고 다시 고민.
왜? 어째서?
어째서 공포 숭배자새끼들은 타락 수녀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검게 물들은 목걸이를 교단에 흘렸을까? 꽁꽁 숨고 숨어서 던전까지 숨어버린 놈들이 수두룩한 마당에?
그럼 던전 말고 여기에 있는 놈들은 뭐하는 놈들이지? 무슨 중대한 목적이 따로 있는 건가?
수녀를, 아니 수녀들을 납치한 것이 그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흘렸다 일부러 흘렸다. 교단에게 발각될 것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흘렸다….
설마.
수녀들을 ‘더’ 납치하기 위해서, 일부러 흘렸다? 유인하려고?
내가 생각해도 꽤나 그럴싸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옳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서 난 조금 더 고민하다가 동료들에게 내 상상을 공유했다.
“그렇다면 그 목걸이는 세일럼 지부의 파견단조차 타락시키기 위한 미끼였다는 셈입니까?”
“내 상상이 맞다면.”
“그렇다면 목걸이의주인은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게 됐네요. 더 검게 물들어있었으니 아까 그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테니,이제부터 최우선 수색목표는 파견단으로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 아직 확신하기엔 이르지 않을까. 목걸이의 주인은 정말로 강제로 타락됐을 가능성도.”
“아니요. 아. 그랬을 가능성도 물론 있어요. 하지만.”
셰이가 웃었다.
섬칫한 미소였다.
“타락당해버릴 만큼, 그년의 믿음이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려고요.”
“셰이.”
“결국 굴복해서 타락해서 이단이 된 거고, 우린 이단이 아니잖아요. 그럼 명백하잖아요? 우리가 고통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싫어요.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요? 그러니까 차라리 그렇게 생각할래요.”
그녀를 말리려던 카야가 입을 다물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대장님 말이 맞다고 한다면, 더더욱 그렇게 생각해야 해요. 자의로 타락했든 타의로 타락당했든 이단놈들이 이용하기 위한 거잖아요? 원래라면 천천히정화하는 게 맞지만, 그게 불가능하면… 그놈들이 무슨 짓을 하지 못하게 후환을 미리 없애는 쪽이 맞다고 생각해요. 아니에요?”
“….”
“네?”
세스티아가 원했던 그림이었을까? 그건 아니겠지. 하지만 셰이의 의견을 마냥 뿌리칠 수는 없었다. 타락 수녀들을 바로 칼같이 이단으로 자르고 모조리 척살해버리자는 의견이 과격하게 들리긴 하지만, 그게 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게 골 때렸다.
단순한 호기심은 아니었다.
큰 사건.
그리고 큰 보상.
간질간질했다.
‘일단은, 더 들어가보자. 감당 못할 낌새가 보이면그때 튀어서 여태껏 겪은 것들을 보고하기만 해도 나름 인정받을 테니까.’
“…따스한 자애와 냉철한 관용을.”
우린 목걸이만을 회수하고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카야의 기도 한 구절만이 덩그러니 남은 시체를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