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이단의 성녀, 금단의 수녀(10)
“씨발…!”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 몇 번이나 소름을 돋는지 까먹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데, 어떻게 적응되지가 않았다.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움직임을 보이며 우릴 그 검은 눈깔로 동시에 쳐다보는데… 어떤 수녀는 우릴 보기 위해 목이 180도가 돌아가있었다. 욕지기가 났다.
황급히 동료들을 살폈다. 그녀들도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 듯 했다. 심지어 평소 같았으면 입에 담기 힘들 폭언을 마구 쏟아냈을 셰이마저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베스티아… 리베아… 유리에… 아일리….”
세스티아는 수녀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는 게 꼭 현 상황을 믿을 수 없는 것처럼 취급하려는 것 같았고, 카야는 철퇴 손잡이를 으스러져라 잡고 있는 중이었다.
안 된다.
나는 애써 가면 쓴 남자에게 시선을 맞추며 소릴 질렀다.
“이게 무슨 개짓거리야!”
“흐음. 흥미롭지 않습니까? 이들은 원래 각자의 굳건한 믿음을 가진 사제와 수녀들이었습니다. 각자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예를 들면 자애와 관용의 라일라라든지 빛과 정의의 유스티티아라든지 전쟁과 승리의 테네치아라든지. 각자가 추구하는 바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섬기는 이를 제일로 추구하고 따르고 믿는다는 점이 있습니다.”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아니라 신들이시자 그 개념들 그 자체이시다! 그분들이 계시기에 이 땅 위에 수많은 덕목들이 존재하는 것! 뒤틀린 믿음으로 그릇된 것을 숭배하는 자가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내뱉는구나!”
“오. 그럴싸한 발언입니다. 물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계획은 거의 끝이 났고 당신들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 아니지. 거기, 특등석에서 새로운성녀님의 탄생을 지켜보시길.”
“성녀님? 누구 마음대로 내 자매를 이단의 성녀라고 부르는 거냐!”
“그 어떤 것보다 기나긴 ---- --님을, 깊숙한 던전 속이 아닌 지상에서 잠시나마 배알할 수 있게 해줄 여성에게 성녀라는 호칭보다 더 적합한 게 있습니까? 성스럽다는 표현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 능멸을…!”
평소의 자애로운 말투가 완전히 사라진 세스티아가 가면 남자를 호되게 질책했으나, 애초에 정상적인 대답을 바랄 상대가 아니었다. 이미 카야와 셰이는 정신이아득해지는 상황에서도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세스티아.”
“헨드릭님.”
“어차피 말로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도, 상황도 아냐.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게 뭐지?”
“….”
세스티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한 차례 중앙의 원판 쪽을 쳐다보더니 이를 악물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도 말없이 도끼를 들어올렸다. 전투태세준비가 끝났다.
“이런. 자칭 신실한 분들께는 자극이 너무 심했던 것 같습니다. 다음엔 조금 더 오래 즐기실 수 있게 신경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딱-
“다음 기회가 있다면, 말이지만.”
가면 남자가 손가락을 튕긴 순간, 우릴 쳐다보기만 하던 타락 수녀들과 사제들이 천천히 우리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우어어 소리만 안 났지 흡사 좀비들 같았다.
[속도 체크]
셰이 : 2
카야 : 4
유진 : 7
세스티아 : 4
공포의 사제1 : 3
공포의 사제2 : 3
공포의 수녀1 : 4
공포의 수녀2 : 4
[유진의 턴이 앞서게 됩니다.]
‘미친.’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던 순간, 어딜 도망가냐는 듯 어느새 전투가 시작되어버렸다. 어림잡아도 열 명은 넘어 보이는 그들이, 느릿느릿 우릴 사방에서 포위했다. 당연히 퇴로 따윈 없었다.
아무리 저놈들이 피지컬이 약하다지만, 열이 넘는 정예괴물과 전투라니.
하, 하하하.
선 씨게 넘네?
“대장님!”
“어쩔 수 없어! 하나만 생각해!”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뒤를 생각할 수 없었다. 라엘라 교단의 전투단을 비롯해서 타 교단이 코빼기도 안 보이니, 저들을 다시 원래 신들의 품으로 되돌리는 건 불가능한 일.
‘우리도 저 목걸이 때문에 올 수 있었지. 그렇다면 타 교단 전력들은 계속 그 루프에 휘말리고 있을 확률이 높다. 저 미친 짓거리를 멈출 수 있는 전력은 사실상 우리 용사대밖에 없어…!’
그 와중에 셰이의 속도가 1 더 내려간 것을 보고 멘탈리티를 체크했다.
[멘탈리티]
셰이 : -60
카야 : -49
유진 : -43
세스티아 : -40
‘씨발….’
다섯 번의 루프를 더 거치면서 멘탈리티가 전체적으로 더 하락해있었다. 특히 셰이는 –50미만으로 떨어져서 부정적 특성인 ‘의존’이 발동된 상태라 속도가 1 더 떨어졌고, 무엇보다 적들은 멘탈 공격을 주로 펼친다는 점에서 상황이 더 나빴다.
셰이가 방어력이 높아도, 세스티아가 힐이랑 보호막을 잘 걸어줘도 멘탈리티 폭격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이건 음유시인이 와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셰이가 잠식당하는 건 기본 전제로 깔고 간다. 체력이라도 온존해야 돼.’
상황이 더 나빠져서 카야, 그리고 나까지 잠식당하는 건 이미 각오하는 바였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선 세스티아만큼은… 절대로 잠식당해선 안 됐다.
‘나는 3열의 수녀를, 카야랑 셰이는 1열에 있는 사제를 공격하면 되겠어.’
낙인은 박지 않는다.
일일이 낙인을 박으면서 싸우기엔 쓰러뜨려야 할 적이 너무 많았다.
스읍- 후우-!
[대가리 분쇄]
팽팽한 대치는 내가 3열에 서 있는 수녀를 향해 도끼를 휘두르며 깨졌다.
[유진이 공포의 수녀1에게 9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57/66]
“어…?”
[카야와 세스티아와 공포의 수녀1, 2의 속도가 같습니다.]
허나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데미지가, 내 뒤통수를 거하게 강타했다.
[속도 굴림]
카야 : 4
세스티아 : 5
공포의 수녀1 : 3
공포의 수녀2 : 3
[세스티아의 턴이 카야의 턴과 공포의 수녀1, 2의 턴보다 앞서게 됩니다.]
[카야의 턴이 공포의 수녀1, 2의 턴보다 앞서게 됩니다.]
그러나 턴은 이미 넘어갔다. 내가 무슨 기분을 느끼든 말든 속도 굴림은 발생했다. 천만 다행이도 카야와 세스티아 둘 다 굴림에서 이겼지만, 눈앞이 깜깜한 건 마찬가지였다.
극단적임(공격력의 밸런스가 낮아짐).
전 공격은 맥뎀 치명타였는데 이번 공격은 민뎀에 가까운 평타라니… 이런 상황에서 민뎀이 뜨자 그 특징이 유달리 뼈아프게 다가왔다.
“라엘라시여, 부디 저희들을 보호해주소서.”
[보호의 요새]
[세스티아가 모든 용사들의 체력을 2 회복시킵니다.]
[세스티아가 모든 공격을 우선해서 받아내는 보호막을 생성합니다.]
[보호막 남은 체력 8/8]
일단 세스티아에겐 보호의 요새를 부탁했다. 저들의 공격이 약한 편이라고는 해도 가랑비에 옷 젖는 건 막아야 했다. 최소한 체력이라도 온존해야 했다.
“카야.”
“예. 대장.”
적을 처치하면 바로 빈자리를 채우는 방식인지, 아니면 넷을 다 처리하면 그때야 새로 넷이 들어오는 방식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률은 낮지만 적을 즉사시킬 수 있고 심지어 재행동까지 부여받을 수 있는 카야라면. 그녀라면 현 상황에서 또 한 번의기적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안 돼. 가뜩이나 혼란스러울 텐데 부담감까지 왕창 줄 순 없어. 그럼 될 것도 안 돼.’
나는 믿는다고 말하는 대신,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네 목표는 제일 앞의 사제야.”
“…예. 대장.”
카야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곤 평소와는 다르게 적당한 속도로 달려가 적당히 철퇴를 휘둘렀다.
‘적들이 많으니까 힘을 배분하려는 건가?’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위대한 일격!]
[카야가 공포의 사제1에게 23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46/69]
[용사들의 마음속에 희망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3]
[카야 멘탈리티 +3]
[유진 멘탈리티 +4]
[세스티아 멘탈리티 +3]
“흐으아아아악!”
허나 결과까지 적당하진 않았다.
첫 공격부터 치명타를 터뜨린 카야는 아무런 감흥 없이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철퇴를 비스듬하게 들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평정심을 갖춘 그녀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평정심을 갖게 됐지만… 이어지는 적들의 공격에 평정심이 깨질 수밖에 없었다.
[공포의 복음]
[공포의 복음]
[공포를 받아들여라]
[공포를 받아들여라]
자비 없는 4연속 멘탈리티 공격은, 아무리 예상도 했고 각오도 했다 해도 직접 당하는 입장에선 굉장히 좆같았으니까.
[멘탈리티]
셰이 : -69
카야 : -57
유진 : -51
세스티아 : -57
운 좋게 수녀2의 공격이 미스가 뜨긴 했지만, 개빡치는 건 좆제놈들이 세스티아를 집요하게 노렸다는 점이었다. 현 상황에서 내가 제일 보호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냈다는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세스티아를 향해 공포를 우겨넣은 것이다. 세스티아는 괜찮다며, 겨우 이런 것들로 자신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며 웃어보였지만… 그걸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쓰레기만도못한이단으로타락한것도모자라서…!!”
“셰이. 진정해.”
“….”
[셰이 멘탈리티 –4]
셰이가 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저게 나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순간 흠칫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셰이야. 아직 적들은 많아. 카야가 그랬듯, 벌써부터 확 타오르면 안 돼. 페이스를 조절해야 한다고.
‘그 기세, 지금은 응축하고 있자.’
[성전사의 집념]
[셰이가 성전사의 집념을 발동합니다.]
[3턴 간, 절대로 뒤로 밀려나지 않습니다.]
[셰이의 속도가 1 증가합니다.]
[셰이의 체력이 매 턴 1 회복됩니다.]
[피격시 단 1회에 한하여 1회 반격할 수 있습니다.]
[남은 체력 20/20]
[반격 1]
셰이는 순순히 내 말에 따랐다. 당장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았던 분노를 어떻게 해서든 갈무리했다. 후욱 후욱 내뿜는 숨에 분노가 가득 담겨있었지만, 미친년처럼 굴진 않았다.
그렇게 막턴이었던 셰이의 턴이 끝났다. 라운드가 돌고, 선턴이었던 내 턴이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도 그딴 쓰레기 데미지를 띄울 순 없어.’
저번 턴엔 내 간절함이 부족했나?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엔 지금 공격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담았다. 이번 공격으로 나 아니면 저년이 죽는다는 각오를 담았다.
거기에 나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생사까지 갈린다고 생각했다. 존나 셀프로 부담감을 중첩시켰다. 순간 땀 때문에 도끼를 미끄러뜨릴 뻔했다. 만약 그랬다면 정말 웃기지도 않을 이야기였다.
‘낙인이 없으니 치명타가 뜬다 해도 죽이진 못하겠지.’
[대가리 분쇄]
그래도.
“아아아아악!!!”
[파괴적인 일격!]
[유진이 공포의 수녀1에게 39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8/66]
[파괴적인 일격에 공포마저 잠시 물러납니다.]
[셰이 멘탈리티 +4]
[카야 멘탈리티 +4]
[유진 멘탈리티 +5]
[세스티아 멘탈리티 +4]
연속된 멘탈 공격 때문에 침체된 분위기 정도는 반전시킬 수 있었다.
“할 수 있어. 차분히, 한 명씩 한 명씩. 자신을 믿고 동료를 믿고.”
휙 도끼에 묻은 핏물을 털어냈다. 촤악 흩뿌려진 핏물이 셰이 앞쪽에 사선을 그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건 꼭 경계를 표시한 것 같았다.
이 선을 넘어오면 여기에 네놈들의 피로 덧칠해버릴 거라는 섬뜩한 경고.
물론, 그 경고는 우리한텐 해당사항이 없었다.
“세스티아.”
“네, 헨드릭님.”
“카야에게 자애의 손길을.”
“…헨드릭님이 아니라요?”
“어. 카야에게.”
처음으로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던 세스티아는 곧 눈을 감고 집중했다.
“라엘라시여. 당신의 따뜻한 손길을 잠시나마 흉내 낼 수 있게 허락해주시옵소서.”
[자애의 손길]
[세스티아가 카야에게 상태이상 ‘따스한 자애’(3턴)를 부여합니다.]
[카야의 공격력이 3 상승합니다.]
[‘공포’가 붙은 괴물들을 상대로 데미지가 15% 증가합니다.]
[치명타 확률이 증가합니다.]
[괴물을 처치할 시 속도가 1 증가합니다.]
세스티아가 보유하고 있던 4스킬, 자애의 손길(물리)이 자애의 길을 걷고 있는 전투 수녀에게 끼얹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