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이단의 성녀, 금단의 수녀(13)
방금 전에 카야와 세스티아에게 심한 욕을 했지만, 턴을 아예 날려버린 셰이를 욕할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냥 진짜 이제 모르겠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무기력함이 내게도 옮은 것인지, 아니면 그때와는 다르게 각성 상태가 아니라 나도 잠식 상태라 그런지. 정말 순간이었지만, 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안 되지 안 돼. 못 해본 게 얼마나 많은데. 이런 데서 뒤질 순 없지.’
정말안 될 말이었다. 포기한다는 생각은 바로 포기했다. 꼭 살아서 카야와 셰이에게 K-푸드의 맛도 보여주고, 더 롱 테러도 플레이시켜보고, 현대 지구의 문물도 소개해주고, 돈 벌어서 좋은 집으로 이사 간 다음 온종일 섹….
‘나도 참, 드러나지만 않았지 원래부터 미친놈이 아니었을까. 섹스에 미친놈. 방구석아싸라서 몰랐던 건가.’
그래도 이성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아직까진 괜찮은 것 같았다. 섹스티아처럼 ‘무절제’해버린 게 아니라, 정신이 다소 ‘혼란’한 상태인 것뿐이니 아직은 괜찮지 않을까?
도끼를 치켜들었다. 도끼는 한 번도 사용 안 한 것처럼 깨끗했다. 저 가면놈이 도끼에 묻은 핏물까지 빨아간 듯 했다.
목표는 어쩔 수 없이 가면놈.
나는 도끼를 휘두르며, 놈에게 다시 한 번 낙인을 찍었다.
[유진이 공포의 대제사장 핀들리에에게 1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246/248]
[낙인은 3턴 간 유지됩니다.]
[낙인이 유지되는 한, 모든 물리적 데미지가 25% 증폭됩니다.]
가뜩이나 피통돼지인 괴물들에겐 낙인은 필수였다. 그래서 선턴잡이인 내가 첫 턴을 낙인으로 소모하는것까지는 뭐 어쩔 수 없는 거였다. 하지만 평균 딜이 가장 높은 내가 두 턴이나 낙인으로 턴을 소모한다는 건, 정말 뼈아픈 전개였다.
‘체력도 체력이고 방어력도 7이나 돼.’
턴이 넘어갔다. 우리 용사대의 시선을 강제로 끌어 모은 가면놈이 우릴 보고 다시 쪼갰다. 좆같았다.
[카야와 공포의 대제사장 핀들리에의 속도가 같습니다.]
하지만 카야의 제멋대로 절정이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발휘해 가면놈과의 속도 굴림을 이끌어냈다.
[속도 굴림]
카야 : 4
공포의 대제사장 핀들리에 : 4
이걸 카야가? 이런 깊은 뜻이?
[속도 굴림]
카야 : 3
공포의 대제사장 핀들리에 :4
[공포의 대제사장 핀들리에의 턴이 카야의 턴보다 앞서게 됩니다.]
응… 그럼 그렇지. 왜 기대했지?
“씨발 뭘 쪼개 병신새끼야.”
“이런 저급한 낙인도 다 찍혀보고, 얼마나 다양한 경험입니까.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더 그렇게 발버둥 쳐보십시오.”
그나마 카야가 속도 굴림을 이겼다면 그녀의 전턴도 의미가 있었겠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고, 가면 놈은 과장된 몸짓으로 팔다리를 이리저리 휘적거렸다. 조롱의 의도가 물씬 풍겼다.
[내 귀를 피할 수 없다]
[공포의 대제사장 핀들리에가 필청(必聽)의 공포를 뿌립니다.]
[전 용사대가 상태이상 ‘심신미약’(1턴)에 걸립니다.]
[셰이 멘탈리티 – 6]
[카야 멘탈리티 –5]
[유진 멘탈리티 –5]
[세스티아 멘탈리티 –5]
하지만 그런 과장된 동작은 기분만 더럽게 할 뿐이었지만, 그 동작 속에 숨은 날카로운 비수는 날 섬뜩하게 했다.
‘심신미약… 시발, 저 새끼 다음 턴엔 무조건 공격하겠다는 거 같은데.’
상태이상 심신미약은 쉽게 말해서 모든 데미지에 추뎀을 받는 상태였다. ‘모든’ 데미지엔 당연하게도 멘탈리티 데미지도 포함이었다.
‘도발도 광역도발, 디벞도 광역디벞. 그럼 설마 공격도 광역기….’
좆같은 공포포기무새관음증씹변태새끼.
던전 깊숙한 곳에나 처박혀 있을 것이지, 그렇게나 지상에 강림하고 싶었나? 그것도 여자 몸에? 어? 성스러운 보지로 자위라도 하고 싶었어?
뭐? 세상 모든 곳에 공포 없는 곳은 없다고? 하, 말돌리네 변태새끼가.
내가 아무리 최고난도를 픽한 상태에서 여기에 휘말렸다고는 하지만, 원래부터 더 롱 테러가 좆같은 게임이긴 했지만… 이건 고난도에서 더 어렵다는 수준이 아니라 그 이상의 좆같은 악의가 날 괴롭히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잠식 상태여서, 차라리 이 모든 게 다 내 피해망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카야.”
“….”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대답도 안 하고.”
“대장, 저도 나중에….”
“뭐?”
“…아뇨. 아무 것도 아닙니다.”
카야는 찝찝하기 짝이 없는 말을 내뱉고는 터덜터덜 앞으로 나아갔다. 페이스 배분을 위한 것도 아니고, 평소의 폭발적인 스프린트도 아니었다. 그 뒷모습에선 지친 느낌 혹은 시무룩한 느낌이 대놓고 보였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카야가 공포의 대제사장 핀들리에에게 9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237/248]
“죄송, 합니다.”
“….”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네가 지금껏 띄운 치명타가 몇 번이고 즉사기가 몇 번인데. 그렇잖아? 잘 쳐줘봐야 2티어급이라고 생각했었던 내 최초의 생각을 보란 듯이 비웃을 정도의 맹활약을 보여줬잖아. 그런 네가 뭐가 미안해. 트롤링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평타를 띄웠을 뿐이잖아. 방어력 버프 받은 보스놈에게 9 정도면 나쁘지 않은 데미지야. 저놈의 체력이 248이 아니었다면 말이야. 철퇴 한방에 안면이 뭉개지고 반피 까버리는 건, 네가 강한 것도 있겠지만 그놈들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도 있었다고.
수많은 위로의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존나, 현 상황에선 하등 쓸모없었으니까.
‘아니, 아냐. 그냥, 어설프게 위로했다가 카야가 죄책감만 더 심하게 느낄 거 같으니까….’
정말로?
‘뭐?’
내 지시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한카야가 귀찮아서가 아니고? 실망해서가 아니고?
‘닥쳐.’
무시했다는 표현이 맞을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시했다. 절대 내 마음의 소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악마의 속삭임이라 생각했다. 카야가 귀찮다고? 실망스럽다고? 그럴 리가 없잖은가.
“하아, 헨드릭님….”
“셰이한테 자애의 손길 걸어.”
“하으….”
“지금 당장!”
“네, 네!”
[세스티아가 셰이에게 상태이상 ‘따스한 자애’(3턴)를 부여합니다.]
[셰이의 공격력이 3 상승합니다.]
[‘공포’가 붙은 괴물들을 상대로 데미지가 15% 증가합니다.]
[치명타 확률이 증가합니다.]
[괴물을 처치할 시 속도가 1 증가합니다.]
계속 달라붙는 세스티아의 옆가슴을 후려쳤다. 중갑을 입은 카야와 셰이, 경갑을 입은 나와는 다르게 세스티아는 수녀복을 입고 있어서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녀는 맞은 부위를 감싸며 지시를 따르긴 했지만, 그 와중에 카야의 멘탈리티가 떨어졌다. 반대로 세스티아의 멘탈리티가 소폭 상승한 건 씨발 어처구니가 없었고.
점점 더 ‘무절제’하는 세스티아와 ‘집착’하는 카야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년들이 더 맛이 가서 자멸하기 전에 전황을 바꿔야 했다.
그래서 나는, 세스티아의 턴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결단을 내렸다. 멀쩡한아티팩트를 칸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셰이의 속도 1 때문에 파괴한다는 게 피눈물이 흐를 것 같았지만, 어쩌겠나. 뒤지는 것보단 나았다.
“아티팩트, 부조리한 저항의 신념을 파괴한다.”
[아티팩트 ‘부조리한 저항의 신념’이 파괴됩니다.]
머릿속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셰이를 옥죄고 있던 무형의 기운이 살짝 흩어진 것 같았다. 부조리한 저항의 신념이 파괴되면서, 그게 갉아먹고 있던 셰이의 속도 1이 돌아온 것이다.
속도 0과 1. 그건 단순한 1 차이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무기력 디버프 때문에 턴을 포기할 확률이 존재했던 셰이에게 얹어진 속도 0 디버프 ‘모든 행동에 역보정이 가해진다.’는, 사실상 그녀를 유령으로 만드는 거나 다름없었다.
자리만 차지하지, 높은 확률로 아무 것도 안 하고 턴을 넘길 테니까.
지금 상황에서 그녈 그대로 놔둔다는 건 전투를 포기하겠다는 말이었다.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가 희생양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가 턴을 넘깁니다.]
[공포의 성녀가 활동하기까지 1턴 남았습니다.]
[남은 체력 237/248]
그 사이 베스티아의 턴까지 지나갔다. 뭐 한 것도 없는데 벌써 1턴 남았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가면 새끼는 여전히 실실 쪼개고 있고, 베스티아를 둘러싼 암적색 빛은 더욱 위험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셰이! 일어나!”
“대장, 님…?”
“일어나라고! 맞서 싸워야 할 거 아냐!”
“아.”
“여기까지 오려고 우리가 그 고생을 치러왔던 거잖아! 근데 여기서 주저앉으면, 말짱 꽝이라고!”
“아아.”
“셰이!”
“알아요. 알고 있어요. 그만 말해도 돼요.”
셰이가 비틀거리며일어났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엔 이미 분노와 자신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자리엔 ‘승산 없는 싸움.’에 임하는 무기력한 여자 한 명이 서 있을 뿐이었다. 자기가 일어선 건,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듯 했다.
내가 뭣 때문에 아티팩트도 파괴했는데. 내가 널 받아들이려고, 널 케어하려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
나는 거칠게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1분 1초가 아까웠지만 저 표정과 태도를 보고 이 말을 안 꺼낼 수가 없었다.
“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이제 나 아니면 안 된다고, 나 같은 남자는 어디에도 없다고!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근데 벌써부터 그렇게 무기력하게 있을 거야? 네 목표는 그렇게 쉽게 포기해도 될 정도로 가벼운 거였어? 네가 그렇게나 증오하던 이단! 그것도 지금껏 만나본 놈들 중에 가장 높아보이는 놈이 눈앞에 있잖아!”
“….”
“네가 간절히 원하던 남자가! 네가 간절히 원하던 대장이 말하고 있잖아! 일어나라고! 맞서 싸우라고! 우릴 지켜주라고!!!”
“….”
“내가 바라는 운명의 끝은 결단코 여기가 아니고! 내가 바라는 진짜 운명의 끝엔 네가 함께 있을 거야! 언제까지나, 어디까지나! 그러니까…!”
클레이모어를 쥔 셰이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난, 우리는… 셰이, 네가 없으면 안 돼.”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제자리로 돌아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고, 베스티아가 깨어날 때 그만큼 가중치가 더 붙겠지. 그래도 셰이를 자극하는 건 꼭 필요한 행위였다고 판단했고, 후회하지 않았다.
이젠 순전히 셰이의 정신력에 달려있었다.
‘셰이. 천재 셰이. 아름다운 셰이. 착하고 배려심 있는 셰이. 듬직한 셰이. 그리고 용맹한 셰이.’
셰이가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최소한 턴을 포기하진 않았다는 것에서 일단 안도했다. 자극이 효과가 있었다.
이제 중요한 건 얼마만큼의 데미지를 입히느냐였다.
셰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가면의 남자를 무시했다. 그녀의 시선은 잠시간 허공에 떠 있는 베스티아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지금 베스티아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기분일까?
사지를 찢어죽일 정도의 증오심? 동정심?
모르겠다.
다만, 셰이의 클레이모어에서 은빛 광채가 나오기 시작했다. 광채 중 반은 새로운 칼날이 되어 기존의 클레이모어에 이어졌고, 나머지 반은 허공에 뻗어 거대한 천칭이 되었다.
그녀가 펼친 건 1스킬, 정의 집행이었다.
[정의 집행]
“Stat lux caelum et(만면에 빛과)….”
그런가.
그저, 자신의 정의를 집행할 뿐이라는 건가.
“justus justitia(공정한 정의를).”
은빛 광채를 머금은 클레이모어가 천칭의 쇠사슬을 잘라냈다. 순식간에 추락하는 천칭의 존재에, 시종일관 조소를 내보이던 가면놈의 입가가 굳어져있었다. 꽤나 당황한 듯, 고개를 치켜든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놈이 그러거나 말거나, 셰이의 정의가 공포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콰아아아앙-!!!!
[파멸적인 일격!]
[셰이가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에게 28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209/248]
[셰이가 공포의 대제사장 핀들리에에게 22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87/248]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가 용사들의 마음속에 다시금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7]
[카야 멘탈리티 +7]
[유진 멘탈리티 +8]
[세스티아 멘탈리티 +8]
그녀의 정의는.
굉장히 강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