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이단의 성녀, 금단의 수녀(16)
깜깜하다. 그리고 혼자였다.
‘팔다리는?’
움직인다. 그리고 아프지 않았다.
‘베스티아는?’
안 보인다. 가장 기나긴 공포가어찌고저찌고 하더니 ‘공포 현현’이라는 스킬 이름이 나타난 것까지는 기억이난다.
‘공포 현현? 존나 중2같네.’
주인공한테 Hendrik the Terrorhunter라는 이름을 붙였던 내가 할 생각은 아니긴 한데… 공포새끼, 혹시 나랑 동류는 아닐까?
존나 실없는생각이었다. 나도 모르게 공포라는 걸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으니,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사람이라고 못 될 것도 없지.]
‘씨발 깜짝이야.’
[보통은 이렇게 뜻을 전하기도 전에 이성을 잃고 미쳐버린다만, 괜히 첫 번째구역을 통과한 게 아니라는 건가. 지금도 이미 반쯤은 잡아먹힌 상황이거늘.]
‘관음증공포포기무새 새끼가 아무리 지껄여봤자지. 평생 그렇게 멀리서 백번 천번 속삭여봐라. 통하나.’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던 수많은 성직자들도, 경험 많은 용사들도 끝내 견디지 못했었다. 너라고 다를 줄 아나?]
‘다르지. 그건 그쪽도 잘 알 거 아냐. 왜. 쫄려?’
[태풍이 인간을 무서워하나. 홍수가 인간을 무서워하나. 지진이 인간을 무서워하나. 네 질문은 그와 같다.]
‘자기가 자연재해급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거 같은데, 적어도 그것들에게는 의지가 없지. 그저 자연현상일 뿐 숭배 대상도 아니고. 존나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멍청한 새끼네 이거.’
[피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다.]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건 인정하지만, 공포는 아닌데? 피할 수 있는데? 극복할 수 있는데?’
[한 번 저항에 성공했다고 해서, 그것이 끝인 줄 아는 것인가.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쳐발려놓고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한 게 아니라고 입 터는 건가. 와. 아까 그 가면새끼 갑자기 존나 불쌍하지네. 이딴 새끼를 진심으로 숭배하고 있다니.’
그래. 고통 같은 것만 없으면, 입 터는 것 정도야 어려운 것도 아니지. 키보드 워리어를 무시하지 말라고.
‘보여줄 거 있으면 보여주고 할 말 있으면 지껄이고 빨리 꺼지지? 공포 현현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등장했는데, 웬 꼰대 아저씨가 꼰대 냄새 풍기는 거 같네.’
[광오하군. 그렇기에 필멸자인가.]
‘뭐래는 거야. 언젠 필멸자라면 기본으로 가지고 있는 공포를 받아들이라고 그렇게 지랄할 땐 언제고.’
한동안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뿌듯했다. 뭐 대단한 업적은 아닌 거 같지만 이렇게라도 1승을 챙겼으니까.
‘…어?’
언제나 그렇듯, 변화는 갑자기 찾아왔다.
‘뭐야.’
눈을 감았다 뜨니 세상이 달라져있었다. 어렸을 적 살았던 집이라는 이름의 감옥이었다. 익숙한 방 넓이,익숙한 바닥, 익숙한 방 구석, 익숙한 문.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주위를 살폈다.
씨-발.
트라우마 조지네.
‘또 환상?’
환상이라기엔 예전 외길 통로에서 봤던 환상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땐 그래도 내가 환상의 관찰자라는 자각이 있었다. 엄청 현실감 넘치는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악몽이랑도 달랐다.
그래. 마치 엄청 정교한 VR게임을 하면 이럴까 싶었다.
‘이건 또 뭔 개수작이야! 이딴 거 안 통한다는 거 아직도 몰라? 그렇게 학습능력이 없어?’
꼭 겁먹고 짖어대는 개가 된 기분이었다. 그저 이 공간이튀어나온 것만으로, 어쩔 수 없이 위축되는 게 있었다. 이 좆같은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방문을 잡았다.
‘….’
잡고 밑으로 내리고 당기면 되는, 그런 흔한 문 손잡이였다. 그런데 열리지 않았다.
‘씨발… 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
아니, 열리지 않는 게 아니었다. 손이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 문을 함부로 열면 안 된다는 낙인이 몸과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지워졌다고, 흐릿해졌다고, 덮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도 낙인은 지금도 날 옥죄고 있었다.
‘씨발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새삼 내가 그 때 그 장소로 이동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거짓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몸이 반응했다. 문 너머에 있을 그 존재에 반응하고 있었다.
공포였다.
‘내가? 십 몇 년도 더 지났는데? 난데없이 게임 속에 빠져가지고 사람 대갈빡도 깨고 다닌 내가? 고작, 그 여자를 무서워한다고?’
머리와 몸이 따로 놀았다. 존나 얼탱이가 없었다. 반발심이 생겼다. 화가 났다.
그래서 억지로 힘을 줘서 문고리를 거의 뜯어내다시피 해서 문을 열었다.
“너….”
그곳엔 그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은, 내 생애 첫 괴물이 내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누가 나오라 그랬어. 어?”
“….”
“대답 안 해?”
어렸을 땐 그렇게 커다랗고 흉포하게 느껴졌던 괴물을 지금은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수리가 기껏해야 쇄골이나 턱 밑 정도일까.
이런 식으로보는 건 너무나 예상 밖이고, 또 다른 종류의 좆같음에 할 말을 잃고 있을 때 괴물이 내게 다가와 다짜고짜 검지로 내 몸을 쿡쿡 찔렀다.
어렸을 땐 가슴 찔리는 게 몸도 마음도 존나게 아팠는데, 지금은… 힘 좀 주면 우지끈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도 안 아팠다. 무뎌진 것일지도 모르지만.
“한유진.대답 안해? 벌써부터 엄마 말이 말 같지도 않아? 내가 우스워?”
‘어. 존나 우스워.’
이쯤 돼서 싸대기를 날리지 않을까, 싶은 타이밍에 과연 손을 휘둘렀다.
“어…?”
난 그때의 내가 아니었다. 내 생애 최초의 괴물은, 너무나도 약했다. 맞을 이유가 없었다. 손목을 잡은 다음, 반대쪽 손으로 괴물의 손가락을 손등과 만나게 해주었다.
“아아아아악!!!”
‘시끄럽네.’
오른손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괴물의 왼손을 빼냈다. 왼손이 섭섭할까봐 오른손처럼 똑같이 해주었다. 고통은 두 배, 손가락은 걸레. 보기 좋은 데칼코마니가 완성되었다.
‘생각보다… 진짜 생각보다 아무렇지않네.’
차라리 문 여는 순간이 훨씬 공포스러웠다. 한겨울에 얼음물을 마시는 것처럼, 오히려 정신이 명료해졌다. 내가 겪은 최초이자 최장의 공포를 최대의 공포라고 생각하고 나한테 ‘현현’시킨 거라면, 그건 정말 큰 오산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 어, 어떻게!!!”
‘손가락을 잡고 힘을 줘서 밀면 되는데. 이지하게.’
닿지 않을 대화였다. 이상했다. 괴물은 날 보고 반응하고 내게 말을 걸고 있는데, 나는 여전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서 이 좆같은 곳을 나가고 싶었다. 공포새끼야. 재미없으니까 이제 그냥 공포 현현이라는 거 거두면 안 되겠냐. 아. 체면이라는 게 있으니 무서운 척이라도 해줘야 하나?
나는 이 현상을 파훼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러던 중 이 괴물이 나타난 의도를 생각해봤다.
‘설마. 공포로 나타난 걸 무찌르는 게파훼 조건인가?’
아직도 흐느끼고 있는 괴물을 내려다봤다. 양쪽 손가락이 가동 범위의 자유화를적극적으로 외치고 있는 가운데, 나는 무심코 괴물의 등을 걷어찼다.
“아악! 악, 아아악!”
한 번, 두 번, 세 번.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찌나 실감이 나던지, 한 번 시작된 공격을 멈출 수 없었다. 내 주먹질과 발길질은 정확히 내가 주로 맞았던 곳을 향해있었다.
즉, 얼굴을 제외한 전신이었다.
생물학적 친모?
아니.
이 여자는 괴물이었다.
만약 이 여자가 조금만 더 과감했다면. 이 여자가 사이코패스였다면.
나는 틀림없이 죽었겠지.
아이를 죽을 정도로 패는 친모는 친모가 아니라 괴물이 아닌가.
그렇기에 지금 내 행동은 지극히 정당하다. 공포에 맞서는 용사로서, 공포로 등장한 괴물을 무찌르는 것뿐이다. 머뭇거릴 이유가 하등 없었다.
모자랐다. 답답했다. 뭔가 손맛이 부족했다. 그제서야 난 격투로 사람을 공격해본 적이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도끼… 도끼가 훨씬 더 익숙해.’
그러자 거짓말처럼 오른손에 도끼가 쥐어져있었다. 원래라면 여기서 확 분위기가 깨졌어야 했지만, 오히려 누가 손 안 닿는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처럼기분이 좋아졌다.
“그, 그만, 그만….”
‘그러는 그쪽은, 내가 그만해달라고 할 때 그만둔 적 있어? 잘못 하나 한 적 없는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했을 때, 조금이라도 머뭇거려준 적이라도 있어? 씨발 태어난 게 죄라고 지껄일 거면, 차라리 낙태를 하든가! 아니면고아원 같은데 버리기라도 하든가! 그도 아니면 그냥 길거리에 버려서 뒤지게 내버려두던가 하지! 씨발 애매하게 나빠가지고!’
푸화아아악-!
“꺄아아아아악!!!”
‘그 좆같았던 손이랑 발만 자를게. 몇 년 동안 고통스러웠던 거, 그걸로 퉁 치자고. 뭐해? 아직 세 군데 남았어.’
“제발, 제발….”
‘제발? 아. 이번에 손 말고 발부터 해달라고? 그거 좋지.’
“아아아악!!! 제발, 제발…!”
‘그래그래. 보채지 말라니까. 이번에도 대칭 맞춰줄게. 아씨 피 튀니까 좀 가만히 좀 있어봐. 그러다 엇나가서 무릎 나가도 난 모른다?’
“제발, 정신, 차려요….”
‘정신은 시발 그쪽이 나갔고요. 난 그저….’
어?
“아직, 늦지 않았어요… 아직은….”
어?
괴물이 피를 왈칵 토했다. 손목이랑 발목 하나를 잘랐는데, 왜 그쪽에서 나오던 피는 싹 사라져있고 상체가 피로 물들어있는 거야?
그리고 왜, 목소리가.
“헨, 드릭님….”
헨, 드릭? 난 한유진인데.
어째서 괴물의 입에서, 세스티아의 목소리가….
‘세스티아의 목소리가……?’
탱그랑-!
도끼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건 결코, 아파트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누군가 위를 덮듯이 엎드려 있는, 상반신이 피로 물들어있는 여자는.
괴물이 아니라 세스티아였다.
“세스티아…?”
“다행, 이에요. 완전히, 늦지 않아서… 후후….”
[공포 현현]
[일시적으로 공포의 성녀를 통해 내뿜어낸 –--- --의 공포가, 모든 용사들의 정신을 미치게 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24]
[카야 멘탈리티 –20]
[유진 멘탈리티 –20]
[세스티아 멘탈리티 –20]
[모든 용사대가 상태이상 ‘심신미약’(1턴)에 걸립니다.]
[모든 용사대가 상태이상 ‘혼란’(1턴)에 걸립니다.]
[모든 용사대가 상태이상 ‘절망’(1턴)에 걸립니다.]
메시지를 무시했다.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세스티아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밑엔 카야와 셰이가 깔려있었고….
[혼란에 찬 셰이가 카야를 공격합니다.]
[세스티아가 카야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셰이가 세스티아에게 5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5/24]
[같은 동료에게 공격당한 충격이 용사의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힙니다.]
[세스티아 멘탈리티 –10]
[혼란에 찬 유진이 카야를 공격합니다.]
[세스티아가 카야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유진이 세스티아에게 8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7/24]
[같은 동료에게 공격당한 충격이 용사의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힙니다.]
[세스티아 멘탈리티 –10]
그녀의 등과 복부에 깊이 새겨진 각기 다른 상처와 그 이유를 적나라하게 나타내는 메시지들이, 내가 저질렀던 짓과 오버랩 되면서….
“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하하!!!”
[피할 수 없는공포]
“아아! 지금당신들이 느끼고 있는 그 모든 것! 그것이 바로 공포! 공포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공포의 대제사장 핀들리에가 셰이에게 2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셰이 남은 체력 12/20]
[공포의 대제사장 핀들리에가 카야에게 5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카야 남은 체력 6/16]
[공포의 대제사장 핀들리에가 유진에게 4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유진 남은 체력 9/17]
[공포의 대제사장 핀들리에가 세스티아에게 4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세스티아 남은 체력 3/24]
“안 돼….”
[산 채로 갈려나간 원혼들의 내뿜어낸 공포가 용사들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난도질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 19]
[카야 멘탈리티 – 16]
[유진 멘탈리티 – 13]
[세스티아멘탈리티 – 13]
이곳에 떨어지고 난 후, 진정한 의미에서 처음으로.
나는 순수한 ‘공포’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