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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화 〉신중한 준비(2) (95/218)



〈 95화 〉신중한 준비(2)

카야의 시무룩한 얼굴이 존나 심장에 치명타를 먹였으나, 그렇다고 껴안고 부비부비할 수는 없는 노릇. 유진이었을 적 기억이 떠올라 스플래시 대미지를 받아버린 나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끌었다.

“꼭 아는 사람을 데려와야 한다는 법이 어딨어? 카야 너도, 셰이도 처음부터 알고 합류했나? 아니잖아.”

“그래도….”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겠지. 그러니까 그렇게 시무룩해 하지 말고, 같이  찾아보자. 알았지?”

“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대장, 저는 시무룩하지 않았습니다.”

“하하.”

“우, 웃지 마십시오! 셰이? 가, 갑자기 왜 껴안는 겁니까?!”

“언니가 너무 귀여워서요!”

“귀엽다니, 전 전혀 귀엽지 않습니다….”

그게 귀엽다고 카야.

우린 시시덕거리며 용사훈련소로 향했다.

**

‘세일럼… 세일럼으로 가거라.’

‘아, 아버지! 말하지 마세요! 피가! 아, 아…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치료를!’

‘그곳이라면… 어떤 왕국도, 어떤 교단도, 어떤 이단도 함부로 득세할  없는 곳이다… 차라리 잘 되었구나… 본성만… 본성만 어떻게든 숨기면… 이참에 자유롭게, 모든 족쇄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하며 살… 쿨럭!’

‘아버지!!!’

‘가거라! 어서!’


던전도시 세일럼.

한 때 세상을 뒤덮었다는 공포와 그것들이 던전이라는 곳에 응축되어 끊임없이 세상을 좀먹고 있다는 전설, 그 위에  있는 도시는… 굉장히 난잡했다.

“뭐야 그 눈깔은. 왜 그딴 식으로 꼬라보냐고 좆같게. 어?”

“뭐라는 거야 끽해야 하루살이도 못하는 병신새끼가.”

“뭐? 이 씨발 새끼가!”

가장 기나긴 공포가 자리잡고 있는 던전을 돌파하겠다는 사명을 가진 용사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애초에 세일럼에서 ‘사명’을 들먹이며 용사를 한다는 짓거리는 웃음거리도  됐다.

“하… 수리비하고 소모품 다시 채우고 나면 입에 풀칠도 간당간당하겠는데.”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었지. 금화도 평소보다 적었는데 씨발 함정이 왜 그렇게지랄맞은지. 아오, 치료비 생각하면 벌써부터 뒷골이.”

“멀쩡히 살아나온 게 어디야 씨발.”

“아 그건 모르겠고 맥주나 마시러 가자고.”

“그거야 당연한 거고.”

금화. 더 많은 금화. 아주 많은 금화.

용사라는 단어는 던전에서 나오는 금화로 인해 오랜 세월동안 그 의미가 지독히도 풍화되었고, 지금 와서는 경외의 의미도, 조롱의 의미도 되지 않았다.

대다수의 용사는 그냥… 작업장이 던전인, 험한 일을 하는 잡부가 아닐까. 잘 쳐줘봐야 모험가 정도였다. 용사들은 어떤 괴물을 얼마나 많이 무찔렀다는 것보단, 몇 금화를 얻었는지가 더 중요했다. 던전 어디까지 돌파했는지는 공포를 이겨낸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한 번에 얼마나 더 많은 금화를 가져올  있는 척도에 불과했다.

그게 던전도시, 용사들의 도시, 그리고 일확천금의 도시 세일럼에서의 상식이었다.

그리고 세일럼에는, 그런 잡부용사들보다도 못한 존재들이  많았다.

던전도시에 왔으면서 던전에 들어갈 최소한의 용기마저 상실해버린 이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일확천금의 망상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거나 관성으로 살아있는 이들.

그들 또한 모두 한때 용사였던 이들이었다.

‘…맞게 온 걸까. 그냥 죽을 때 죽더라도 아버지와 함께 죽는 게 낫지 않았을까.’

전설의 도시, 용사들의 도시에 대한 환상은 박살난 것도 모자라 곱게 갈려버려 형체조차 사라진 지 오래였다. 처음엔 그저 아버지의 유언을 따랐을 뿐이었지만, 용사라는 걸 한 번쯤은 꿈꿔봤던 소녀이기도 했다. 비록 아버지와 단 둘이 사람 없는 곳에서 살아야만 했고, 가급적이면 사람하고 마주치지 말고 엮이지도 말라는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받았던 터라 포기했던 꿈이었지만… 마지막에 아버지는 세일럼을 언급하셨다.

왤까.

이곳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다. 모든 족쇄를 벗어던지고 하고 싶은 걸 하며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신께선 딸이 한때나마 마음속에 품었던 꿈을 알고 계셨던 게 틀림없었다.

“이봐, 아르.”

“…?”

“이번정산, 네 몫 5퍼센트 더  건데 불만 없지?”

“….”

“원래 10퍼센트 까려고 했는데 그간 고생한것도 있으니까 5퍼센트만  거야. 왜 그러는지 굳이 입 아프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겠지.”

“….”

이 욕심 그득한 이리 떼들이 득시글거리는 줄 아셨으면,차마 세일럼으로 가라는 유언은 안 하지 않으셨을까.

‘아르’라 불린 소녀는 자기 몫으로 배당된 꼬질꼬질한 주머니를 집어 들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이 정도로는… 며칠 버티지도 못할 거 같은데.’

주머니 입구를 살짝 벌려 내용물, 때 낀 은화와 동화들을 확인한 아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시름에 찬 한숨을 쉬었다.  때문에 건물 옆쪽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을 느끼지 못했다.

퍼억-

“아.”

“….”

세게 부딪친  아니었다. 오히려 튕겨나간 건 아르였다. 아르는 본능적으로 주머니를 품속에 넣고 몸을 웅크렸다. 이제 갓 의뢰를 끝내고 돌아와서 힘들고 피곤했지만, 언제든지 도망갈 태세를 순식간에 끝마쳤다. 세일럼에 오기 전부터 숨고 달리는 것에는 이골이 나있었다. 자신과 부딪친,  값나가 보이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조금이라도 손을 뻗는다면 주저 없이 도망갈 생각이었다. 이런 꼬질꼬질한 돈을 탐할 것 같진 않았지만 섣부른 추측은 금물이었다. 부딪친 건 미안하지만, 따지고 보면 서로 부딪친 거 아닌가. 손을 뻗진 않아도, 부딪친 걸로 돈을 내놓으라 하면 최선을 다해 항변할 생각이었다.

“미안해요. 혹시 다쳤어요?”

하지만.

“아, 음,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요. 하필 갑옷을 맡겨놓은 상태라… 아. 이거 봐봐요.”

아르와 부딪친 여자는 공격은커녕 시비도 걸지않았다. 정말로 미안한 듯, 잔뜩 경계하는 아르에게 양손을 들어 올리며 공격하지 않겠다는 행동까지 취했다. 이곳 세일럼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인격자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르의경계심은 여전했다. 항상 자신과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타인들은 경계 대상이었고, 꿈의 도시였던 세일럼은 이리떼들의 소굴이었다. 쉽사리 믿지 않았다.

좀처럼 가까워질 수 없자 아르와 부딪친 여자는 품속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천칭과 검을  작은 여신상이 매달린 은빛 로자리오였다.

“자. 보이죠? 세일럼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이걸 못 알아볼 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전 유스티티아 교단 소속 성전사, 셰이라고 해요. 정말로 해할의도는 없으니까, 괜찮다면 다친 곳이 없는지 살펴봐도 될까요?”

교단. 그것도 성전사.

차라리 그냥 어디 높으신 분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르는 도망쳤다. 필사적으로.


“……하?”

드레스차림의 셰이는 황망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장비지원소와 용사훈련소를 들렀다가 네 번째 용사 물색을 위해 각자 흩어지기로 했고, 서쪽부터  둘러보기로 하다가 이런 일을 겪은 것이었다.

“대체….”

단순히 부딪쳤고, 교단 사람임을 입증했는데도 도망쳤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 지분이 있었지만  원인은 아니었다.

‘한 순간이지만, 놓쳤어….’

셰이는 자신이 강하다고 자만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신의 피지컬과 재능이  수준에 비해 뛰어난 편이라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었다. 스승도 다른 이들에게 괴물딱지라 불리는, 유스티티아의 빛나는 검들  한 명이었고, 그런이에게서 천재 소리를 들었던 그녀였다. 최근엔 처절한 실전들을 겪으면서 급격한 수준 상승까지 이뤄낸 그녀가, 딱 봐도 용사는 아닌 것 같은 소녀의 모습을 놓쳤다는 것은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쫓아가봐야겠어.”

거기에, 로자리오가 순간이지만 은색 광채를 뿜어내는 걸 셰이는 놓치지 않았다.

타타타탓-

셰이는 한손으론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소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아… 가슴….’

갑옷을 입을 때 항상 하던 가슴 압박을 안 해서 그런지 다리를 뗄 때마다 격렬하게 흔들리는 가슴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헨드릭이 자신의 가슴을 만지고 빠는 걸 좋아해서 최근엔 그나마 덜했지만, 원래는  크기만 하고 거추장스럽고 쓸데도 없는 덩어리를 잘라볼까 생각도 했던  있는 그녀였다. 거기에 나풀거리는 드레스 자락까지, 하나 같이 달리는데 방해만 되는 것들이었다. 순간 달리기 편하게 허벅지부분까지 찢어버릴까 싶었지만, 그래도헨드릭이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하니 그럴 마음이 쏙 들어갔다.  비싸기도 했고.

‘도망가봤자 세일럼 밖까지 도망가진 않았겠지. 그럼 괜찮아.’

소녀가 벌써 어디로 사라졌는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셰이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추적술에 상당한 자신감이 있었고, 감을 믿었다.

부딪쳤을 때의 감각, 그로 인해 추정할 수 있는 상대방의 무게와 힘 그리고 미미했지만 독특했던 체향. 카야보다작은 키에 비해 어색할 정도로 커다란 보폭. 한순간이지만 자신이 놓칠 정도의 순간 속도에 반해 놀라울 정도로 흐릿한 족적까지.

 외에 흔적이라고 말하긴 애매할 미세한 것들까지 고려했다.

‘이만한 속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실력은 상당할 것 같은데… 어째서.’

방향성은 잡혔다. 하지만 새로운 의문도 생겼다.

단순히 달리기만 빠르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무른 능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 달리기가 아무리 빨라봐야 셰이 입장에선 거기서 거기였다. 소녀의 속도는 분명 엄청난 신체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소녀의 행색은 굉장히남루했다. 무장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며 얼마나 고생했는지 완전 거지꼴이었다.

가진 능력과 처지가 완전히 상반됐다. 세일럼이 아무리 소문만큼의 도시는 아니라고는 하지만, 실력 있는 자가  많이 돈을 번다는  자체는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여기선 굳이 자신의 실력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완전 손해였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질 만한 사안이 아니었지만, 파고 들수록 호기심이 생겼다. 네 번째 용사가 될 후보를 물색해야 하지만, 왠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소녀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궁금했다. 이제 물색 첫날이다. 하루 정도는 투자해봐도 괜찮을 것이다.

‘혹시 알아? 그 소녀가 네 번째가 될지.’

네 번째 용사가 헨드릭의 세 번째 여자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건 나중 이야기.

던전의 완전한종말을 위해서. 그러기 위한 용사대의 전력 증강을 위해서.

셰이는 다시 한 번 가슴골에서 로자리오를 꺼내들었다.


**

“하악, 하악, 하악….”

소녀, 아르는 폐가라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흉흉한 자신의 거처에 몸을 숨겼다.

‘강자.’

드레스 여자와 부딪쳤을 때 본능적으로 느꼈다.

싸우고 싶지 않다고. 도망치고 싶다고.

그리고  여자가 가슴에서 목걸이를 꺼내며스스로의 신분을 밝힌 순간, 느낌은 확신이 되었고 확신은 공포가 되었다.

‘딸아. 우린 사람, 교단, 이단. 모두 조심해야 한다.’

‘다 사람 아니에요?’

‘껍데기는 다 같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알맹이는 다 다르니까. 평범한 사람들은 우릴 배척해. 대다수는 힘이 없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 그래도 우리가 본성만 드러내지 않으면구별할 방법은 없으니 조심만하면 이쪽은 그나마 괜찮다.’

‘그럼 교단이랑 이단은요?’

‘이단은 우릴  좋은 방향으로 이용하려 들지. 우릴 가지고 고문하고 실험하고 그러다가 제물로 바쳐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아. 이단이 괜히 이단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그리고 교단은….’

그냥 피해라.

천적과 같은 존재니.

수많은 교단들이 있기에 오히려 특정 교단이 득세하지 못하는 곳이라며, 그래서 이단들로부터도 안전한 곳이라며 자신의 아버지가 죽어가면서까지 언급했던 도시에서….

쿵쿵-

“계세요?”

‘…!!!’

아르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쿵쿵쿵-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잠깐 이야기 좀 나누고 싶어요.”

아버지가 천적이라고 말했던 자가, 아무에게도 밝힌  없던 거처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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