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마음가짐(4)
끝까지 동료들이 무사했으면 하는 바람, 부디 소중한 사람의 목표가 좌절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동료들을 더 잘 지키고 싶은 바람, 전무후무한 이야기를 엮어내고 싶은 바람.
각자가 가진 마음가짐도, 액션도 조금씩 달랐지만 그 목적지는 결국 하나로 모였다.
던전 무사 공략.
스킬북을 사고 정보를 모았다. 중간에 세스티아에게 들려 두 번째 보상이라는 아티팩트를 받아오기도 했다. 교단에서 준비한 거라 그런지 셰이와 카야 둘에게 적용 가능한 아티팩트였고, 무난한 효과라 장착하기로 했다.
준비에 준비를 거듭했다. 서두르지 않았다. 2구역에 들어가면 얼마나 또 고생할지 눈에 선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해둬야 했다. 그리고 동료들끼리 친해지는 것. 이것도 중요했다.
“고, 고마워.”
“고맙긴 뭘.”
“정말로… 정말로 열심히 할게!”
“하하.”
일루미나는 셰이와는 다른 방향으로 활발한 사람이었고, 어느 정도 친해진 이후 나는 그녀의 방어구를 두 단계 업그레이드 해주었다. 비무장 클래스라 업그레이드 효율이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고작 1이라는 수치에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피똥싸는 고생을 했는지 생각해보면… 지금 금화를 버려가며 올린 쥐똥 같은 최대 체력과 방어력이 훗날 일루미나의 목숨을 살릴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일루미나가 한 번 사경에 덜 빠지느냐 마느냐, 그녀가 죽느냐 마느냐가 앞으로 우리 용사대의 생사를 가르는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마음 같아선 장비를 더 업글하고 싶지만….’
꾸준히 나가는 숙박비에 식비에 스킬북도 여러 권 사고 나니 돈이 술술 빠져나갔다.
‘스킬 레벨도 업그레이드 해줘야하고.’
자금 사정상 모든 스킬을 업그레이드 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각자 메인 스킬 하나씩 정도는 어떻게 해볼 만했다.
내가 가진 대가리 분쇄.
카야의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셰이의 정의 집행 또는 정의의 심판.
일루미나는… 어느 걸 올려도 다 좋으니 일단 보류.
레벨 업으로 인한 능력치 상승이나 장비 업그레이드에 비하면 가성비가 떨어지긴 하지만, 스킬 업그레이드도 아예 등한시 할 수 없었다.
‘하….’
잠시 견적을 계산해보던나는 어질어질해지는 예상 금액에 생각을 그만두었다. 애초에 더 롱 테러에서도 용사 만렙에 장비 풀업 스킬 풀업을 하는 건 어떤 똥꼬쇼를 벌여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에, 실망감이 그리 크진 않았다.
지금은 오히려 레벨 업이 생각보다 빨라서, 장비와 스킬 레벨이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이었으니까.
‘세스티아한테 세 번째 보상으로 아예 금화를 달라고 해야겠어.’
속물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뭐 어떤가. 사치를 부리는 것도 아니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 편이 차라리 교단 쪽에서도 준비하기 편할 거고.
거기에 셰이가 스승에게서 새로운 스킬을 배우고 있다고 했으니, 아직 시간적 여유도 있었다.
“그동안 쉴 틈 없이 움직였으니… 오늘하루 정도는 쉬어볼까.”
던전 공략과 예산으로 가득 찼던 머리를 한 차례 비워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
“으읏!”
“느립니다.”
콰아앙-!!
“꺄아악!”
“집중, 집중! 집중하십시오! 괴물은 아군의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버티십시오. 일어나십시오!”
“조, 조금만! 조금만 쉬었다가아아앙!”
부와우웅-
“히이익!”
“던전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함께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하면, 어떻게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인적 없는 공터. 그곳에서 일루미나는 땅에 엎어진 채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전신은 흠뻑 땀에 젖어있었고 그 탓에 로브가 몸에 달라붙어 꽤나 음란한 모습이 되었지만 그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반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카야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나무 몽둥이로 자신의 손바닥을 착착 두들기고 있었다.
“일루미나. 혹시 지금 상황이 부당하다고 느껴지십니까.”
“아, 아니! 아니야!”
“분명 당신이 원했던 일이었고, 저는 한 번 시작하면 적당히 하지 않겠다고 말했었습니다. 제발 그렇게 해달라고 한 건, 당신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맞아… 으으으!”
일루미나는 땅바닥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땀방울이 눈에 들어갔는지 따가웠다. 겨우 일어나서는 손등으로 땀을 거칠게 훔쳤다. 다리가 갓 태어난 사슴 새끼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인간보다 육체가 튼튼한 수인이기도 하고, 거기에 나름세상을 돌아다녀본 경험도 꽤 긴 그녀였지만 이렇게 형편없이 하체에 힘이 풀려본 적은 처음이었다.
카야 말마따나 그녀가 부탁한 일이었다. 혼자 얻어먹기만 하고 딩가딩가 베이파 줄만 뜯기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홀로 기도하고 훈련하고 있는 카야를 찾아가 귀찮게 했다.
던전 안에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으니, 자신의 상태를 봐달라고. 부족한 게 보이면 훈련 좀 시켜달라고.
그 말을 듣고 카야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루미나도 며칠 만에 보는 카야의 미소에 좋다고 따라 웃었지만, 일루미나의 웃음은 1분도 안 가서 사라졌다.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해서 전혀 봐주는 것 없이 카야는 혹독하게 몰아붙였고, 일루미나는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도 자존심이 있었다.
‘시련… 이것도 진정한 용사가 되기 위한 시련인 거야.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흙이 잔뜩 묻은 손으로 제 허벅지를 마구 두들겼다. 그러자 볼품없이 떨리던 다리가 조금은 진정됐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카야는 속으로 15초 정도는 더 줘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북풍한설 같았던 어조도 약간은 누그러졌다.
“일루미나, 당신이 직접 싸워야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건 우리 용사대가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일 겁니다. 그런 상황이 아예 안 오는 게 제일 좋긴 하지만, 던전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곳입니다. 물론 저를 비롯해서 대장도, 셰이도 최선을 다해서 당신을 지킬 겁니다. 그러기 위해 최근에 다양한 준비들을 하고 있는 것이고요.”
“응, 으응.”
“이렇게 말해도, 던전에 들어간 적이 없다던 당신은 이해하기 힘들 겁니다. 육체적 고통도 고통이지만, 더 큰 고통은 정신적인 면에서 오는 것이니….”
그렇다고 제가 일루미나를 미치게 만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카야가 몽둥이를 다시 일루미나에게 겨누었다. 겨우 진정됐던 일루미나의 몸이 다시 흠칫 떨렸다.
“그러니 적어도 육체적인 고통이라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독침이나 녹슨 꼬챙이 같은 함정도, 머리가 잔뜩 헤집어지는 것 같은 정신 공격도, 그저 숨을 쉬기만 해도, 걷기만 해도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게 될 것 같은 공포와 답답함, 사방이 어두운곳에서 동료들에게 버림받거나 공격받을 것 같다는 두려움과 불안함… 다 포기하고 그대로 드러눕고 싶다는, 차라리 영원히 눈을 감고 싶다는 나약함까지.”
후우웅-
“히익!”
“그 모든 것들을 감내해야 합니다. 버티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 괴물들을, 끝내는 던전을 장악하고 있는 수괴들을 처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걸레짝이 되어서도,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지탱해야 합니다! 자신을 믿고의지하는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부와우웅- 퍼억!
“꺄아악!!!”
“엄살 부리지 마십시오! 일어나십시오! 당장!!”
“흐윽, 윽, 자, 잠깐만, 뼈, 뼈가, 꺄악!!”
“대장은! 상반신만한 도끼의 공격에 하반신이 분리될 뻔했습니다!”
“캬하악!”
그동안은 어떻게든 두 다리로 회피하려던 일루미나는 자존심을 완전히 내려놓고 데굴데굴 굴렀다. 그 덕분에 몽둥이를 피할 수 있었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고 스치는 것만으로 살이 찢기는 고통이 들었다. 하지만 멈칫거릴 시간도 없었다. 몽둥이는 쉬지 않고 또 다가왔다. 또 굴러야 했다. 등에 뾰족한 돌멩이가 박혔다. 눈물이 핑 나왔다.
“셰이는! 괴물의 공격을 받아내다 온몸에서 피를 분수처럼 쏟아내며 죽을 뻔했습니다!”
“아윽!”
카야가 휘두르는 건 분명 나무 몽둥이인데, 땅이 파이고 돌멩이가 부서져 파편이 비산했다. 맞으면 죽을것 같다는 생각에 일루미나는 필사적으로 구르고 또 굴렀다.
“저 또한 자력으로 철퇴를 들지 못할 정도로 한계에 몰린 적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윽, 흐윽, 크흐응….”
일루미나는 울고 있었다. 카야의 표정도 썩 좋진 않았다.
“부당하다고 느끼십니까.”
“아, 아, 아니이…!”
“지금이라도 관둘 수 있습니다. 제가 진짜 괴물도 아니고, 같은 동료에게 고통을 주는 건 저도 달갑지 않습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철회할 수 있습니다. 그만둘 수 있습니다.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부드럽게 할 수도 있습니다.”
“끄흑, 윽, 흐윽….”
일루미나는 울면서 웃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구른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아픈 것도 처음이었다.
근데 이건 약과란다. 어림도 없단다. 지금 겪은 것만 해도 죽을 거 같이 아프고 힘든데,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은데!
던전에서 겪는 것에 비하면 반쪽짜리에 반쪽짜리도 안 된단다.
알고 지낸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카야라는 여자는 절대 거짓말을 하거나 과장, 허언을 내뱉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본 일루미나는 사람 보는 눈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카야는 지금도 지극히 담백한 어조로 사실을 내뱉고 있는 것이리라.
‘미쳤나봐.’
근데 웃음이 나왔다. 이상했다. 헨드릭 때문에 한 번 자극된 로망은 생각보다 큰 힘을 발휘했다.
조금은 인내심이 부족한, 조금은 자제력이 부족한.
안 되면 말고. 위험하면 말고. 없으면 말고. 힘들면 말고. 사람은 많고 갈 곳도 많고 이야기는 많으니까, 적당히 재밌는 곳으로 즐기면서 살아가자는 그녀의 마인드가.
‘바보 같아. 근데… 꼭 하고 싶어.’
어느 새 이 사람들에게 아주 조금쯤 물들어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이 사람들은… 진짜야. 언제나 진심이야.’
“안 봐줘도, 괜찮으니까, 훌쩍. 기절해도, 괜찮으니까아….”
일루미나는 아주 약간이나마 저 몽둥이의 데미지를 줄여주었던, 하지만 지금은 땀에 젖어 질척거리기만 하는 로브를 홱 벗어던졌다.
그러자 배꼽이 살짝 보이는 얇은 상의에 길쭉한 다리가 훤히 노출된, 속옷에 가까운 하의 차림이 드러났다. 거기에 쭉 숨기고 있었던 뾰족 솟은 귀와 통통한 꼬리까지.
이 상태에서 저 몽둥이에 맞으면 정말 뼈가 부러질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해방감을 느꼈다. 땀이 식으며 시원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여기엔 수많은 인간들의 귀찮은 시선도, 음습한 욕망에 찬 시선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일루미나는 음유시인이 아니었다.
타고난 전사로 태어난 수인이자, 한 명의 용사가 된 기분이었다.
“네가 말한 대로 끝까지 버텨볼게. 넘어져도, 굴러도. 다시 일어나볼게. 고통스러워도 참아볼게.”
“….”
“그만두지 않을 거야. 진심이야.”
“그렇습니까.”
“응.”
“일루미나의 그 마음가짐, 이해했습니다.”
카야는 일루미나에게 살짝 묵례했다. 그리고는 나무 몽둥이를 고쳐쥐며 말했다.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일루미나의 눈이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부터 저도 진심으로 하겠습니다.”
“헤?”
꺄아아아악-! 악! 아악! 히야아아악!! 아아아아악!! 꺄아아앙!!!
한동안 공터엔 여우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