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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화 〉마음가짐(7) (114/218)



〈 114화 〉마음가짐(7)

‘아파아….’

일루미나는 눈을 뜨자마자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안 나왔다. 하도 비명을 질러서 그런지 목이 완전히 잠겨있었다.

‘어제 여관에 언제 어떻게 들어왔더라?’

뭔가 기억이 사라진  같고 시간이 삭제된 기분이었다. 분명 돌아온  같긴 하고 누가 씻겨준 것 같기도 하고, 누가 온몸에 뭔가를 발라준  같기도 한데 그래서 그런지 몸이 깨끗했고 통증이 덜했다. 어디까지나 어제에 비해서지만.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침대엔 셰이가 엎어진 자세에서 끙끙거리며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대장니임… 헤헤….”

뭐가 그렇게 좋은지헤실헤실 웃으며 입을 오물거렸다. 귀여웠다.

“끄응….”

조금만 더 누워있자. 5분만 더. 아니 10분만 더. 아무도  깬  같으니까, 그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일루미나가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났다. 쇳덩이가 매달린 것 같은 팔을 들어올려 냄새를 맡아봤으나,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아니었다.

신경 끄고 자려했으나 한 번 인식하자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냄새였다. 엄밀히 말해서 좋은 냄새라고 말할 순 없었는데, 묘하게 맡게 되는 그런 오묘한 냄새였다. 결국 앓는 소릴 내며 일어난 그녀는 냄새의 근원과 정체를 곧바로 깨달았다.

근원지는  한쪽에떡하니 설치된 꽤나 큼지막한 텐트. 그리고 냄새의 정체는….

“킁, 크흥. 어디서 진한 남자 냄새가… 아니, 여자 냄새도…… 아.”

“아.”

텐트에서 얼굴만 빼꼼 내민 헨드릭의 얼굴과 마주친 일루미나의 얼굴은 제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어져있었다.

‘배는,  갑자기 쿵쿵거리는 거야아…!’

**

‘백퍼 깨달은 표정이다 저건.’

일루미나와마주쳤을 때의  민망함은 상당했다. 방음  안 되는 원룸에서 한바탕 격전을 치르고 잠시 먹을  사러 나갔을 때 옆집 또래의 이성과 얼굴을 마주치면 이러할까. 그나마 셰이는 계속 자고 있었지만… 일루미나가 수인이었다는 걸 망각했다.

뒤늦게 깨어난 카야가 멍하니 알몸 차림으로 텐트 밖으로 나왔다가 일루미나와 마주치고는 텐트 지지대를 부숴먹을 뻔했지만, 어찌저찌 해프닝으로 넘어갔다.

카야는 뭔가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은 일루미나를다시 공터로 데리고 갔고, 셰이는 수도원으로 향했다. 셰이랑 일루미나의 몸 상태가 걱정되긴 했지만 본인들의 의지가 워낙 강력해서 말릴 수 없었다.무엇보다 셰이에겐 셰이의 스승이 있었고, 일루미나에겐 카야가 있었다. 어느 정도 안전장치가 있는 셈이었다.

나름 시끌벅적했던 방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혼자 있는 건 굉장히 어색했다. 어제 하루 쉬었으니, 오늘은 다시 뭐라도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오늘은 우선 세스티아한테 들러서 보상 건에 대해 이야기  다음에… 유스티티아님 수도원에 한 번 들러볼까.”

명색이  번째로섬기는 여신님인데, 여태껏 한 번도 들른 적 없는 건 내심 서운하셨으리라.

여관을 나섰다. 과장 좀 보태면 이제 라엘라님 수도원으로 가는 길은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스티티아님! 죄송합니다!’

활짝 열린 정문을 지나 수도원 안쪽으로 들어가니 못 보던 수녀들이 날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굳이 다가와 말을 거는 이는 없었고, 나는 개의치 않고 라엘라님 조각상 앞에 꽃을 바치며 기도를 올렸다.

‘따스한 자애와 냉철한 관용을. 라엘라님. 아니, 장모님. 사위 왔습니다.’

앞에 경구를 추가하니 제법 기도하는 태가 났다. 라엘라님께서 감히 지까짓 게 장모님이라 부르다니 무엄하다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카야가 라엘라님의 (영적인)딸인 이상 아예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난 절대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 그렇고 말고.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한 번 던전에 도전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카야도 함께 갑니다.’

밑에서 올려다보니 라엘라님의 자애로우신 어느 부위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얼굴 대신  부위를 바라보며 기도를 계속했다.

‘라엘라님껜 카야는 수많은 딸들 중 하나에 불과할 겁니다. 그렇게 특별한 딸도 아닐 거고요. 그렇지만 제겐  누구보다 특별한 여자이자 동료입니다. 제 처음을 가져가기도 했고요.’

어젯밤엔제 정기를 쪽쪽 가져갔죠. 차마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카야를 지켜보고 계셨다면 뭐… 크흠.

‘두 번째 구역을 클리어하고 무사히 돌아오는 게 목푭니다. 하지만 무사귀환할 거라고 장담은  합니다. 그건 비단 카야 뿐만이 아닙니다. 제 자신도 그렇고, 셰이도 그렇고 이번에 합류한 일루미나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라엘라님. 라엘라님께서 저흴 쭉 지켜보고 계셨다면 아실 것입니다. 엄청난 고난을 겪지만 결국엔 무사히 귀환한다는 것을.’

자박- 작은 발소리가 났다.

‘예. 제가 장담할 수 없다는 건 미래의 결과였습니다. 미래는 확신할 수 없지만, 과거의 확정된 결과들이 제게  나은 미래로 나아갈 힘을 줍니다. 반복되는 결과는 하나의 법칙이 됩니다. 그리고 그 힘과 법칙에는 라엘라님, 장모님의 지분도 있습니다.’

소리가  방향으로 고갤 돌렸다. 양손을 배에 가지런히 모은 세스티아가 날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따스한 자애와 냉철한 관용을. 라엘라님. 부디 계속, 저희를 지켜봐주십시오.’

“따스한 자애와 냉철한 관용을. 세스티아님, 또 뵙습니다.”

“따스한 자애와 냉철한 관용을. 헨드릭님, 어서 오세요.”

여신상을 일별하며 세스티아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본관이 아니라 인적이 없는 쪽으로 날 이끌었는데, 한쪽에 ‘진실의 방’이 얼핏 보였다. 다행히 거기로 가진 않았다. 그녀는 건물 안이 아니라 산책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아무도 없으니  편히 하셔도 돼요, 헨드릭님.”

“그러는 세스티아도 편히 해도 되는데.”

“후후. 전 이게 편하거든요.”

휘이잉 살포시 부는 바람이 세스티아의 머리를 흩뜨렸다. 살짝 나부끼다 어깨에 내려앉은 연갈색 머리가 참 잘 어울렸다.

“많이 힘들지?”

“괜찮아요. 힘들지 않아요. 라고 말하면 거짓말인 것 같아요.”

쓰읍.

딸아이를 잃은 어미가 딸을 제대로 추모도 못 하고 오히려 타락한 자로 처리해야 했으니, 얼마나 속이 타들어갔을까. 심지어 제대로 쉬지도못하고 말이다. 굳건히 버티면서 일은 일대로 하고 우리 용사대에게 줄 보상까지 잊지 않고 챙겨주는 걸 보면 참 대단하면서도 고맙고, 또 미안했다. 그런 그녀에게 보상 이야기를 꺼내는 게  그래도 힘든 그녀를 재촉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교단 본부에서는 뭐라고 했어?”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추궁하진 않았어요. 사건의 심각성과 규모가 저 개인이 막을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고 판단한 모양이에요. 그래도 책임을 아예 안 질 수는 없으니, 형식상 징벌이 있기는 있을 거예요.”

“징벌이라니, 어감이 굉장히  좋은데?”

“으음, 전에도 말했다시피 현재로썬 수녀장 자리에서 내려와 일반 수녀로 지내는  정도를 예상하고 있어요.”

“수녀장이 아닌 일반 수녀 세스티아는 상상이 잘 안 되는데.”

“그거, 무슨 의미예요?”

“그을쎄?”

“흥.”

세스티아는 팔짱을 끼며 짐짓 삐친 척 했다. 내가 이런 생각하는 거 알면 진짜로 삐칠  같지만, 지금 그녀는 띠동갑 누나답지 않게 귀여웠다. 저 나이에, 저 얼굴과 몸매로 귀엽다니 반칙이었다. 어쩌면 라엘라님은 얼굴 보고 수녀를 뽑는 것일지도 몰랐다.

적당히 웃다가 그녀의 팔짱을 직접 풀어주며 미안하다 했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며 이번엔 내게 팔짱을 꼈다.

‘으음,  정도까지는… 친애의 의미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겠지?’

카야와 셰이의 오싹했던 모습이 떠오른 나는 애써 부드러운 감촉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일부러 세 번째 보상 이야기를 꺼냈다. 세스티아는 이번엔 약간 서운한 것처럼 보였으나, 그 표정은 순간이었다. 그녀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지금 당장은 어려우니 며칠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덕분에 추가적인 스펙업을 할 수 있게 돼서 마음이 놓였다.

장비 업그레이드에, 아티팩트에, 이젠 스킬 업그레이드까지.

우리가 고생한 거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은 거긴 하지만, 그걸 준비해준 건 세스티아였다.

“고마워, 세스티아.”

“정말 고마우면, 지금보다 좀 더 자주 찾아와주세요.  거창한  바라는 건 아니니까… 그냥 이렇게 걸으면서 사소한 이야기라도 나누면 힘이 될 것 같아요.”

“어, 그럴게.”

“약속이에요? 라엘라님의 이름에 맹세코?”

“아, 알았어. 라엘라님께 맹세코.”

“후후. 말만 들어도 벌써 힘이 나네요.”

산책하면서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본관에 가까워졌다. 세스티아가 먼저 팔짱을 뺐다. 묘하게 아쉬웠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꼭… 꼭 다시 들러주세요.”

세스티아는 다시 양손을 배에 모은 다소곳한 자세로 날 배웅했다. 이미 약속까지 했지만 그녀의 어조가 슬프게 들려 다시 한 번 알겠다고 대답했다.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하아. 세스티아도 참 아까워. 부정적 특징만 아니었어도….’

미련을 털었다. 이미 일루미나를 영입했다.  이상 아쉬워하는 건 그녀에게 실례였다.

머리를 털었다. 그리고 유스티티아님 수도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라엘라님 수도원과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다. 하지만 여긴 정문이 닫혀있었고 문지기들이 있었다.

“이곳은 유스티티아님을 섬기는 곳입니다. 누구십니까?”

“정의의 길을 걷고 있는 셰이 성전사의 동료, HAT의 헨드릭이라고 합니다.”

“HAT의 헨드릭…?”

“아!”

날 한 번에 못 알아보다가 이름을 듣고 나서야 깨달은 걸 보면, 베스티아 타락 사건 때 참전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 당시 세일럼에 없었거나, 전력 외로판정됐거나. 내가 보기엔 후자처럼 보였다. 뭐… 아무리 짬찌 성전사라도 존중은 해줘야겠지.

“이곳에서 제 동료가 수련을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유스티티아님께 기도를 올리고 제 동료를 응원하고 싶은데,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예. HAT의 헨드릭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당신에게 유스티티아님의 빛이 깃들기를.”

“만면에 빛과 공정한 정의를.”

웅장한 정문이 열렸다. 고작 나 한  들어간다고  정도 크기의 문이 열리는 건  낭비 같아보였지만 뭐 어쩌겠나. 내가 설계한 것도 아니고.

라엘라님의 수도원은 부지는 넓었지만 건물이나 인테리어 등이 아늑하고 소담한 느낌이 들었다면, 유스티티아님의 수도원은 아예 정반대였다.

웅장. 장엄.위엄. 그 외에 압박감 쩌는 단어들.

모든 건물들이 큼지막했고, 여신상도 그만큼 큼지막했다. 한 손에 천칭, 다른 손엔 장검을 들고 계신 유스티티아님에 대한 첫인상은… 라엘라님보단 다소 날카롭게 생긴 미인이라는 점?

날카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잘못된  있으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만면에 빛과 공정한 정의를. 어두운 던전을 헤매는 저희의 앞길을 부디 당신의 빛으로 밝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의 안전을 최전선에서 도맡는 셰이에게도 힘을 내려주십시오.’

유스티티아님께도 꽃을 바치고 기도를 드린 뒤, 셰이를 찾아나섰다. 이곳에  적은 처음이지만 그동안 수도원에 대해 들은 게 몇 번 있었기에, 돌아다니는 성전사들이나 사제들에게 길을 물어 쉽게 찾아갈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고생하면서 얻으려는 스킬이 대체 뭘까.’

셰이가 좋아하는 간식이 담긴 봉투와 셰이의 스승님이라는 분께 드릴 약소한 선물을 꺼내며, 슬쩍 안쪽에 발을 들이민 순간.


콰아아아아앙----!!!


“아아아아아악!!!!!”


엄청난 굉음, 그리고 엄청난 후폭풍과 함께.


 맞이한 건 포탄처럼 튕겨나간 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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