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2구역(5)
‘씨발씨발씨발….’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2연속 소환이라니? 우리가 2-1에서 상쾌한 출발을 한 것이 그렇게도 꼴 보기 싫었나? 생각해보니 지금 겨우 2-2였다. 또 두 번째 방에서 정예 괴물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공포포기무새관음증변태새끼가 위치를 조작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쓸모없는 의심병이 도졌다.
[예술품-현상금 사냥꾼]
최대체력 : 40/40
공격력 : 4~10
방어력 : 5
속도 : 7
[예술품-음유시인]
최대체력 : 30/30
공격력 : 3~5
방어력 : 2
속도 : 5
새로 소환된 놈들의 스펙을 보니 더 기가 찼다. 공격력과 방어력은 반토막난 주제에 속도는 똑같았으니까. 그나마 날따라한 괴물은 괜찮았다. 일루미나를 따라한 괴물이 문제였다. 스킬마저 비슷하게 따라할 수 있다면?
‘하….’
만약 소환 패턴이 아니었다면 2열로 당겨진 예술가놈에게 낙인 찍어버리고, 일루미나에게 용기의 선율로 바꾸라고 한 다음 극딜을 퍼부으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면 속도 굴림이 발생해버릴 거고, 거기서 지기라도 한다면….’
저 세 마리한테 강화가 걸려버린다?
진정한 의미에서 헬 파티가 벌어질 것이다.
‘씨발…방어구 업그레이드 했으니 망정이지, 못했으면 가랑비에 옷 젖다가 뒤지는 엔딩 나올 뻔했네.’
타겟을 정했다. 현 상황에선 3열에 있는 예술품-음유시인이 최우선이었다. 기댓값을 계산했다. 치명타가 터지지 않는 이상 원샷킬은 불가능했다.
‘치명타 한 번 터질 때가 되긴 했는데… 저걸 앞으로 끌어온다고 해도 문제야. 셰이랑 카야가 하나라도 못 잡을 가능성이 존재하는데다가, 성전사랑 현상금 사냥꾼이 한 칸씩 뒤로 밀려도 우릴 여전히 공격 가능한 건 똑같으니까.’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척살 1순위는 음유시인인데, 하필이면 3열에 있는 게 개빡치는 일이었다.
‘벌써부터 도박수를 던질 정도는 아니야. 아직 풀피야.’
도끼를 쥐었다. 타겟을 바꾸었다. 척살 2순위, 현상금 사냥꾼을 겨누었다. 타락한 날 향해 도끼를 휘두르는 심정으로, 전력을 다해 휘둘렀다.
[대가리 분쇄]
[유진이 예술품-현상금 사냥꾼에게 2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20/40]
“씨발!”
화가 났다. 내가 날 공격하는 것 같은 괴상한 느낌도 그랬지만, 치명타율 버프까지 받은 상태에서 몇 번 연속으로 치명타가 안 터지니 너무나 답답했다.
내 턴이 끝나자마자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없던, 마치 움직이는 인형 같은 예술품-현상금 사냥꾼이 도끼를 치켜들었다. 명백히 시체였던 저 괴물도, 나한테 공격당했던 게 좆같았을까? 그놈의 도끼는 셰이도, 카야도 아닌 내게 향했다.
[공포를 찬미하는 도끼]
[예술품-현상금 사냥꾼이 유진에게 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20/20]
[유진 멘탈리티 –5]
응. 확실하네.
굉장히 좆같다는 거.
셰이의 멘탈리티가 왜 깎였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타락한 것처럼 보이는 저 존재들의 공격은 위력을 떠나 그 행위 자체로 진짜 나, 옳은 나를 부정하는 것처럼, 배제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기에 우릴 닮은 개체들이 저 예술가놈의 ‘인형’처럼 부려진다는 게, 너무나 불쾌하고 소름 돋고 좆같은 일이었다.
“일루미나.”
“으, 으응!”
“한 번 더.”
“아, 알았어!”
[습격의 선율(2)]
[일루미나의 선율이 용사들의 마음을 달랩니다.]
[모든 용사 멘탈리티 +2]
[‘타고난 가희’ 특징으로 인해 1의 멘탈리티를 추가로 회복합니다.]
[모든 용사 치명타율 +5]
[모든 용사 속도 +1]
[‘타고난 가희’ 특징으로 인해 1의 치명타율이 추가로 상승합니다.]
[더 이상 효과가 중첩되지 않습니다.]
[중첩된 선율은 3턴간 유지됩니다.]
[이번 전투에 한해 습격의 선율을 다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버프의 종류를 바꾸는 선율 교체, 기존 버프를 계속 유지하는 선율 유지, 그리고 기존 버프 효과를 두 배로 올리는 선율 중첩 중에 중첩을 택했다. 페널티가 있긴 하지만 완전 도박수까진 아니었다. 카야와 셰이의 속도를 1 더 올림으로써 예술품-음유시인의 속도를 추월하기 위함이 첫 번째 이유였고, 치명타율을 한 번 더 올리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만약 일루미나가 선율을 유지했다면 셰이와 카야와 예술품-음유시인은 속도 굴림이 발생했겠지만, 내 명령에 의해 첫 번째 현을 끊어질 정도로 뜯어 속도를 1 더 올려주었다. 현재셰이와 카야의 속도는 6. 올라간치명타율은 12.
충분히 해볼 만했다.
‘아직 방어 스킬은 안 써도 돼. 나까진 버틸 만하고, 당장 일루미나에게 치명적인 공격은 안 닿을 거 같으니… 이번엔 정의 집행으로 가본다.’
베스티아 타락 사건 때 셰이가 선보였던 쌍낙인 쌍치명타 뽕맛이 떠올랐다. 옛 뽕맛에 의지하면 안 되긴 하지만, 그때보다 치명타율이 12나 상승했다. 근거 있는 수였다.
셰이의 클레이모어에 은색 광채가 집적했다. 곧 은색의 거대한 천칭이 공중에 나타났는데, 온갖 지랄발광했던 가면 놈과는 다르게 예술가놈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꼭 평가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씨발 사이코새끼가.
“하아아앗!”
[정의 집행]
[놀라운 일격!]
[셰이가 예술품-성전사에게 13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35/48]
[용사들의 마음속에 자그마한 용기가싹틉니다.]
[셰이 멘탈리티 +3]
[카야 멘탈리티 +2]
[유진 멘탈리티 +2]
[일루미나 멘탈리티 +3]
[셰이가 예술품-현상금 사냥꾼에게 5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5/40]
‘스읍….’
한 놈한테 치명타가 터지긴 했지만 결과가 좋지는 않았다. 데미지 총합만 따지면 18딜로 나쁘진 않았으나 분산이 되었다는 게 안 좋았다. 어정쩡했다. 차라리 치명타가 현상금 사냥꾼쪽에 터졌으면 마무리까지 노려볼 수도 있었겠지만….
카야의 차례였다. 그녀의 턴이끝나면 괴물들의 차례였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녀가 한 건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최소 하나라도. 안 그럼 진짜 큰일 난다…!’
도끼를 들어 현상금 사냥꾼을 가리켰다. 하나라도 줄여야했다. 힐끔 도끼날을 바라본 카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곧장 철퇴를 치켜들고 앞으로 달려갔다. 버프 때문인지, 아니면 분노 때문인지 한층 더 빨리 쇄도하는 그녀의 뒷모습에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제발, 제발.’
라엘라님. 아니, 장모님. 제가 많이 따르고 의지하는 거 아시죠?
그런 내 기도가 천상에 닿은 것일까.
평소대로 괴물의 머리를 강타하려던 카야의 철퇴의 궤도가 살짝 틀어졌다.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았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아주 미세하게 말이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Volente Deo - 신의 뜻이 철퇴에 깃듭니다.]
[예술품-현상금 사냥꾼이 남은 체력에 상관없이 즉사합니다.]
[예술품-현상금 사냥꾼이 죽었습니다.]
[잠시나마 강림한 신의 뜻이 용사들의 허한 마음을 보살펴줍니다.]
[셰이 멘탈리티 +7]
[카야 멘탈리티 +7]
[유진 멘탈리티 +7]
[일루미나 멘탈리티 +6]
[카야가 재행동을 얻습니다.]
내 기도는 보답받았다.
어떤 사특한 것도 거부하는 성스러운 빛이 삽시간에 괴물을 집어삼켰다. 은색 천칭을 볼 때도 여유로웠던 예술가 놈도 이번만큼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공포무새들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곳에서 그 무엇보다도 공포 그 자체를 배제하는 한 줄기 빛은, 지금같이 답답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크나큰 용기를 선사해주었다.
적 2열에 서 있던 놈이 사라지자 예술품-음유시인과 예술가놈이 한 칸씩 앞으로 당겨졌다.
빛의 기둥이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카야의 턴이었다. 순간, 한 번 더 즉사를 노려볼까 싶었지만 그건 오버였다. 5.6%였다. 두 번 연속 터진다? 물론 터지면 좋겠지만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봐야 했다.
‘카야. 가당찮게 음유시인 흉내내는 놈에게 회개 좀 시켜줘.’
한 방에 죽일 수 없다면, 최소한 cc기라도 걸고 싶었다. 괴물들이 버프를 끼얹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회개하라]
카야의 철퇴 머리가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카야는 한 차례 로자리오를 살짝 움켜쥔 다음, 괴물의 정수리가 아닌 옆머리를 전력으로 후려쳤다.
[카야가 예술품-음유시인에게 4의 데미지를 입힙니다.]
[남은 체력 26/30]
[예술품-음유시인이 저항에 실패합니다.]
[예술품-음유시인이 상태이상 ‘기절’(1턴)에 걸립니다.]
“좋았어.”
[예술품-음유시인이 턴을 넘깁니다.]
[상태이상 ‘기절’에서 벗어났습니다.]
턴도 추월 당한데다가 행동까지 제지당한 음유시인이 할 수 있는 거라곤 턴을 넘기는 것뿐.
이제 남은 건 성전사와 예술가놈이었다.
‘진짜… 3연속 소환은 아니겠지. 선 씨게 넘는 거야 진짜로.’
[공포에 찬미하는 검]
[예술품-성전사가 카야에게 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20/20]
[카야 멘탈리티 –4]
소환물의 간지러운 공격이 넘어가고, 드디어 예술가놈의 턴이 되었다. 만약 이번에도 소환 패턴을 보인다면….
“내 예술품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보군… 흐음… 조금 더… 수준이 높은 것을… 원하는 듯 하니….”
예술가놈이 또 좆같이 음산한 소리를 지껄이며, 아까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뭐지? 일단 소환은 아니고. 버프? 광역 멘탈? 단일 공격? 디벞?’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직접… 어울려주도록 하지….”
구부정하게 움츠리고 있던 예술가놈이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나보다 훨씬 커보였다. 완전무표정인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예술가놈은 제 앙상한 손을 위로 뻗는가 싶더니 누군가를 가리켰다. 나도 모르게 그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을 좇았고….
[재료 손질]
불길한 이름의 스킬 이름과 함께.
푸우욱-
“……………………에?”
반응은 한 박자, 늦게 터졌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일루미나!!!!!”
[일루미나가 상태이상 ‘억류’에 걸렸습니다.]
[억류를 해제하기 위해선 공포의 예술가의 체력을 일정 이상 저하시키거나 ‘전시대’를 파괴해야 합니다.]
[일루미나는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습니다.]
[일루미나는 턴이 지날 때마다 1의 체력을 잃습니다.]
[남은 체력 14/15]
셰이가 정의 집행을 시전하면 갑자기 나타나는 은색 천칭처럼, 정육점 갈고리 같이 생긴 ‘전시대’가 일루미나의 머리 위에 생긴 것 또한 갑작스런 일이었다.
예술가놈이 일루미나를 가리키는 순간, 갈고리는 일루미나의 등을 파고들어 삽시간에 공중으로 끌어올렸다. 피가 후두두둑 바닥에 떨어졌다.
“아아아… 헨드리이이익! 아아아아아악!!!”
“일루미나!!! 씨바아알--!!!”
“일루미나! 일루미나!!”
“언니!!!”
일루미나의 비명소리는 처절했다. 당장 체력 자체가 많이 다는 기술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임팩트가 장난 아니었다. 동료가 산채로 꼬챙이가 되어 피가 빠져 죽어가는 건… 맨정신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거기에 자신의 턴당 1 감소가 아니었다. 턴이 지날 때마다 1 감소였다. 어떠한 추가 공격을 받지 않는다 가정해도, 이대로 가다간 3라운드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일루미나의 체력을 채운다?
그만큼 일루미나가 고통을 겪는 기간이 더 늘어나는 거다. 지금 그녀는 살아있는 모래시계, 아니 살아있는 혈액시계가 되었다.
“아아… 처절히 울부짖는 소리…그것조차 예술일지니….”
“저 씨발 사이코새끼가!!”
“일루미나! 조금만, 조금만견디십시오! 반드시 구해줄 테니!!”
다시 내 턴이 되었다. 재빨리 전시대의 스펙을 확인했다. 체력이 3이었다. 근데 방어력이 표시되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딱 하나였다.
‘3이 아니라, 3대.’
일루미나가 실시간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저걸 세 대 쳐서 부시느냐, 아니면 저놈을 조져서 해제할 것이냐.
전자는 일루미나의 고통을 최대한 빨리 덜어낼 수 있겠지만 우리 셋의 공격을 모조리 쏟아부어야했고, 후자는 일루미나의 억류가 풀리는 체력 감소량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는점이 있었다.
“…미안, 일루미나.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줘.”
[수배범 발견]
내 선택은 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