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2구역(11)
[정예 괴물, 최후의 문지기를 쓰러뜨렸습니다.]
[???, 최후의 도피처가 개방되었습니다.]
내가 치명타로 막타를 친 후 기쁨의 함성을 토하며 지랄 발광을 하다가 피를 토하자 동료들이난리법석을 떤 지가 대략 10여 분.
최후의 문지기는 토벌 난이도에 비해 어떠한 보상도 없어서 다시 한 번 뚜껑이 열릴 뻔 했지만, 최후의 도피처라는 딱 봐도 뭔가 있어보이는 공간이 개방됐다는 메시지가 정신머릴 붙잡았다.
‘비밀방!’
최후의 도피처. 딱 봐도 비밀방스러운 이름이 아닌가. 오랜 시간 강행군 끝에 엄청 질긴 괴물을 잡은 우린 빈말로도 좋은 상태라 보기 어려웠지만,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쉬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지만, 지금 쉬었다간 그대로 몸 하나 까딱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자.”
더 롱 테러에서의 비밀방은 당첨확률이 높은 복권이었고, 높은 확률로 괴물이 등장하지 않았다. 문자대로너무 비밀스러워 발견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게다가 들어가기도 전에 최후의 문지기라는 놈을 잡았으니, 안쪽에괴물이 없을 확률이 높았다. 우린 지친 몸을 이끌고 문지기놈이 그렇게나 끈질기게 지켰던 문으로 향했다.
[최후의 도피처에 입장했습니다.]
[최후의 도피처에서는 자연적으로 멘탈리티가 하락하지 않습니다.]
‘오오!’
그렇게 크지 않았던 문에 비해 내부 공간이 생각보다 넓었다. 내부는 꼭 집주인이 아주 오래 전에 자리를 비운 듯한 모습이었는데, 조잡한 책장이나 책상, 의자 따위의 가구 위에 먼지가 쌓여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다 둘러보자. 먼지 많으니까 날리지 않게 조심하고.”
“예.”
괴물이나 함정은 없었다.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쉰 우리는 가구를 적당히 밀어내고 물을 적신 천으로 먼지를 좀 닦아낸 다음 텐트를 설치했다. 의도치 않게 휴식처를 찾아낸 셈이었으니, 마음 놓고 휴식할 계획이었다.
‘휴식처랑은 달리 멘탈리티랑 체력은 회복이 안 될 것같지만.’
그래도 마음 놓고 쉴 수 있다는 게 어딘가. 긴장감이 풀리면서 중상과 강행군의 피로함이 확 몰려왔는지 일루미나는 벌써 골아 떨어졌고, 카야랑 셰이도 눈이 반절 넘게 감겨있었다.
“너희도 들어가서 자.”
“대장은…?”
“돈 되는 거, 도움 되는 거 있나 찾아보려고.”
“저도.”
“나 때문에 굳이 고생할 필요 없어. 이건 그냥 내가 궁금해서 그러는 거니까.”
“그래도 혼자보단 둘이.”
“쉬어둬. 명령이야. 셰이, 너도.”
“…네에.”
카야랑 셰이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갑옷을 벗는 걸 뒤로하며 보물이 있을 법한 곳을 본격적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책들이 꽤 있네… 스킬북일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가.”
먼지가 많은 걸 봐서 사람이 이용한 지 꽤 오래된 것 같지만, 가구를 보나 가구 배치를 보나 분명히 누군가가 머무른 곳임이 분명했다.
‘던전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호기심에 책이라기보단 종이 뭉치를 뭉친 것에 가까운 걸 하나 집어들었다. 먼지를 털어내고 스킬북이 아니란 걸 확인한 후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표지를 넘겼다.
「누구일지 모르는 누군가를 위한 하소연 그 첫 번째.」
“뭐야 이건.”
「도망, 도망, 도망. 이곳을 찾은 건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아니, 정말로 천운인 건가. 천운이라는 게 있었으면 애초에 이런 끔찍한 공간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내가 이런 곳에 갇혀 추하게 발버둥치지도 않았겠지.」
아마 이곳에 머문 사람이 남긴 일기 같았다. 더 롱 테러 공식 설정에선 공포에 의해 희생되거나 미쳐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짤막하게 나왔지만, 던전 안에서 공포 숭배자가 아닌 멀쩡해 보이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돈이나 도움, 그 어느 쪽에도 해당될 것 같지 않았지만 내 손은 종이를 넘기고 있었다.
「백 명이 넘었던 생존자들은 네 명이 남았다. 그 때 그 날 이후로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었다. 죽거나, 미쳐버리거나, 한 번 더 미쳐서 그 끔찍한 것을 숭배하거나. 미치지 않기 위해, 그 끔찍한 것을 숭배하고 싶지 않아서, 숭배자놈들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나와 세 명의 생존자들은 계속 도망쳤다. 그리고 이곳에 도착한 난, 직감했다.
여기가, 마지막이 될 거라고.」
“….”
사라락-
「이 공간 안에 있으면 불안함을 비롯한 공포심이 심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먹을 것도, 수원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망칠 때, 다른 생존자가 죽었을 때 조금씩 챙겼던 것들로는 며칠 가지 못할 것이다. 먹는 거야 어떻게든 버틴다고는 하지만, 목 마른 거는 3일도 채 가지 못할 텐데.」
사라락-
「험난한 도피생활에지친 우리는 하루를 통째로 날렸다. 날린 시간이 하루인지는 모른다. 그냥 배고픔과 목마름에 기반한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살고 싶다면 누군가는 문밖으로 나서서 먹을 것, 최소한 수원이라도 찾아봐야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설 생각이 없었다. 힘들었으니까. 그리고 희망이 없었으니까. 나도 이곳이 마지막이라는 걸 깨닫고는 이런 거나 끄적거리고 있지 않나. 펜 같은 건 뭐하러 들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먹을 거 하나 더 챙길 걸.」
「나를 비롯한 최후의 생존자들은 나름 능력자들이었다. 한 명은 수녀요, 한 명은 사냥꾼이었고, 다른 한 명은 꽤 어렸지만 길눈과 감이 좋은 아이였다. 나? 나는 그들의 훌륭한 고기방패였다. 그들은 나보고 훌륭한 전사라고 말해줬지만, 글쎄. 난 날 잘 안다. 내가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내가 훌륭한 전사라서가 아니라,시기적절하게 훌륭한 사람들의 곁에 빌붙을 수 있어서라고.」
「체감 상 3일이 좀 안 되게 지났다. 이틀일 수도 있고, 나흘일 수도 있었다. 아니 나흘은 좀 아닌가? 어쨌든 대부분 멍하니 누워있던 생존자들이 목마름을 호소하며 밖을 나갔다. 나는 나가지 않았다. 이곳저곳 쑤시는 곳도 많았고 방해만 될 것 같았다. 그들을 응원해주었다. 소득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상관없었다. 그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글은 거기서 끝이었다.
“뭐야. 뭔데. 왜 쓰다 만 건데!”
혹시나 내가 두 장을 넘겼나, 놓친 게 있나 싶어 탈탈 털어봤지만 뒷내용은 없었다. 다른 종이뭉치도 살펴봤지만 통째로 비어있었다.
“아니 서두에 첫 번째라고 써놓고 두 번째는커녕 완성조차 안 했잖아?”
이미 죽은 것 같은 사람에게 짜증내봐야 바뀌는 건 없었다. 그냥 점점 흥미진진하던 차에 끊기는 게 찝찝했을 뿐이었다. 중요한 건 보물이었다.
‘아까 일차적으로 둘러봤을 때 아무도 발견 못 했어. 설마… 꽝은 아니겠지?’
짜잔, 최후의 대피처는 알고 보니 숨겨진 반쪽짜리 휴식처였다?!
가능성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경질이 났다.
‘그럴 리 없어! 씨발 무슨 반쪽짜리 휴식처 따위 앞에 그딴 괴물을 처박아놓냐고! 아니, 애초에 이 생존자라는 인간들은 저걸 어떻게 뚫고 진입한 거지?’
나는 HAT의 대장이다. 셰이가 이 길을 택하긴 했지만 결국 갈림길의 진입을 명하고 그녀에게 길을 고르라 명한 건 나였다. 강행군과 지난한 전투를 거쳤다. 근데 아무 것도 없다?
그녀들은 그런가보다, 어쩔 수 없는가보다, 휴식이라도 취했으니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그렇게 된다면 난 그녀들에게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분명 여긴 비밀방이라는 감이 팍 왔는데!
그리 넓지도 않은 공간을 한 시간 넘게 수색했다. 점점 오기가 생겼다. 예전에 10% 승률에서 승수가 딱 한 판 모자란 내 게임 기록을 보고 오기가 생겼던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최후의 문지기에게서 보상이 없어서 더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개고생한 거에 대한 보상을 얻어야겠다는 보상심리. 하다못해 이 공간이 진짜 휴식처처럼 컨디션 회복이라도 시켜줬으면 덜했겠지만….
‘이대로 끝날 리 없어. 아무리 더 롱 테러가 불친절한 운빨좆망겜이라 해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이 법칙 하나만큼은 지켜왔어. 근데 저런 괴물이 지키고 있는 장소에 보물 하나 없다? 지금 내가 속해있는 던전보다 훨씬 쉬운 곳을 들락날락할 대부분의 용사들도 그렇게 금화를 쓸어모으는데?’
보물이 없는 게 아니라 내가 못 찾은 것이라 생각하고 동료들을 깨우지 않을 선에서 모조리 뒤집어 엎고 다녔다. 그 과정에서 먼지를 꽤나 먹었지만 먼지 좀 먹는다고 안 죽었다. 하지만 몸이 한계였다. 전투도 전투였고, 열 시간 가까이 일루미나를 업었던 게 컸다. 팔다리가 무겁게 쳐지고 눈이 감겨왔다.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어 현타가 왔다. 급 귀찮아졌다.
“하씨… 한숨 푹 자고 같이 찾는 게 낫겠지.”
그녀들이 푹자고 일어났을 때 짜잔- 하면서 기분 좋게 하고 싶었는데, 텄다고 생각하며 텐트로 돌아기기로 했다.
툭-
“응?”
텐트 바로 코앞.
무언가 몸에 걸리는 소리가 나 고갤 돌려보니….
드르르륵-
“…하?”
벽인줄 알았던 곳에 ‘안쪽’이 있었다.
“상자 속의 상자도 아니고, 비밀방 속의 비밀방이라니. 이야.”
홀린 듯 안쪽으로 들어갔다.
드르르륵-
**
“미나! 어딜 또 그렇게 싸돌아다녔던 거야! 어?”
“아, 안 싸돌아다녔는데요?”
“안 싸돌아다녀…? 아침 먹고 나서 바로 없어졌다가 밤 늦게서야 돌아온 녀석이?”
찰싹!
“아악!”
“엄마가! 말했지! 마을 밖에! 혼자! 나가는 건! 위험하다고!”
“악! 아악! 폭력 반대! 아악!”
“어휴, 정말. 이 왈가닥을 어쩌면 좋아!”
어린 여우는 제 엄마의 무릎 위에 엎어진 채 엉덩이를 두들겨 맞았다. 여우는 엄마를 사랑했지만, 그래도 엄마의 걱정이 늘 과하다고 생각했다. 자긴 마냥 어리지도 않았고 달리기도 빨랐다. 마을 밖은 위험하다고 맨날 그러지만 정작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위험에 처한 적은 없었다. 엄마의 과한 걱정은 아빠가 사라진 이후로 두 배 이상 심해졌다.
“씨잉… 아포….”
제 엉덩이를 문지르던 어린 여우는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엉덩이가화끈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최근 발견했던 신경 쓰이는 장소가 계속 떠올라서였다. 문제는 그 장소가 마을과 좀 떨어져 있는 곳이라 허락을 맡을 자신이 없다는 것. 어린 여우는 내일 날이 밝고 엄마가 일을 나가자마자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억지로 잠을 청하려 했다. 그녀가 눈을 감은 순간.
- 불이야! 불이야!!!
- 불… 습격이다! 습겨어어억!! 커헉!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방문이 벌컥 열렸다. 잠옷 차림의 어미가 어린 여우를 와락 껴안고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세웠다.
“어, 엄마? 무슨 일이에요?”
“불이 났어.”
“불이요? 어, 어디에요?”
“거진 전부.”
“네?”
“미나야. 어서.”
젊은 여우 모녀는 화급히 집을 빠져나갔다. 어미는 평소 그녀의 딸에겐 절대 가지 말라던 길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어, 엄마.”
“미나야. 마음 굳게 먹어야 한다.”
“네? 엄마, 가, 갑자기 왜 그래요!”
- 잡아!
-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대, 대체 무슨 일이.”
“미나야.”
어미가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곳으로 쭉 달리다보면, 여우처럼 생긴 돌로 된 조각이 있어. 그 밑을 잘 살펴보면 숨은 공간이 나타날 건데, 거기에 들어가 있어.”
“어, 엄마는? 엄마는요!”
- 저쪽이다! 저쪽에도 있어!
“엄마도 곧 갈게.”
“시, 싫어요! 같이 가! 엄마도 같이….”
“가.”
“엄마!”
“….”
“엄마!!”
“….”
“엄마아아아!!!”
“엄마 아닙니다.”
“에…? 엄마…?”
“제가 엄마는 아니지만, 이걸로 안정이 된다면 기꺼이 안아드리겠습니다.”
일루미나의 앞에 카야의 가슴이 있었다. 눈을 몇 번 꿈뻑이고 나서야 꿈이었다는 걸 깨달은 일루미나가 물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헤, 헨드릭. 헨드릭은?”
“….”
“어디 갔어? 왜, 왜 대답이 없는 거야?”
“대장은…… 사라졌습니다.”
일루미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