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2구역(12)
드르르륵- 쿵-!
“어…?”
등잔 밑이 어둡다고, 텐트 근처에서 우연히 드러난 비밀방 안의 비밀방에 들어간 순간 건드린 적 없는 문이 육중한 소릴 내며 닫혔다. 삽시간에 주위가 어두워졌다. 뒤로 물러나 문을 밀어봤지만 꿈쩍도 안 했다.
‘씨발, 깨워서라도 같이 들어왔어야 했나?’
어두워서 앞이 안 보였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고 문이 열릴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상당히좁은 외길이었기에 오른손으로 벽을 짚어가며 조금씩 움직였다.
달칵-
“아!”
그러다 무언가 눌리는 소리가 들리며 내 주먹의 반절 정도 크기의 빛덩이가 떠올랐다. 빛덩이는 내얼굴 앞으로 다가오더니 이내 내 몸을 빙글빙글 돌았다. 이게 뭔가 싶어서 만져보려했지만 당연히 만져지진 않았다.
‘뭔진 모르겠지만 해는 안 끼치는 거 같으니 횃불 대용으로 쓰면 될 거고… 여긴 대체 무슨 공간이지?’
내 몸 주위를 돌던 빛덩이가 다시 내 눈앞에 떠다녔다. 커졌다 작아졌다하는 게 꼭 앞으로 안 가고 뭐하냐고 재촉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 한 걸음 나아가자 빛덩이가 그만큼 멀어졌다. 명백했다. 날 인도하고 있었다. 저 정체불명의 빛덩이의 행동은 꺼져가던 기대심이라는 불씨를 다시 살려내고 있었다.
빛덩이의 인도는 그리 길지 않았다. 체감상 몇 백 걸음 정도 거리에서 빛덩이가 갑자기 위로 치솟았다. 삽시간에 다시 어두워졌지만, 다시 밝아졌다. 그리고 난 다른 의미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뭐야…?”
두 갈림길 앞에 평평한 돌이 있었고, 그 위에 낡은 종이뭉치와 로자리오가 놓여있었는데 거기까진 딱히 당황할 만한 건 아니었다. 돌 앞에 박혀있는 작은 팻말이 문제였다.
←자애
관용→
‘자애와 관용? 설마 거기에 쓰여 있던 수녀가 라엘라님을 섬기는 치유 수녀였나?’
그렇다면 저 로자리오가 수녀의 유품일 확률이 높아보였다.
‘보상이 아예 없는 것보다야 낫긴 한데….’
막 엄청 대단하거나 값나가보이진 않았다. 순간 실망감이 차올랐으나 우선 종이뭉치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펼쳐보기 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제서야 첫 장을 넘겼다. 종이엔 필체가 다른, 다른 화자의 일기 비슷한 것이 적혀있었다.
「적어도 이곳에서만은, 자애와 관용은 없다.」
“허.”
첫 문장부터 강렬했다.
「물론 여전히 라엘라님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건 곧 라엘라님의 실재를 증명하는 것이고, 라엘라님이 곧 자애와 관용의 개념 그 자체일지니 이 세상에 자애와 관용이 살아 숨쉬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곳은 아니었다. 그놈이나, 그놈을 섬기는 놈들에게 자애와 관용은 없었다. 또한 자애와 관용이 통하지도 않았다.」
정갈하고 절제된 글씨체에서 절망이 묻어나왔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나는어떤 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그저 물과 식량을 소비하며 오물과 짜증을 토해내는 생존자라는 이름의 비참한 동물로 목숨을 연명해야만 하는 것일까. 다른 이들은 틈만 나면 내가 있어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며 추켜세워줬지만, 글쎄. 이런 곳에 라엘라님의 힘이 조금이나마 통하고 있다는 기적이 아니었으면 난 쓸모없는 짐덩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든든한 전사도, 뛰어난 사냥꾼도, 감이 좋은 길잡이도. 그놈에게서 잘 도망치는 게 최선이었다. 도망을 거듭하다보니 최후의 생존자들이 되었지만, 말 그대로 살아서 존재하기만 하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길잡이가 배를 움켜쥐었다.」
「마지막 도피처에서, 먹을 것은 없었다. 무슨 원리인지 그놈의 기운은 차단되는 모양이지만 언제 들킬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라엘라님의 능력은 아직 사용할 수 있었다.」
「사냥꾼이 배를 움켜쥐었다.」
「전사는 배를 움켜쥐진 않았지만, 험난한 도피 생활 속에서도 생존자들을 지켜주었던 강건한 심신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라엘라시여.」
「지금부터 제가 하는 행동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주시옵고, 부디 다른 생존자들에게 자애를 베풀어주시길 바라옵니다. 부디, 죄책감을 가지지 않게, 보듬어주시옵소서.」
「제 몸 하나로, 몇 주일은 가지 않겠습니까.」
“…….”
글은 거기서 끝이었다. 눈을 떼자마자 종이가바스락 소릴 내며 분해되었다. 남은 건 낡은 로자리오와 이름 모를 수녀가 남긴 절망 및 체념의 감정이었다.
이곳에 생존자가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던전이 생긴 지 최소 백 년은 넘었으니까. 하지만 그냥 막연히 옛날에 생존자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 정도로만 아는 것하고, 이런 씁쓸하고 절망적인 비하인드 스토리를 아는 것하곤 많이 달랐다. 나는 몰입을 잘 하는 편이었고, 최후의 4인이라 할 수 있는 듬직한 전사, 신실한 수녀, 뛰어난 사냥꾼, 감이 좋은 길잡이의 당시 상황을 상상하고 말았다.
“왜 하필 4명이야.”
당연히 내가 이곳을 발견하고 일지를 읽은 건 다 우연일 것이다. 하지만 이입이 됐다.
듬직한 성전사 셰이, 신실한 전투 수녀 카야, 뛰어나진 않지만 어쨌든 현상금 사냥꾼인 나, 길잡이 같은 건 아니지만 뛰어난 신체 감각을 타고난 수인인 일루미나까지.
마치 우리들의 최후가 이렇게 될 것이라는 재수 없는 상상을 하고 만 것이다.
‘아냐. 괜한 망상으로 호들갑 떨지말자.’
뺨을 때렸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얼른 챙길 거 챙기고 이 비밀방을 빠져나가야 했다. 동료들은 깊은 잠을 자고 있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로자리오를 집어들었다.
[희생의 로자리오]
- 적용 대상 : 전투 수녀, 치유 수녀
- 동료 치유 효과 + 20%
- 자기 자신은 치유할 수 없음
- 치유 스킬 발동시 체력 1 소모
“….”
씁쓸한 이름의 아티팩트였다. 아티팩트 효과도 효과만 보면 페널티가 좀 세다고 생각하는 수준에서 그쳤겠지만, 그 유래를 알고 나니 더 씁쓸해졌다. 그래도… 일단은 챙겼다.
문제는 갈림길이었다.
왼쪽은 자애, 오른쪽은 관용.
이 갈림길은 무엇을 뜻하는 거고, 갈림길의 끝엔 뭐가 있는 것일까.
최후까지 함께 살아남은 동료들을 챙기는 자애?
아무리 동료들을 위해서라지만,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게 만든 것에 대한 관용?
나는 고민 끝에 왼쪽 길 앞에 섰다. 판단의 근거는 별 거 아니었다.
감.
이젠 바스라져버린 수녀의 일기를 읽고, 로자리오를 집어들었을 때 맨 처음 느꼈던 그녀의 절망과 체념, 그 속에 수녀의 ‘자애’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따스한 자애와 냉철한 관용을.”
왼쪽 길에 발을 내딛자 빛덩이가 튀어나와 다시 내 앞길을 밝혔다. 이젠 저 빛덩이의 의도도, 정체도 알 것만 같았다.
“이름 모를 신실한 수녀님.”
휘익-
빛덩이는 좌우로 왔다갔다했다. 내 말을 부정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빛덩이가 어찌 움직이든 신경 안 쓰며 중얼거렸다.
“제 동료 중에도 라엘라님을 따르는 수녀가 있습니다. 그녀라면 당신처럼 자기희생을 주저없이 할 지도 모릅니다.”
부르르-
빛덩이가 격렬하게 깜빡거렸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제동료들은 강합니다. 우린 이곳에 스스로 들어왔습니다. 우린 도망자가 아닙니다. 마지막 생존자도 아닙니다. 도전자이며, 최초의 정복자가 될 겁니다. 그 빌어먹을 공포포기무새관음증변태새끼는 꼭 조져버릴 겁니다.”
빛덩이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한동안 내 얼굴 앞에서 둥둥 떠다니던 빛덩이는 이내 내 정수리 위로 올라왔다.꼭 랜턴 달린 헬멧을 쓴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지켜봐주십시오. 당신들의 넋을 기리고, 사람들을, 이곳을 좆같은 던전으로 만들어버린 그새끼에게 복수해주겠습니다.”
빛이 강해졌다. 길이 한층 더 잘 보였다. 아마 길잡이 또는 사냥꾼의 유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하나둘 거치면 이곳도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나아갔다.
발걸음이 빨라져서 그런지 두 번째 갈림길이 나타났다. 이번엔 평평한 돌 같은 게 없었다. 바닥에 꽂혀있는 단도 몇 개와 볼트들이 얹어져있는 석궁, 그리고 작은 쪽지 하나뿐이었다.
“이번엔 사냥꾼인가?”
쪽지를 집어들었다. 전사랑 수녀의 종이뭉치에 비하면 크기도 작고 종이도 한 장밖에 안 되는 터라 내용이 많이 써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쫓기기만 하는, 언제 죽을지 몰라 굴 속에 숨어있는 내가 어찌 사냥꾼이라 할 수 있겠나. 비록 지금까진 겁먹은 토끼처럼 굴었지만…
죽기 직전만큼은, 사냥꾼으로서 죽겠다.」
“….”
사냥꾼의 쪽지는 짧고 굵직했다. 낡은 단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는 남자일지 여자일지 모를 사냥꾼의 최후는 어떻게 됐을까 상상했다. 정말 이 쪽지에 적혀있는 대로 마지막까지 공포 숭배자들을 조지고 다녔을까. 아니면 스스로의 처지에 대한 자조, 그것을 못 견딘 허세에 불과했을까.
[최후의 단도]
- 적용 대상 : 보물 사냥꾼, 현상금 사냥꾼
- 체력이 50% 미만일 때 공격력 +1
- 체력이 25% 미만일 때 공격력 +2
- 체력이 10% 미만일 때 공격력 +3
- 사경 상태일 때 공격력 +5
[침묵의 석궁]
- 적용 대상 : 석궁수
- 첫 공격에 한해 치명타율 +33
“…당신의 최후는 제가 이어가겠습니다.”
빛덩이는 한 층 더 밝아졌고, 힘차게 걸어가는 내 허리춤엔 단도와 석궁이 매달려 있었다.
**
“아무리 뒤져봐도 없어요.”
“여기서 나간 흔적도 없습니다.”
“아아….”
헨드릭이 사라진 지 몇 시간 째.
깊이 잠들긴 했지만 헨드릭과 같이 자지 못해서인지 얼마 못 가서 일어났던 카야와 셰이는 헨드릭이 아예 보이지 않자 극도의 불안함을 느꼈다. 최후의 피난처를 쥐 잡듯 뒤졌음에도 헨드릭이 보이지 않자 일루미나까지 깨우려 했으나 그녀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악몽을 꾸고 있었고, 잠시 그녀를 달랠 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멍하니 쪼그려 앉아있는 그녀들의 표정은 굉장히 처량해보였다.
“잘못된 건 아닐까…? 숨겨진 함정 같은 것이 발동돼서, 혹시 헨드릭이 당해버린 건.”
“그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요.”
“맨 처음에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함정 같은 건 없었습니다.”
“나간 흔적도 없고, 이 안에도 없으면… 그럼 어디로 사라진 건데…?”
“그건….”
일루미나의 맥 빠진 물음에 카야랑 셰이는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그딴 소리 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찾아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일루미나의 표정이 너무나 절망적이라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대체 무슨 꿈을 꾸었기에 그러는 거예요 아까부터. 자꾸 부정적인 얘기만하고.”
“아아… 하필 지금 그 꿈을 꿔버렸어….”
“그니까 그게 뭐냐니까요?”
일루미나는 대충 자신의 꿈을 알려주었다. 정신이 날카로워졌던 카야랑 셰이는 섣불리 더 추궁할 수 없었다.
“그 꿈을 꾸면, 어김없이 그랬어… 뭔가 소중한 걸 잃거나, 친했던 사람이 변고를 당하거나….”
“꿈은 꿈일 뿐이에요.걱정하지 말아요. 대장님은 말도 없이 사라지거나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셰이 말이 맞습니다. 실제 같은 꿈은 있어도 꿈은 실제가 아닙니다. 모종의 이유로 대장이 사라진 것은 맞지만, 차분하게 기다리다보면 대장은 보란 듯이 돌아올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들고 올 수도 있고요. 기다리는 게 싫으면 다시 수색하면 됩니다. 대장은 우릴 버리지 않습니다.”
“그것 참 훌륭한 대장이네.”
“예. 대장은 훌륭한 대장이니, 그런 불길한 예측은 그만 내려두고…… 흐에?”
목에는 로자리오, 벨트엔 단도와 석궁을 달고 왼손엔 나침반과 고이 접힌 지도를 든 헨드릭은자신에게 향하는 이글거리는 세 쌍의 눈동자를 보며 등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어… 일단, 미안.”
“대장님!”
“헨드릭!”
“…유진!!”
“어, 어어? 악! 자, 잠깐! 뼈, 뼈 맞았어! 아아아악!!”
“어딜 갔으면! 갔다고! 얘기를!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맞아! 괜히 걱정했잖아!”
“자, 잘못했, 잠까안!! 아악! 카, 카야! 거긴 안 돼! 터져! 터진다고!!”
왠지 최후의 생존자들의 유품들에게서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