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3구역(6)
3-10의 문을 열었다. 문 안쪽은 역시나 어두웠다. 하지만 포탈만큼 어둡진 않았다. 오히려 일직선 모양의 길이 아주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그리로 오라는 듯 도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린 고갤 끄덕이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그 선택]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의 빛이 줄어들면서 한층 더 어둠이 짙어졌고, 그 속에서 튀어나온 목소리가 절로 몸을 움츠러들게 하고 무겁게 했다. 하지만 우리의 전진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우린 동료의 뒷모습을 보며, 내 뒤에 있을 동료를 생각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 발걸음]
목소리는 우리의 전진이 고깝다는 듯 다시 한번 우릴 저지했다. 목소리를인지하고 단어를 듣는 순간 발바닥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주 흡착력이 강한 바닥에 딱 달라붙은 것 같았다. 움직이지 못하겠는 건 발뿐만이 아니었다. 강제로 상체가 수그러지고 무릎이 굽혀졌다. 엄청나게 무거운 무언가가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안압이 높아졌다.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눈은 지금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을 것이다.
‘겨우, 이 정도로 무너지려고, 여기까지 기어들어 온 줄 알아?’
무릎에 손을 짚으며가까스로 발바닥을 떼는데 성공했다. 나와 비슷한 타이밍에 카야 또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카야가 일어났으니 셰이도 일어났을 확률이 높았다. 둘의 육체적 능력은 엇비슷하니까. 내 몸 지키기도 힘들지만 일루미나가 걱정됐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간신히 뒤를 돌아봤다. 내 걱정은 기우였다. 일루미나는 뒤를 돌아본 나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왜 뒤를 돌아봤냐고 따지는 듯했다. 어쩌면 난 그녀를 카야와 셰이보단 덜 믿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공포에끝까지 고생하긴 했지만 끝내 극복해 각성까지 한 그녀에게 실례를 한 셈이었다.
‘일루미나는 짐이 아니니까.’
다시 한 걸음 앞으로.
[그 판단 때문에]
반쯤 수그린 채 앞으로 나아가던 나는 하마터면 개구리처럼 납작 엎어질 뻔했다. 압박이 더 심해졌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이래도 감히 더 움직일 거냐고, 이래도 움직일 생각이 드느냐고 시험하는 듯 했다.
“씨이, 바아아알……!!”
직감했다.
여기서 멈추면 보스놈 면상을 마주하기도 전에 험한 꼴을 당하겠다고, 그건 필시 단순히 선턴 뺏기는 위압 수준으로 끝나지 않겠다고.
‘절대, 절대로 멈춰선 안 돼…!’
설령 기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전진해야 했다. 멈춘 순간, 그 자리에서 영원히 멈출 수가 있었다.
어둠은 더욱 짙어졌고, 앞서가던 카야가 무릎을 꿇고 어떻게든 나아가려고 하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셰이의 등이 안 보이는 걸 봐선 그녀도 무릎을 꿇은 것 같았다.
‘씨발 새끼가, 3구역 보스라고 꼴에 폼 잡기는…!’
손목과 무릎에서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앞쪽에선 셰이인지 카야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플레이트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들어보니 뒤쪽에서도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힘내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보스새끼야. 딱 기다려라.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이러고 있지만… 이거만 이겨내면!’
그렇게 또 한 걸음, 아니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
[너의 심장이 터지리라]
“크, 허억……!”
그러나 단련된 의지력으로 몸을 이끌고 나가는 것도 보스놈의 네 번째 목소리가 들리자 한계를 맞이했다. 온몸이 짓눌리는 것도,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것도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심장이 꽉 쥐어짜이는 이 격통은 대체 어떻게 참아야 한단 말인가.
내 앞에서 기어가던 카야의 앞모습마저 보이지 않았다. 더 어두워져서인지, 아니면 내 시력이 맛이 간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죽을 것 같았다.
저놈 말대로, 정말로 심장이 터져버린 걸까.
의식이 흐릿해지고, 그러자 억지로 몰아쉬었던 숨마저 가빠졌다.
‘이대로 죽는 건가? 허무하게?’
여기까지 오기 위해 겪어야만 했던 수많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노력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그렇게 개고생했는데… 여기서 목소리만 듣고 주저앉는다?
아무리 저놈이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클리어 문턱 앞에서 좌절시킨 통곡의 심장놈이라 불리는 놈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최종 보스도 아닌 놈에게?
- 여신이시여…! 제 목숨을 바치노니 부디 저 간악한 자를 심판하소서!
- 내 목숨은 이곳에 들어온 순간 이미 버려뒀다고. 곱게 죽진 않을 거다.
- 지금껏 벌어놓은 게 얼만데 이런 곳에서 썩을 순 없지. 가자. 저놈은 털면 얼마나 나올까?
- 씨발 뒤지기 싫어! 싫다고! 근데… 의미 없이 뒤지는 건 더 싫어. 그러니까, 씨발. 의미있게 만들어라. 너희가.
이곳에 떨어지기 전 최근에 플레이했던 용사 캐릭터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특히 그중에서 통곡의 염통놈에게 죽음을 당하기 직전 그들이 내뱉었던 대사들은 수없이 많이 봤지만, 그때마다 울컥하는 게 있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했던 그들의 죽음에도 상당히 몰입했던 내가… 동료들이 염통놈에게 죽는 걸 본다면?
‘안 돼.’
지금 심장이 쥐어짜일 것만 같은 격통? 불과 조금 전에 이고통을 어떻게 참는다고 생각했던가?
그게 아니었다.
동료들이 죽는 걸 상상하니 그보다 더한 고통이 밀려왔다. 아까 전의 심장통이 파도라면, 지금 건 해일이었다. 파도는 견딜 수 있고 극복할 수 있지만, 해일은 아니었다. 그건 내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해일이 오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 닥쳐오는 파도에 잠기지 않고, 몸으로 막아 갈라야겠지.
그러려면?
일어나야지.
그러려면?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손과 팔에도 힘 꽉 주고 밀어내서 일어나야지.
그러려면?
심장통은 어떻게든 견디고, 숨은 어떻게든 모아서 외쳐야겠지.
일어나라고. 맞서 싸우라고. 누워있지 말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그러려면?
“씨이발 심장새끼야-!!!”
쩌적-
“어디 한 번 터뜨려봐!!! 또그 조옺같은 목소리 지껄여보라고---!!!”
쩌저적-
“공포새끼한테 미쳐가지고 제 심장 갈라서 바친 또라이새끼가, 누구 심장을 터뜨리려고 그 지랄하는 거냐!!!”
쩌저저적-
“심장을 바치고 나니 진심을 담을 수 없어서 계속 불신자들의 심장을 탐할 수 밖에 없는 거짓된 존재 따위가!!!”
쩌적, 쩌저적, 쩌저저저적-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적---------------------------------------------------------------------------------------------------------------------
챙그랑--!!!
[3구역 보스 괴물, ‘공포의 심장’이 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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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심장이 용사대에게 억압의 공포를 시전했습니다.]
[첫 번째 억압]
[저항 굴림]
용사대 : 4
공포의 심장 : 5
[용사대 전원의 멘탈리티가 감소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9]
[카야 멘탈리티 –7]
[유진 멘탈리티 –10]
[일루미나 멘탈리티 –11]
[용사대의 굴림에 역보정이 더해집니다.]
[두 번째 억압]
[저항 굴림]
용사대 : 3
공포의 심장 : 5
[용사대 전원의 멘탈리티가 10 감소합니다(고정).]
[용사대 전원의 체력이 최대 체력의 10%만큼 감소합니다.]
[셰이 남은 체력 31/35]
[카야 남은 체력 27/30]
[유진 남은 체력 22/24]
[일루미나 남은 체력 13/19]
[용사대의 굴림에 역보정이 더해집니다.]
[세 번째 억압]
[저항 굴림]
용사대 : 3
공포의 심장 : 5
[용사대 전원의 멘탈리티가 10 감소합니다(고정).]
[용사대 전원의 체력이 최대 체력의 10%만큼 감소합니다.]
[셰이 남은 체력 27/35]
[카야 남은 체력 24/30]
[유진 남은 체력 20/24]
[일루미나 남은 체력 11/19]
[용사대 전원의 속도가 1 감소합니다.]
[용사대의 굴림에 역보정이 더해집니다.]
[네 번째 억압]
[저항 굴림]
용사대 : 5
공포의 심장 : 5
[용사대가 네 번째 억압을 불완전하지만극복합니다.]
[용사대 전원에게 새겨진 심장 억압이 완화됩니다.]
[속도 체크를 뒤로 미루고 공포의 심장이 턴을 잡습니다.]
시야가 밝아졌다. 몸에 걸리는 부하가 확 줄어들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무형의 무게가 사라지자 중심을 잃고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꺅!”
그 탓에 일루미나를 깔아뭉개고 말았다. 감각이 살아있는 거 보니 일단 몸에 이상은 없는 것 같은데… 방금 전까지 겪었던 압력 때문에 온몸이 저릿하고 쑤셨다. 그래도 꼴사납게 주저앉아있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손을 잡아준 나는 떠오르는 메시지들을 주르륵 읽었다.
‘3-10 입장시 컷씬과 함께 다중으로 걸리는 억압, 그리고 마지막에 이어지는 심장 억압 디버프. 역시 염통 맞네.’
공포의 손이손 모양의 괴물이 아니고 공포의 눈이라 해서 눈알만 둥둥 떠다니는 괴물이 아니었듯, 공포의 심장이라 해서 심장같이 생긴 괴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염통놈은 더 롱 테러 설정상 본래의 심장을 공포새끼에게 바치고 그 대신 공포의 기운으로 빚어진 심장으로 대체하고 있는데, 그 기운이라는 게 영구적으로 지속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이, 특히 ‘공포’에 가득찬 불신자들의 심장을 연료로 삼아야 했다.
공포 숭배자놈들 중에 그 누구보다 공포놈에게 가까운 존재들 중 하나지만, 살기 위해서, 공포를 가까이 하기 위해서 공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이 꼭 필요한 모순된 존재.
공포의 심장.
통칭(멸칭) 염통놈이뻥 뚫려있는 제 명치 속 시커먼 기운을 품은 심장을 자랑하듯 우리 앞에 오연히 서 있었다.
‘이야… 일러 말고 실제로 보니까, 쫌 쫄리긴 하네?’
2m는 그냥 넘길 듯한 키. 떡 벌어진 어깨와 전신에 가득 찬 근육. 주위를 둘러싼 공포의 기운과 공간을 가득 채운 존재감.
누가 봐도 ‘나, (얼마 전까지)최종 보스’라고 주장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가 아직도 욱신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동료들을 살피던 그때였다.
짝-
짝-
짝-
“과연.”
염통놈이 느릿느릿 손뼉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역시 손과 눈을 쓰러뜨린 자들이라 그런지 아주 훌륭한 심장들이었다.”
“뭐?”
“요새 무료하던 참이었다. 위대한 존재가 아닌 나는, 충분한 힘을 비축하셨으면서도 이곳 깊숙한 곳에서 침묵하고 계시는 그분의 뜻을 완전히 헤아리지는 못하고 있었으니.”
염통놈의목소리는 생김새와 어울리게 묵직하고 울림이 깊었다. 들을 때마다 미묘하게 심장이 욱신거렸다. 좆같았다. 말을 끊으려 했지만,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인정하면 화가 나긴 하지만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놈의 기세에 억눌렸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또한 이곳엔 나와 어울릴 만한 이가 거의 없다는 문제도 있군. 그분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건 다시 없을 영광이지만… 그분께서 하사해주신 이 심장이 전혀 뛰지 않을 정도료 무료했었다. 네놈들이 오기 전까지는.”
뚜벅-
놈이 한 걸음 다가왔다. 두 팔을 옆으로 뻗고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심장이 있을 위치에 자리잡은 흉측하고 기괴한 검은색 덩어리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보이나. 마구 요동치는 이 심장을. 공포에 떨어 위축되면서도 살기 위해 맥동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최상의 심장을 취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 공포에 완전히 잠식되는 것도, 그렇다고 너무 공포를 모르는 것도 좋지 않지. 특히나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면서도 어떻게든 극복하려 애를 쓰는 네놈들의 심장은… 나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도 기뻐하실 터.”
염통놈은 제 몸만큼이나 길다란손가락을 들어 우리에게, 정확히는 날 가리키며 말했다.
“특히, 날 처음 보면서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지껄이는 네놈. 네놈은 특별히 상대해주지.”
[억압의 낙인]
[공포의 심장이 유진의 심장에 걸려있는 억압에 낙인을 더합니다.]
[유진의 체력이 매 턴 1씩 감소합니다.]
[유진의 턴에는 2씩 감소합니다.]
[낙인으로 감소된 체력에 적용되는 회복력이 반감됩니다.]
두쿵-!
“……씨발.”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에 받쳐 지껄였던 말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며 3구역 보스전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