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가장 기나긴 공포(4)
‘어?’
눈을 끔뻑거렸다. 눈앞에 불과 몇 달 전의 내가 있었다. 은둔형 폐인 그 자체였다. 떡진 머리, 제대로 안 떨어진눈곱, 하도 같은 걸 오래 입어서 한쪽으로 늘어진 티셔츠와 보푸라기가 잔뜩 일어난 츄리닝 바지. 거기에 피곤에 찌든 얼굴과 살짝 굽은 어깨와 왜소한 체격, 숨길 수 없는 찌질한 분위기까지. 꿈도 희망도 없는 내가 유일하게 재밌어하는 더 롱 테러를 플레이하고 있는 모습은 꽤나 짠하기까지했다.
‘왜 여기서 저때 모습이 나오는 거야? 또 무슨 지랄을 하려고?’
당장이라도 무너져내리는 우주에 깔려 죽을 것을 각오했다가, 익숙했던 공간이 나타나자 당황스러웠다.
「네놈들은 결코 공포를 없앨 수 없다. 하지만 네놈들에게서만큼은… 더는 공포를 찾을 수 없겠군.」
[용사대의 의지는 가장 기나긴 공포에 꺾이고 말았습니다.]
[용사대가 전멸했습니다.]
“아 씨-발 똥겜 쓰레기겜 운빨좆망겜!”
[새로운 용사대를 창설하시겠습니까?]
“안 해 씨발!”
‘뭐야.’
그리고 과거의 내가 욕을 내뱉으며 주먹을 쥐고 차마 키보드를 내리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니터에 뜬 용사대가 전멸했습니다라는문구를 보면서, 공포새끼의 재수 없는 대사를 보면서.
나는 부끄러운 감정 속에 깊은 공포가 포함되어있다는 것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어째서? 왜?’
난 분명 처음 겪는 상황인데. 지금 눈앞에 있는 내 모습을 보는 게, 이 정도 감정이 들상황은 아니었다. 어째서 게임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공포’를 느끼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시간 좀 애매한데 한 판만 더 하고 잘까.”
[새로운 용사대를 창설하시겠습니까?]
“쓰읍, 솔직히 이번 조합으로 3구역을 노데스로 깬 게 실력이긴 했지. 그래. 일단 한 판만 더 해보자. 첫트클은 실패했지만 어쨌든 깨긴 깨야하니까….”
[난이도를 선택해주십시오.]
“당연히.”
[‘가장 기나긴 공포’ 난이도를 선택하셨습니다.]
[튜토리얼을 생략하시겠습니까?]
[튜토리얼 생략을 선택하셨습니다.]
[세일럼으로 귀환 후 용사훈련소로 이동합니다.]
“이번엔 바헌 말고 늑인이나 강화인간 괜찮은 거 뜨면 한 번 써볼까.”
더 지켜봤지만 이유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냥 흔한 내 모습이었다. 운빨좆망겜에 더러운 게임이라 수천 시간을 태운 나조차 승률이 10%밖에 안 되는 게임이었고, 그 말은 즉 전멸 엔딩을 보는 건 90% 확률이니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근데 왜, 어째서.
모니터 속에 있는 용사들의 시체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울렁이는 것일까? 엔딩 크레딧과 프롤로그의 스킵을 위해 마우스와 키보드를 연타하는 날 보니 왜 이렇게 속이 답답하고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일까?
「네놈들은 결코 공포를 없앨 수 없다. 하지만 네놈들에게서만큼은… 더는 공포를 찾을수 없겠군.」
‘아….’
어느 순간 내몸과 자세, 과거의 나의 자세, 그리고 모니터 속 상황이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내가 느끼고 있는 미지의 공포에 대해 일부나마 깨달았다. 그리고 일부만을 깨달았다는 것 자체가, 나머지 미지의 공포를 부풀렸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아예 몰랐다면, 아예 깨닫지 못했다면. 이렇게 어정쩡하게 깨닫지 않았다면.
여러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지능이 없었다면.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을 상상하는 것으로 공포를 느끼고, 그 사실을 상상한 게 지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에 공포를 느끼고, 그렇다 해서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것에 공포를 느끼고, 지금 이 과정이 몇 번째인지조차 모른다는 것에 공포를 느끼고, 무한히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무한에 가깝게 갇혀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공포를 느끼고, 동료들의 멘탈은 멀쩡할까 혹시 무너져내린 게 아닐까 날 잊어먹은 건 아닐까 동료들 생각에 공포를 느끼지 않았을 텐데.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러다 그럴 때가 아니라 생각해서 황급히 책상 위를 뒤졌다. 펜과 종이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좁디 좁은 내 방은 자세히 보니 결여된 것이 많았다. 겉보기에 그럴싸하게 구현되어있을 뿐이었다. 나는 펜과 종이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손톱으로 팔뚝을 꾹 눌러 모양을 내기 시작했다.
「반 복 시 ㄱ」
「네놈들은 결코 공포를 없앨 수 없다. 하지만 네놈들에게서만큼은… 더는 공포를 찾을 수 없겠군.」
[용사대의 의지는 가장 기나긴 공포에 꺾이고 말았습니다.]
“…………….”
정신이 멍했다.
여긴 어디지? 무슨 상황이지?
멍하니 앞을 보니 이곳에 떨어지기 전의 내가 있었다. 지금의 나랑 비교하면 정말 어딜 내놓아도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언제나처럼 더 롱 테러를 욕하면서도 꾸준히 플레잉하는 내 모순적 행동을 바라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뭐야, 이거.’
팔뚝이 화끈거렸다. 왼쪽 팔뚝이 전체적으로 붉어져있었고 군데군데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이라곤 나랑 과거의 나 이렇게 둘 뿐인데, 우리 둘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내 기억엔, 이 이상한 공간에 오기 전에 내 팔뚝에 이런 자국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옷으로 가려져있는데, 맨 팔에 언제 이런 자국을 내가 냈단 말인가.
소름이 돋았다.
[용사대가 전멸했습니다.]
“아 씨-발 똥겜 쓰레기겜 운빨좆망겜!”
[새로운 용사대를 창설하시겠습니까?]
“안 해 씨발!”
과거의 내가 내뱉은 욕은 그러려니했지만, 모니터 속 문구가 유달리 섬뜩하게 보였다.
더 롱 테러를 플레이하면 밥 먹듯이 보는 문구인데, 어째서? 그저 수많은 실패한 판 중 하나일 뿐인데?
왼쪽 팔뚝이 괜히 더 욱신거렸다. 뭔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구멍이 뻥 뚫려있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세상 사는 게 갑자기 너무 좆같아서 술 많이 먹다가 곯아떨어진 적이 있는데, 기억이 군데군데 날아갔지만 날아갔다는 것 자체는 인지하고 있는 그런 느낌.
‘공포새끼.’
신체와 정신 양쪽을 좀먹는 공포를 애써 무시하며, 잠시 눈을 감고 현 상황의 근원을 파악하려 했다.
단순한 것부터.
이 현상은 공포새끼, 정식 명칭 ‘가장 기나긴 공포’놈이 사용한 스킬 때문에 비롯된 것.
현 증상.
짧은 시간이 반복되고 있음. 분명 처음 보는데 처음 보는 것 같지 않은 느낌과 팔뚝의 손톱 자국 등으로 추측하건데, 회귀라기보단 내 기억이 리셋된 것 같음.
돌파구.
추측이 맞다고가정한다면 어째서 기억이 리셋됐는가. 그리고 리셋이 안 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방금도 마우스와 키보드를 연타하며 뭐라 중얼거리던 과거의 내가 다시 게임을 욕하는 모습으로 갑자기 돌아갔다.
‘지금은… 기억이 이어진 건가?’
공포 속에 혼돈이 뒤섞였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결국 과거의 나 또는 저 화면에서 뭔가를 찾아야하는데, 반복되는 구간이 짧았다. 뭘 알아보기도 전에 휙휙 넘어갔다.
‘뭘 알아내면 기억이 리셋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러지않고서야 설명이 안 됐다.
‘…몇 번을 반복해야 할까.’
결국은 몸으로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었다. 과연 더 롱 테러를 가열차게 까는 욕을 몇 번이나 들어야 할지 예상이 안 됐지만, 부디 내 정신줄이 그 전에 마모되지 않기를 바라며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네놈들은 결코 공포를 없앨 수 없다. 하지만 네놈들에게서만큼은… 더는 공포를 찾을 수 없겠군.」
‘…………아?’
**
[용사대가 전멸했습니다.]
“아 씨-발 똥겜 쓰레기겜 운빨좆망겜!”
[새로운 용사대를 창설하시겠습니까?]
“안 해 씨발!”
몇 번이나 저 문구를 보고, 몇 번이나 저 욕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백 번? 아니면 천 번?
공간은 여전히 내 옛 원룸이었고, 시간은 여전히 그 짧은 구간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이곳에 갇혀있었다. 내 몸에 알 수 없는 상처들이 늘어난 것으로 보아 뭔가 알아내긴 알아냈구나 하고 추측할 뿐이었다.
나는 매몰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매몰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맨 처음, 이라고 감히 확신할 수 없었던 그때느끼고 있었을 감정하고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하고는 확연히 다를 거라 생각했다.
지금은 그저 여길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과거의 내가 내뱉는 욕지거리도신물이 났고, 용사대의 의지가 공포에게 꺾였다는 문구랑 용사대가 전멸했다는 문구는 보기만 해도 트라우마가 도질 것 같았다.
그래도 진전이 아예 없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난 미쳐버렸거나 아니면 다 포기하고 멍하니 주저앉아있었을지도 몰랐다.
‘공포새끼 씹새끼 씨발새끼 좆같은새끼.’
공포새끼에 대한 적대감을 잊지 않기 위해 일부러 쌍욕을 중얼거리며 계속해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전멸 문구가 화면을 가리지 않았다면, 던전이 어둡지 않았다면, 공포새끼의 거대한 몸집이 화면을 많이 차지하지 않았다면 진즉 용사들을 관찰하고도 떡을 쳤을 것이다.
‘….’
하지만 난, 어쩌면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면서 부인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희미하지만, 흐릿하지만.
팔다리가 기이하게 꺾인 채 복부에 대검이 관통된 상태로 엎어져 있는 선두의 여자가.
얼굴이 등쪽으로 돌아간 채 두 눈이 뽑혀있는 그 뒤의 여자가.
손톱이 죄다 뽑힌 뒤틀린 손가락으로 무언가 박살난 조각을 붙든 채, 치아를 비롯한 안면이 뭉개진 로브 차림의 여자가.
그리고 그 여자들의 시체를 허망하게 바라보는 한 남자, 정확히는 한 현상금 사냥꾼의 시체가 있었다.
‘공포새끼 짓이야. 사실이 아니야. 환상이라고.’
애써 부정해봤지만, 엄격하게 말해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사실인지 아닌지 나 혼자 구별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상인지, 어디까지가 온전한 내 생각인지 오염되지는 않았는지.
나는 우물 안 개구리의 최종판이었다. 항상 함께였던 동료들도 없이 나 혼자였고, 누가 날 꺼내줄 수도 없었고 진실을 알려주는 이도 없었다.
아마 저번도, 저저번도, 백 번 전에도 여기까지 와서 리셋되지 않았을까. 잊고 알아내고 또 잊고 알아내고. 이번에도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할 것 같았다.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되는데, 그 앞이 두려웠다.
‘어쩌면,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게 있을 수도 있잖아.’
나는 또 한 번 눈을 돌렸다. 어차피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시간이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또 찰진 욕을 듣고, 울렁거리는 화면을 보며 또 한 번 스스로 구축한 공포의 늪에 더 깊숙이 빠져 허우적거리겠지. 빠져나가려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그런 늪에.
‘난, 나는…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동료들이… 대체 무엇을 위해… 언제까지….’
다음번에야말로 마지막 한 걸음을 떼겠다고. 이 다짐을 제발 잊지 말자며 울긋불긋한 팔뚝에 손톱자국을 내던 그때였다.
「네놈들은 결코 공포를 없앨 수 없」
쩌적-
「다. 하지만 네놈들에게서만큼은… 더는 공포를」
쩌적-
「찾을 수 없겠군.」
‘……응?’
암담한 늪 그 자체였던 5.5평 원룸 한쪽 벽에 실금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