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진심을 담아서(1)
똑똑-
[수녀장님. 알리사예요. 들어가도 될까요?]
노크 소리에 한창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다갈색 머리의 여자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드러난 여자의 얼굴은 상당히 피로에 찌들어보였지만,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쓰다듬자 손에서 투명한 연녹색 빛이 나오더니 한결 나아지는 듯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나아보인다는 것이지만.
“네, 들어오세요.”
“따스한 자애와 냉철한 관용을.”
“따스한 자애와 냉철한 관용을.”
자애와 관용의 여신 라엘라 교단 세일럼 지부의 수녀장, 세스티아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알리사 자매님?”
“네, 수녀장님. 말씀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말씀하세요.”
당연히 그러겠지.
아무리 친근하게 자매님이라고 불러도 그녀는 저들의 윗사람이었다. 용건이 없어도 사담을 나눌 정도로 친한 자매들은… 대부분 죽었다. 그 사건 이후로 충원된 자매들과 어느 정도 다시 친해지긴 했다지만… 글쎄, 이런 건 그렇게 쉽게 되는 건 아니었다.
“오늘 점심에 유스티티아 교단에서 성전사장과 수녀장이 방문할 예정이었는데, 그쪽에서 장소 변경을 요청했어요.”
“장소를?”
“네. 여기가 아니라 그쪽으로 와줄 수 있겠냐고요.”
“이유는요?”
“유스티티아님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일이라 어쩔 수가 없다고만 적혀 있었어요.”
“으음.”
잠시 고민하던 세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왜 그런 요청을 했는지, 얼추 감이 왔기 때문이었다.
“알겠다고 전해주세요.”
“네, 수녀장님. 그럼.”
유스티티아 교단의 소식을 전한 알리사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수녀장실을 나간 순간.
쿵-
“아윽!”
세스티아는 복부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몸을 웅크렸다. 얼굴과 등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더 이상… 더 이상은 무리인 건가…?’
그녀는 수녀복 안쪽에 두른 천을 살짝 풀었다. 흩어진 천 안쪽에서 잠시 연녹색 빛이 발광했다가 공중에 흩어졌고, 그러자 복부가 조금씩 부풀어오르더니 마구 출렁이기 시작했다.
“쉬이… 아가. 미안, 미안해요. 답답하게 해서 미안해요.”
배가 안쪽에서부터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올라왔지만, 세스티아는 이를 악물며 제 복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차츰차츰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기왕이면 헨드릭님이 귀환하실 때까지 최대한 버티고 싶었는데.’
아무리 라엘라 교단이 다른 교단에 비해 남녀관계에 너그러운 편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
수녀장이 남편도 아닌 자의 아기를 임신해서 홀로 출산한다?
여태까지는 신성력을 담은 압박 붕대로 어떻게든 감춰왔지만, 오늘 임계점에 다다른 것 같았다.
‘오늘 회담이, 마지막이겠네.’
세스티아는 신성력이 증발해버린 압박붕대에 다시 신성력을 불어넣으며 책상 서랍 안쪽 깊숙한 곳에 보관해둔 봉투를 꺼냈다.
후우-
[휴직 청원서]
봉투에 묻은 먼지를 쓸어낸 그녀는 한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다 봉투를 북북 찢었다.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고 다짐했잖아.”
쿵-
“읏. 그래, 아가.”
새 종이를 꺼낸 세스티아는 망설임 없이 펜을 움직였다.
[환속 청원서]
**
“그러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라엘라님뿐만 아니라 유스티티아님께서도 헨드릭님 용사대를 지원하기 위해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계신다고.”
“벌써부터 후폭풍이 거세다. 다들 신성력이 전에 비해 최소 1할, 최대 5할 정도 줄어들었으니까. 신성력은 믿음의 대가이자 여신님의 힘 그 자체. 그게 하루아침에 팍 줄어드니 혼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저희를 비롯한 극소수야 원인을 알고 있지만, 그걸 퍼뜨리고 설득하는 건 또 다른 문제죠. 라엘라님 교단 측은 저희보다 훨씬 빨리 이 사태가 벌어진 것 같은데, 현 상황은 어떤지….”
“어렵죠. 많이.”
세스티아는 찻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신앙의 근간이 흔들리는 거니까요. 의문이 들겠죠. 풀리지 않는 의문은 의심이 될 거고, 의심은 불신으로 이어지는 법이니까요.”
“그렇다면.”
“하지만 동시에 우린 성직자이자 그분들의 어린양이에요. 그분들이 겪고 계신 대가는 우리에게 시련으로 다가온 거죠.”
진실이 무조건 옳다, 거짓이 무조건 나쁘다를 떠나서 헨드릭의 용사대와 그 목적, 그리고 여신님들의 복잡한 상황과 힘을 과도하게 써서 앓아눕고 있다는 사실을 공표해봐야 얻는 것은 적고 잃을 게 훨씬 더 많았다.
신들끼리 의견이 갈린다? 이방인 용사에게 힘 좀 줬다고 여신의 상태가 안 좋다?
그 모든 게 던전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긴 던전도시 세일럼 한복판이었고, 절대 밝혀지면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세스티아는 대부분의 진실을 덮었다.
“라엘라님과 유스티티아님께서 신이 되시기 전의 일화를 보면, 항상 선두에서 용감하게 빛나는 검을 휘두르셨던 유스티티아님께서 심하게 부상을 입으시고 그를 치유하려던 라엘라님마저 크나큰 위기를 맞이한 적이 있죠. 한동안 공포에게 대항한다는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웅크리셨다고 적혀있어요.”
“세스티아님.”
“공표하진 않았지만, 현재 라엘라 교단에서는 신성력이 줄어들었다는 걸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해결책은 다름아닌 ‘더 굳건한 믿음과 실천’이죠. 그래봐야 신성력이 늘어나진 않겠지만.”
아마, 나중에 여신께서 제게 벌을 내리실지도 모르겠네요.
세스티아는 여상한 태도로 차를 비웠다. 진실을 덮었노라고 얘기하는 자의 태도가 아니었다. 죄책감이나 망설임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일견 후련해보이기까지 했다. 말과 어조 사이의 간극이, 유스티티아의 두 성직자를 혼란스럽게 했다.
“아. 한 가지 더.”
“예?”
“아무래도 두 분에게는 말씀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저, 환속하려구요.”
“……예에에에?”
그들의 혼란은 세스티아의 뒷말 때문에 몇 배로 증폭됐다.
자타공인 세일럼 내 최강의 치유 수녀가, 그것도 한 지부의 수녀장이 환속?
이 시기에?
“많이 도와주세요. 저희도 많이 도와드릴 테니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면, 이 어려운 시기도 잘 극복할 수 있겠죠.”
“아니 잠깐….”
“이만 가볼게요. 몸이 조금 안 좋아서.”
저 둘은 나름 오랜 시간 교분을 나눈 이들이었지만… 세스티아의 결심을 뒤로 물러나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
‘언제쯤 오실까.’
헨드릭의 용사대가 던전에 들어간 지도 몇 달이 지났다. 그리고 세스티아가 수녀복과 위장용 압박붕대를 벗어던진 지도 몇 달이 지났다.
그녀는 이제 만삭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바동대는 태아를 달래며 좋은 말을 속삭이는 게 주요 일과였다.
“읏, 그래, 아가. 나도 보고 싶어.”
환속했다지만 그렇다고 아예 세일럼을 벗어날 순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일반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임산부가 홀로 도시를 떠난다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교단의 영향력이 약한 구역 내 작은 집을 구해서 조용히 몸을 다스리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헨드릭의 용사대가 무사 귀환하는 걸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와의 아이와 함께.
“아가. 오늘따라 발차기가 더 힘차네?”
세스티아는 찡그리며 웃었다.
“아빠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럴 때마다 세스티아는 헨드릭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이야기 도중엔 뱃속이 잠잠했다. 마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처럼.
그럴 때마다 세스티아는 행복했다. 아직 얼굴도 모르는 아기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사랑이, 그녀의 믿음이, 그녀의 삶을 인정받는 것 같아서 행복이 샘솟았다. 아기의 발차기는 꽤나 거칠었지만, 그만큼 건강하고 힘이 세다는 것이니 그것조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이번엔 엄마가 아빠랑 처음 만났을 때 어땠는지부터 이야기할….”
그래서 이번에도 헨드릭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했는데, 그 순간 세스티아의 전신에 뭐라 형용하기 힘든 기운이 관통했다.
‘이건…!’
온몸이 저릿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신성력을 복부에 두르고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기운이 발생한 방향이 어딘지 파악했다.
던전 입구가 있는 쪽이었다.
“틀림없어… 틀림없어…!”
거리에 나와있던 사람들 중 대다수는 혼절했지만, ‘용사’들은 세스티아만큼은 아닐지라도 이변을 느끼고 일제히 던전 입구가 있는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무사히 귀환한 거죠? 헨드릭! 네?’
상당히 떨어진 이곳에서 당장은 알 수 없었다. 직접 가야했다. 요새 몸이 부쩍 불편해져서 걷는 게 힘들었지만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다. 걸음을 옮겼다.
쿵-
“읏, 아, 아가…!”
걸음을 뗀 순간, 잠잠했던 복부가 요동쳤다. 갑작스런 격통에 세스티아가 배를 감싸안았다. 그녀의 직감과 경험이 즉각 판단했다. 이건 평소의 태동이 아니라고.
진통이라고.
마음 같아선 기운의 근원지에 조금이라도 빨리 다가가고 싶은데, 신체는 그것을 전면으로 거부했다.
“아, 아아….”
고민은 짧지 않았다.
세스티아는 모성애가 강한 여자였다. 비극으로 인해 강제로 얻은 딸조차 사랑으로 키웠고, 더 큰 비극으로 그 딸을 잃었다.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집에 도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혼외임신 사실을 밝힐 수 없었기에, 환속했다 하더라도 나름 세일럼의 유명인사였던 그녀가 조산사를 찾는다는 소문이 혹시라도 퍼져 교단의 얼굴에 먹칠할까봐. 그리고 어린 나이에 한 번 출산한 경험도 있었고,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는 생각에.
세스티아는 어느 누구도 없는 작은 방에서 홀로 진통과 싸우기로 한 것이다.
“부디… 아가가 아빠를 볼 수 있기를….”
아아아아아으윽---!!!
세스티아의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실된 감정의 결정체, 코르디아가 마침내 그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