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고난도 던전에 떨어졌다-200화 (200/218)

25. 진심을 담아서(6)

“아우, 아웅.”

“쉬이, 쉬이이. 코르디아, 어디가 아파서 그러는 걸까?”

“아우웅.”

“옳지옳지.”

세스티아가 코르디아를 안아들며 어화둥둥 달래자 뜻모를 옹알이를 하던 코르디아는 이윽고 헤죽 웃더니 까무룩 잠들고 몰았다. 3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둘을 제외한 나머지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그들에게, 정확히는 코르디아에게 집중했고… 코르디아가 잠들고 나서야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 모두 상반신이 앞으로 쏠린 채 가슴께를 부여잡고 있었다.

“으흠!”

“크흠.”

세스티아와 눈이 마주친 유진과 3인방이 애써 헛기침을 하며 아닌 척 하려 했지만 소용없는 행동이었다. 유진의 사정이야 어찌됐든 세스티아를 압박하려던 3인방의 기세가 순식간에 말랑해지고 말았다.

“그….”

“네, 듣고 있어요.”

“….”

거진 해탈한 카야를 대신해 입을 열었던 셰이의 입술이 열렸다닫혔다를 반복했다. 머릿속에선 온갖 말들이 떠올랐지만, 막상 눈앞에 아기를 안고 있는 ‘모성애 넘치는’ 세스티아의 모습을 보니 차마 그 말들을 꺼내기가 꺼려지는 탓이었다.

‘흡사, 내가 나쁜년이라도 되는 것 같잖아….’

셰이는 고개를 돌렸다. 카야? 틀렸다. 도와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설령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일루미나? 애초에 흥분했으면 처음 조우했을 때 사달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녀의 얼굴을 보아하니, 코르디아의 귀여움이라는 마수에 걸려도 단단히 걸린 것 같았다….

“염치 없는 짓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세스티아의 목소리가 어색한 침묵을 깨뜨렸다.

“헨드릭님이 카야 자매님과 셰이 성전사님과 깊은 관계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두 분이 중상을 입고 의식이 없는 틈을 타서 헨드릭님을 유혹했어요. 타의로 타락해버린 딸을 제 손으로 끝내야했다는 비통함을 빌려서요. 두 분, 아니 세 분도 아시다시피 헨드릭님은 정이 많으시고 꽤나 물렁물렁하잖아요. 여우짓을 했어요. 그것도 수도원 안에서 말이죠. 몸과 마음이 걸레짝이 된 제 모습을 자기합리화의 장작으로 던져넣고, 어머니의 관용을 바랐어요. 신벌을 받아도 싼 행동이었어요.”

“세스티아님.”

“여자라면, 잘 알잖아요. 안전한 날인지, 위험한 날인지. 공교롭게도 그날은 굉장히 위험한, 가능성이 최고로 높은 날이었어요. 어머니께, 딸을 잃어버린 가엾은 딸에게 새로운 자식을 내려주십사 자애를 청했어요. 헨드릭님은 죄책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이러는 게 맞나 갈등하면서도 그런 저를 끝내 내치지 못했어요. 고마웠어요. 그리고 마음이 아팠어요. 이런 식이 아니라, 정말로 서로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고 싶었는데. 아기를 잃은 슬픔을 어거지로 채우는 게 아니라, 기쁨과 사랑과 행복으로 흘러넘치는 긍정적인 감정으로 결실을 맺고 싶었는데… 하지만 남의 남자를 유혹해놓고 그런 것까지 바라는 건 어이없는 욕심이죠. 헨드릭님은 더 당황스러웠을 거고요.”

지금껏 수없이 많은 이들의 죄를 정화하고 사했을 수녀의 고해였다.

“이미 저질렀지만, 그걸로 만족했어요. 헨드릭님은 다시 던전에 들어가셔야 했고, 그분의 파티엔 제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어요. 설령 있다고 해도 두 분이 계신데 함께하는 것까지 바라진 않았어요. 거기다 제 안에 정말로 생명이 자리잡았다는 걸 알게 되자… 아예 멀리 떠나기로 했어요. 어차피 타락 사건으로 본부의 눈밖에 나버렸으니 말이에요.”

“이기적이죠? 네. 제가 살면서 처음으로 부려본 사적인 욕심이었어요. 하지만 배가 부르고, 헨드릭님이 제게 남겨주신 아이의 이름을 곱씹고, 이 아이에게서 헨드릭님의 모습이 보이고, 끝내 공략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던전이 붕괴하니… 꽁꽁 눌러왔던 욕심이 고개를 들었어요.”

“내 모든 걸 다 버려도 좋으니, 이 아기가 아빠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면 좋겠다고….”

도시를 구한, 한 도시의 정점에 위치했던 수녀의 간절한 바람은 지극히 평범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평범함의 잣대를 함부로 들이밀 수 없었다.

평범하지 못한 세상에서,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산 이에게 평범함이야말로 가장 손에 넣기 힘든 것임을 적어도 이곳에 있는 이들은 잘 알았다.

세스티아의 상당히 긴 고해가 끝났다. 그녀는 속이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반대로 유진과 3인방의 표정은 복잡해졌다. 특히 유진은 양측 눈치를 보느라 할 말이 있다 해도 절대 먼저 입을 열지 않을 태세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자리를 피하지 않은 게 용했다. 3인방은 그런 유진이 비겁하다 생각했지만, 혹여나 지금 상황에서 한쪽 편을 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루미나 언니라면 몰라도, 저랑 카야 언니는 모를 리가 없죠. 그때 일로 많이 괴롭히기도 했고요. 물론 대충 마음에 묻고 지나간 것과 아기와 함께 맞닥뜨리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지만, 두 번째니 세 번째니 네 번째 여자니 그런 건 부차적인 문제예요.”

셰이가 이를 악물었다. 이런 말을 자기 입에서 꺼내야 한다는 게 몹시 분한 듯 했다.

“저랑 카야 언니는 불임이에요. 일루미나 언니는 불임은 아니지만… 가능성이 낮고요.”

“….”

“지금이야 아기가 귀여워서, 세스티아님이 불쌍하기도 하고 이해가는 부분도 있어서, 다 버리고 여기까지 온 사람에게 무턱대고 쫓아내는 것도 좀 그래서 어찌저찌 세스티아님 개인에 대한 문제는 넘어간다 치지만….”

셰이는 원론적으로 생각했을 때, 카야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세스티아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지만, 유진이 밉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이해하려는 건 그만큼 그를 사랑하고 그가 없어선 안 된다는 마음이 뿌리깊게 자리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카야도, 일루미나와도 파탄나고 싶지 않았고.

그리고 그건 세스티아와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그녀는 세일럼을 함께 구해낸 전우였다. 어디 근본도 뭣도 없는 예쁘기만 한 여자가 아니었다. 일루미나 발정기 사건 때처럼, 며칠만 지나면 그녀와도 잘 지낼 수 있을 것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아기가 성장할수록 봉합은 헐거워지고 공허함과 억울함이 커질 거예요. 네. 분명히.”

하지만 2세만큼은.

이성과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

유진은 실시간으로 메말라갔다. 침을 삼켰는데도 삼킨 것 같지가 않았다. 반가움과 책임감, 안쓰러움으로 세스티아를 보금자리로 인도했으나 던전을 노데스로 격파한 그조차 지금 상황에서 무슨 해결책을 꺼내야할지 막막했다. 던전에서는 아무리 극악인 상황이라도 선택지가 존재했고, 각 선택지에는 낮지만 성공확률이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셰이의 편을 든다.]

[세스티아의 편을 든다.]

‘라엘라시여…….’

출구 따윈 없었다. 뭘 골라도 즉사급 지뢰였다. 원만한 하렘 같은 건 소설이나 게임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게임 속으로 들어왔으니 가능한 거 아니냐고?

‘씨발.’

던전행도 끝났겠다,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으니 욕이나 나쁜 생각은 그만하자고 다짐했건만. 하지만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자업자득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대로 계속 방관할 수도 없었다. 유진이 세스티아를 이곳에 데려온 것 자체로 그녀 또한 그의 여자라는 걸 선언한 셈이었고, 이기적이지만 양측 다 포기할 수 없었다. 평생 함께하고자 했고, 그러기에 지은 보금자리였다.

정답이 없으면, 미봉책이라도 세워야하지 않겠나.

“우선 쉬었다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는 건 어때. 서로 감정도 추스르고, 세스티아는 몸상태 호전시키고.”

시간을 번다. 그건 첫 번째 조건이었다. 말을 내뱉자마자 양쪽에서 쏟아진 시선이 굉장히 따가웠지만, 잠시 여자들 눈치 보느라 쭈그리고 있었던 리더십과 책임감이 슬금슬금 고갤 내밀고 있었다.

유진이 가부장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족의 ‘중심’은 엄연히 그이지 않은가. 중심이 우뚝 서야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는 법.

우선 양측을 떨어뜨리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양측을 왔다갔다하면서….

“유진.”

“어, 어어.”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진이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그, 그래?”

“‘저희’의 문제고, 저희끼리 이야기를 나눌 테니 유진은 할 일이 있으면 할 일을 하십시오.”

“그, 딱히 할 일이 있는 건….”

“하나도 없겠습니까.”

“있지 있지. 아주 많이 있지! 할 일 하러 갈게?”

하지만 고개를 빼꼼 내밀었던 유진의 리더십과 책임감은 줄곧 침묵을 유지했던 카야의 한마디에 광속으로 버로우를 탔다.

유진은 단 30초도 버티지 못하고 거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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