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고난도 던전에 떨어졌다-201화 (201/218)

25. 진심을 담아서(7)

끼이이익, 딸깍-

나무로 된 문이 완전히 닫혔다. 장소를 거실에서 안방으로 옮긴 네 여자는, 제각기 편한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세스티아 자매님께선 고해까지 하셨을 정도로 속을 다 터놓으셨지만, 그이가 없으니 고해 외에도 더 심도 있는, 진솔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요. 이렇게 됐는데, 다 까놓고 말하자구요.”

“그거 좋네. 다 까놓고 말하기.”

세스티아는 그녀의 품 안에서 잠들고 있는 코르디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가.

소중한 아가.

너로 인해 기쁘고, 너로 인해 행복하고, 너로 인해 아플 때도 있지만. 이 엄마는 절대 너를, 네 행복을, 네가 누려야 할 권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세스티아는 코르디아를 고쳐안으며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 했던 이야기로 부족했다면, 얼마든지 더 물어보셔도 좋아요.”

그녀의 어조는 평온했다. 하지만 카야와 셰이, 일루미나는 그 속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를 감지했다.

이래서야, 범죄자를 심문하는 고문관이라도 된 것 같지 않은가. 그녀들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세스티아 자매님.”

“자매님이라 부르지 않아도 좋아요. 저는… 수도원에서 제명당할 각오까지 했으니까요. 물론, 라엘라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린 건 아니지만요.”

“…좋습니다.”

다 버리고 헨드릭을 따라 이곳에 왔다는 건 거짓이 아닐 터.

“이제 와서 세스티아님의 진심을 의심하거나 폄훼하진 않습니다. 세스티아님이 완전 남남도 아니었고, 얼굴 붉힐 일이 있었다지만 그건 꽤 예전 일이었을뿐더러 유진과 해소가 된 일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세스티아님. 입장을 한번 바꿔서 생각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입장을, 바꿔서….”

역지사지. 유진에게서 들은 단어였다. 세스티아가 입을 다물자 셰이가 바통을 받았다.

“일부러 나쁘게 말해볼까요? 세스티아님은 굴러들어온 돌이에요. 엄밀히 따지면 저도, 일루미나 언니도 굴러온 돌이지만 그래도 과정을 거치고 인정을 받았어요. 그리고 세스티아님도 인정을 받게 되겠죠. 새삼 박힌 돌이 세 개에서 네 개로 늘어나는 것뿐이고, 우리 대장이라면. 헨드릭이라면. 유진이라면. 겉으론 눈치 보면서 쩔쩔매는 것처럼 보여도, 한 명 더 늘어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거예요. 우리끼리 잘 지내는 건 둘째치더라도.”

하지만.

굴러온 돌이 박힌 돌 중 하나가 되는 수준이 아니라.

박힌 돌을 차버리고 자기 혼자만 박힌 돌이 되어버린다면?

“유진이 우리 모두를 티나지 않게, 완벽히 공평하게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고 해도 말이지. ‘2세’를 안겨줄 수 있는 게 현재로서 당신밖에 없으니, 그 전제가 완전히 박살나고 말아. 2세가 줄 수 있는 새로운 감정은, 교감은… 당신만이 줄 수 있으니까.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무게추는 당신 쪽으로 점점 기울 거고.”

요컨대 세스티아, 너는 밸런스 브레이커다.

바통을 이어받은 일루미나가 선언했다.

“우리도 방법이 있다면야, 가장 늦게 굴러온 돌이 가장 먼저 2세를 본 것 정도는 약간의 부러움과 질투 정도로 끝낼 수 있어.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아무리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이라 해도, 처음부터 2세 계획 없이 살기로 다짐했던 게 아니라면. 2세가 있으면서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이 훨씬 더 행복하지 않겠어?”

“불안, 하신 건가요?”

“맞아. 당신 입장에서 우리가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불안하지. 억울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아요. 제 입장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믿음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에요. 우리가 아무리 유진을 믿고, 유진도 우릴 믿는다 해도… 세스티아님의 아기가 없었으면 모를까, 유진은 이미 아기의 사랑스러움과 귀여움을 영접해버렸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리 유진이 우리 사정을 알고 있고 이해한다 해도, 그이도 사람인 이상 아쉬움과 실망감이 전혀 없을까요?”

세스티아는 섣불리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설령 유진이 초인적인 균형감각을 타고났다 해도 그랬다. 그녀가 유진은 그러지 않을 거다고 확신하거나 저들의 불임을 안타까워하는 건, 지독한 기만이었다.

“싫어요. 너무 싫어요. 내가, 결함품이라는 게. 유진의 사랑이 그걸 잊게 해주었는데. 저 아기를 본 순간… 단숨에 솟아올라 제 마음을 찌르는 거 있죠.”

“유진이라면 지금 상황도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겁니다.”

HAT용사대의 대장인 헨드릭이라면, 세일럼의 구원자 헨드릭이라면, 자애와 정의의 총애를 받는 헨드릭이라면. 이세계에서 온 던전 파괴자 헨드릭이라면.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누구 하나 버리지 않고 돌파한 그라면, 지금 문제도 무사히 돌파할 수 있을지도… 이렇게 무심코 기대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유진이 들으면 다소 서운한 말이겠지만.

던전은 그가 이세계에서 게임이라는 형태로 겪어봤던 것이지 않은가.

일부일처제가 보편타당한 상식이며 법제화된 사회에서 20년 넘게 살았다던 외톨이가, 아름다운 여자 셋과 함께 잘 사는 것 자체만으로도 예상외의 상황에 잘 대처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글쎄. 어떨까.

한쪽으로 사랑이 쏠릴까, 사랑이 식을까 불안해 미칠 거 같은데.

아기 갖고 싶어 미칠 거 같은데.

아무리 유진이 훌륭한 남자라지만, 세 명과 네 명은 또 다른 법인데.

‘모성애’라는 게 충만하다 못해 흘러넘칠 것 같은 새 굴러온 돌은, 너무나 강력해보이는데.

언젠가.

정말 낮은 확률이겠지만.

언젠가 유진의 아이를 임신하고, 낳게 된다면… 아이와 함께할 공간과 아이가 컸을 때를 생각해 따로 마련해놓았던 공간들이.

언제 생길지 모르고, 아예 생기지 않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이미 태어나버린, 새 여자의 아이의 것이 될 것 같아서.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오늘 일은 없던 것으로 하고 사라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아기만이라도….

턱끝까지 올라온 속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른 카야가, 세스티아의 중얼거림에 답했다.

“유진은 꽤나 욕심쟁이니까… 일단은 그이가 어떤 답을 제시할지 기다려볼 생각입니다.”

“아….”

“그전에, 아기 문제는 잠시 내려놓고 우리 집의 규칙에 대해 알려드리는 게 먼저일 것 같습니다.”

“아, 네. 새겨들을게요.”

“첫번째 규칙, 유진은 누구 한 명의 것이 아니다. 두 번째 규칙…….”

**

오랜 골칫거리였던 가장 기나긴 공포의 던전이 파괴되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당장 나아졌냐고 누가 묻는다면 단언컨대 웃기지 말라고 콧방귀를 뀔 것이다.

왜냐.

만악의 근원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공포 그 새끼가 뒤져버렸는지 꽁지를 말고 도망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그 사건으로 세상이 진일보했다면 빛과 정의의 여신인 내가 이렇게 바쁠 리가 없지 않을까?

“언어와 논리의 신이 들었다면 족히 한나절은 설교할 법한 말이야.”

“방구석에서 책이나 들여다보는 놈의 말 따위 알게 뭐야. 그나저나 넌 팔자 좋다? 난 이렇게 고생하는데 말이야.”

“후후. 전에도 말했잖아. 내려놓으면 편해, 티티.”

“그게 말이 쉽지, 어휴. 너도 진짜 별종이다 별종이야.”

“티티도 마찬가지야.”

HAT의 던전 격파 이후, 자애와 관용의 여신 라엘라와 빛과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의 입지는 크게 상승했다. 하지만 입지가 상승한 것과는 별개로, 각자 카야와 셰이에게 강림하느라 소모한 신력이 워낙 컸기 때문에 그게 곧장 힘이나 격의 상승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특히 라엘라는 단순한 강림이 아니라 본신의 일부를 분리하는 형태로 강림한 것이었기 때문에, 영구적인 격의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

백방으로 돌아다니며 어떻게든 신성력을 쥐어짜 신도들에게 나눠주려는 유스티티아와는 달리, 회복을 위한 깊은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라엘라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모이면 모이는 대로, 원하면 원하는 대로.

세계 각지에서 자애와 관용을 바라며 기도를 올리는 수많은 신도들은 과연 그들의 여신이 하루종일 뒹굴거리며 어느 한 곳만 뚫어지게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티티.”

“왜.”

“우리, 얼마나 됐지?”

“뭐가?”

“승천한 지 말이야.”

“글쎄…?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 년은 넘지 않았을까. 갑자기 그건 왜.”

“그 정도 했으면, 오래 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래 하긴 했… 잠깐, 라엘라.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내가 잠들 때도 세상은 잘 굴러갔으니, 어쩌면 백 년 정도는 없어도 되지 않을까?”

“라엘라!”

“좀, 지쳤어.”

라엘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구슬 속 광경을 검지로 가리켰다.

“내 딸들이 서로 곤란한 상황에 처했어. 그리고 그중 하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날 향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거든. 제발, 어떻게 좀 해달라고. 간신히 손에 넣은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말이야.”

“그 아이가 특별한 공을 세운 건 사실이고 네가 누굴 총애하든 그건 네 자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

“우리도 한때, 악을 때려잡는 용사들이었고 사람이었지. 난 엘프였고, 티티 넌 인간이었지만.”

“라엘라.”

“절대다수의 필멸자들은 모르겠지만, 내 아이는 세상을 구했어. 신이라고 숭배받는 우리조차 기나긴 세월동안 이루지 못한 위업을 이룬 그 아이가,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소박한 소원을 너무나도 간절하게 바라고 있어. 만민에게 자애와 관용을 베푸는 거? 티티 네 말마따나 천년 넘게 해왔어. 그러면… 천년에 한 번 정도는, 내 마음대로, 내가 베풀 수 있는 자애와 관용을 하나에게 집중해도 되지 않을까? 우리에게 그런 자격조차 없을까?”

“…그래서 어쩔 생각인데.”

저렇게 된 라엘라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유스티티아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내 아이에게, 그토록 원하는 아이를 선물해주고 싶어.”

“맙소사.”

유스티티아는 현기증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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