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고난도 던전에 떨어졌다-202화 (202/218)

25. 진심을 담아서(8)

‘라엘라님, 유스티티아님.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뭘 하면 좋겠습니까?’

이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라엘라와 유스티티아를 떠올리며 기도하는 유진은 차마 집안에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머릿속은 카야가 예상했던대로 뒤죽박죽이었다.

“아기…….”

여자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던 유진은 없어진 지 오래다. 그는 이미 절륜한 체력과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세 명의 여자를 품에 안은 유능한 남자였다. 그리고 이 상황이 단순히 여자가 하나 늘어서가 아니라는 것도, 조금 생각해보고 바로 깨달았다.

문제점을 파악했지만, 해결할 방도가 없어서 문제지. 제아무리 던전을 격파한 그라도, 불임인 여성을 임신시키는 건 불가능하지 않겠나.

그동안은 혹시나 자기가 뿌리는 씨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면서 매번 아쉬워하는 여인들을 위로하고 합리화하기도 했지만, 세스티아의 품에 안긴 아기가 그 합리화도 말끔하게 부숴버렸다.

심지어 딱 하룻밤 만에 임신시켜버렸으니, 씨의 성능을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유진은 지금껏 여인들과 각자 수십 번, 아니 백 번도 넘게 몸을 섞었지만… 아기가 생기지 않는 것에 아쉬움을 느낀 적은 라엘라께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아기를 원한다는 뉘앙스를 풍겨본 적도 없었고 아기, 2세 등의 단어를 먼저 말한 적도 없었다. 여인들이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아쉬워할 때, 그럴 때만 살짝 언급했을 정도였다.

‘내가, 그리고 내 여자들이 내 생모생부와는 천지차이긴 하지만… 육아는 좀… 뭔가 좀….’

극복하기도 했고 지금 누리는 행복이 압도적으로 더 크기에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심장에 문신처럼 새겨진 어렸을 적의 트라우마.

얼굴도 모르는 생부보다야, 당연히 아기를 잘 양육할 자신은 있었다만… 생길지도 모르는 아기보다야 여인들을 백 배 천 배 만 배 소중하게 생각하는 유진이었다. 그의 태도에 그런 기저가 늘 깔려있었기 때문에, 여인들도 아쉬워할지언정 유진에게 서운함을 품은 적이 없었다. 특히 셋 다 아기가 생기지 않고 있어서 그런지 동병상련의 마음이 그들의 결속마저 더 굳게 하고 있었고.

하지만 지금은?

눈을 감으면 빵긋 웃던 코르디아의 세상 순수한 얼굴이 떠올랐다.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휘휘 저어 날려보내려 하지만, 눈을 깜빡이기 위해 눈꺼풀이 감기면 어김없이 아기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쳐버리겠네.”

가정의 평화가, 한 아기 때문에 박살나기 직전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기의 매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제 엄마를 많이 닮아서 그런지, 귀여워도 너무 귀엽고 예쁜 그의 아기는… 그와 평생 연관이 없을 것 같았던 ‘딸바보’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했다고.

그리고 그렇게 한번 뭉쳐져 구르기 시작한 눈덩이는 급속도로 덩치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럼 카야를 닮은 아기는 쿼터 엘프일까, 아니면… 아.’

유진은 제 머리를 세게 후려쳤다. 그러나 한번 가속이 붙어 속도가 빨라진 눈덩이는 쉽게 제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풍부한 상상력은 이런 때에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상상할 베이스가 아예 0이었다면 모를까, 코르디아라는 실존하는 존재가 있었고… 유진은 곧 카야뿐만 아니라 셰이와 일루미나와의 아기를 상상하고 말았다.

‘안돼. 안 된다고.’

가질 수 없는 걸 상상해봐야, 현 상황에 도움되는 게 뭐가 있겠는가. 오히려 독이었다.

카야를 닮은 아기. 셰이를 닮은 아기. 일루미나를 닮은 아기.

코르디아를 보고 나서, 유진은 그제야 여인들이 그렇게 아기 아기 노래 부르는 걸 ‘진심’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지금 그녀들의 심정이 어떨지도 정확히 이해됐다.

‘쓰레기. 난 쓰레기다.’

라엘라시여, 이 못난 쓰레기에게 자애와 관용을. 유스티티아시여, 잠시라도 좋으니 제게서 눈을 거둬주시길.

카야가 직접 만든 묵주 비슷한 걸 만지작거리며 한숨만 픽픽 내뱉고 있을 때.

‘헨드릭.’

‘…엥.’

‘내 말이 들리니?’

‘………라엘라님?’

‘내 아이를 돕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구나.’

이게 무슨 일이지?

갑자기 기다렸다는 듯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여신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그것도, 뭐? 내 아이를 돕고 싶다?

‘어떻게 생각하긴요! 라엘라님의 자애에 뇌가 녹아버릴 것 같습니다!’

‘후훗. 뭐니 그게.’

아, 자애로운 여신이시여.

오늘을 ‘자애의 날’이라 명명하고, 평생 기념하며 살겠나이다.

**

밤이 되었다.

일시적 소강상태에서 저녁을 어영부영 먹은 후,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방은 여유가 있었기에 세스티아와 코르디아도 따로 방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 딱 봐도 지쳐보이는 세스티아와 코르디아가 눈에 밟혔지만, 그녀에게 할애할 턴은 이미 끝났다.

지금은 카야의 턴이었다.

똑똑-

“카야. 뭐해?”

유진.

“들어가도 돼?”

답이 없었다. 평소라면 노크가 끝나기 무섭게 문이 자연스럽게 열렸을 텐데. 그래도 안에 있다는 걸 알았으니,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카야는 창가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을 보는 걸까. 별을 보는 걸까. 그도 아니면 그처럼 하늘 위에 계신 여신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는 걸까.

문을 닫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그제서야 카야의 고개가 유진을 향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혼자 있고 싶습니다.”

“미안.”

“유진.”

“네 기분을 더 상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일단 이거 받아.”

유진은 잽싸게 손에 있던 걸 카야에게 넘겨주었다. 카야가 그에게 선물해주었던 묵주였다.

“이건, 왜…?”

“손목에 껴봐.”

“이제, 필요 없는, 것입니까…….”

“아니! 아니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에이!”

카야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걸 보다 못한 유진이 직접 그녀의 손목에 묵주를 채워주었다. 카야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곧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라엘라님이 말을 거셨겠지?’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카야의 표정이 다이나믹하게 변하고 있었다.

“라, 라엘라님.”

- 저번 강림과 별다른 건 없을 거란다. 그저, 네 안에 자리잡는 ‘내’ 비율이 높아지는 거라고 생각하면 좋지 않겠니?

“하지만, 그 때문에 라엘라님의 격이 영구적으로.”

- 아이야. 내 딸아.

“예, 예. 라엘라님.”

- 내가 누구니?

“예?”

- 내가 누구니?

“따스한 자애와 차가운 관용의 라엘라님이십니다….”

- 네 철퇴로 던전의 버러지들을 차갑게 관용했건만, 네 따스한 자애는 갈 곳 없이 맴돌고 있지 않니.

“그건.”

- 자애와 관용의 여신의 딸이, 자애를 베풀지 못해서 울고 있다는 건 내가 용납할 수 없어요.

“그, 그럼.”

- 그땐 내가 너의 작은 일부였다면, 지금은 내 몸이 널 대신할 거란다.

감정 표현이 세 여인 중 가장 덜하고, 말을 더듬거나 당황하는 빈도도 제일 적은 카야는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 안심하렴. 널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니. 단지, 네가 사랑을 나눌 때. 그때 몸이 나로 바뀌는 거니까. 그렇게 되면… 네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을 거야. 네 생각은 어떠니?

카야는 묵주를 꽉 움켜쥐었다. 믿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 유진과 눈을 마주치니 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말이 되는 건가?

단순한 강림을 넘어서, 여신님과 하나되어 살아간다는 게?

- 강요할 생각은 없단다. 난 그저… 세상을 구해낸 용사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보상을 주고 싶은 마음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하지만… 만일 제가 받아들이면, 라엘라님은 어떻게 되시는 겁니까?”

- 지금은 나보다도 너 자신을 생각하고 대답하렴. 나는 괜찮으니까. 더 시간을 끌면, 여신의 체면이 조금 죽을 수도 있어요?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라엘라님께서 절 이렇게 생각해주시니 기뻐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 으응. 그럼, 준비를.

“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뭐?”

- 으응? 거, 거절?

라엘라와 유진은 카야의 거절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카야가 이 행운을 예상하지 못했듯, 그들도 거절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왜? 무슨 이유로?”

“저 혼자만 행복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아기를 갖는다면, 전 분명 엄청 행복해서 여한이 없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셰이와 일루미나는… 지금보다도 더 고통받을 게 뻔합니다. 그 둘은, 제게 가족입니다. 저 혼자만 행복하자고 둘을 불행의 늪에 밀어넣고 싶지는 않습니다.”

눈앞에 있는 유진도, 천상에 있을 라엘라도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맹점이라고 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카야가 너무 착해빠졌다고 해야 할지, 고지식하다고 해야 할지.

카야는 그게 또 좋은 점이긴 하지만, 유진 입장에선 머리가 새까매지는 대답이었다.

‘라엘라님이 갑자기 나타나셔서 셰이랑 일루미나를 잠시 잊고 있었는데, 카야 너는 대체…….’

유진은 또 다른 죄책감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카야가 손을 뻗어 그의 양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역시 유진은 언제나 계획이 있군요.”

“카야.”

“절 그만큼 생각해주셨다니 행복합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아까 제안은 없던 걸로….”

그렇게 회심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려는 순간.

- 잠깐.

카야의 손이 유진의 뺨에 맞닿은 덕에 유진에게도 라엘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 유스티티아랑 위타에게 부탁했단다.

“예?”

갑자기 빛과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와 숲과 활력의 여신 위타의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 둘 다 각자 아이에게 축복을 내려주기로 했으니, 이제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겠지?

“예?”

- 내 딸이 너네들 딸 때문에 행복할 수가 없다고 말했더니, 글쎄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겠다 하지 뭐니.

“예?”

- 그러니 이제 내 걱정도, 네 다른 가족도 걱정하지 말고 오로지 네 의지, 네 감정에 의거해서 대답해보렴. 어떻니?

카야의 얼굴이 하늘로, 셰이의 방 쪽으로, 일루미나의 방 쪽으로, 유진 쪽으로, 그리고 다시 하늘을 향했다.

그리고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아아앗-

손목의 묵주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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