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고난도 던전에 떨어졌다-205화 (205/218)

25. 진심을 담아서(11)

‘몇, 시지.’

종종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정신을 차렸더니 아침이다, 같은 전개를 본 적이 있다. 그 한 문장으로 늘어지는 내용을 생략하거나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굳이 상세하지 않고도 ‘굉장했다’는 임팩트를 심어주기 위한 마법 같은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상력이 자극되기도 하지만, 어쩔 땐 불만이 생길 때도 있었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묘사해주지, 라고.

근데, 단순한 서술적 트릭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면?

술에 꽐라가 돼서 필름이 끊겼을 때처럼, 정말로 정신을 못 차렸다면?

삐걱삐걱-

“앙, 아앙.”

‘미친.’

감각이 돌아왔다. 침대가 작게, 규칙적으로 흔들리며 삐걱대는 소리와 듣기만 해도 빨딱 설 것 같은 신음이 유진의 감각을 심해에서 끌어올렸다. 등에 맞닿은 축축한 시트도, 저 멀리 공처럼 구겨진 이불도, 걸레처럼 널브러진 옷가지들도, 여기저기 흐트러진 가구들도.

그리고.

온몸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따뜻함과 부드러움도.

코를 찌르는 텁텁하고 꾸리꾸리하면서도 야하고 향긋한 냄새도.

너무 오랫동안 해서 끊어질 것 같이 아프지만, 아직도 극상의 쾌락을 더 갈구하고 있는 미친 자지도.

그리고.

“흐응, 응, 으응, 아, 아, 깼니? 으응…!”

다소 흐트러진 머리와 몸 곳곳에 새겨진 붉고 하얀 흔적이 아니었다면, 이제 막 섹스를 시작한 것처럼 유진의 위에서 허리를 마구 흔들고 있는 라엘라까지.

“라, 엘라님.”

“응, 으응, 읏, 말, 하려므나.”

유진의 목소리가 가뭄이 든 논처럼 쩍 갈라졌지만, 라엘라의 목소리는 처음과 똑같았다. 그녀의 신음소리는 점점 격해졌고, 그녀의 엉덩이가 유진의 치골과 부딪치는 소리는 살벌한 수준이었다.

“지금,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말씀 좀… 크윽!”

“아으으으응-!”

그 와중에 라엘라의 무시무시한 질압에 유진은 뭐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사정했고, 그녀는 할딱거리다 자연스레 유진의 상체 위에 엎드렸다.

무겁다.

그리고 무섭다.

육중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두 가슴에 짓눌리며, 유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난 대체, 아니 라엘라님은 대체….’

이대로 가면 사상 초유의 남성 ‘복하사’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그가, 불경을 무릅쓰고 라엘라의 몸에 손을 올렸다. 정확히는 허리부근이었는데, 어떻게든 삽입부터 풀어내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흣, 아직도, 모자란 거니…?”

“……예?”

지금, 이 여신님이 대체 뭐라는 거지?

뇌정지라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었던 걸까.

“괜찮단다. 으응, 아직, 아직이니까….”

라엘라는 자지를 빼내기 위해 허리를 들어올리려던 유진의 손에 그녀의 손을 포개며, 오히려 엉덩이를 꾸욱 눌러댔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몸짓에, 한계를 모르는 건지, 아니면 한계는 진작 맞닥뜨렸음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쾌락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건지 유진의 자지가 언제 그랬냐는 듯 강직도와 길이를 회복했다.

‘라엘라 맙소사….’

라엘라의 몸에서 연녹색 빛이 발광했다. 유진의 눈이 믿을 수 없는 걸 본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처음 봤지만,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라엘라가 저 빛을 발광한 게 처음이 아닐 거라고.

그녀의 연녹색 빛이 그녀 스스로와 유진에게 스며든 순간.

불끈-

발기력이 회복된 것을 넘어, 비쩍 말라가던 유진의 몸 전체에 생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 들어서지 않았으니까… 응. 조금 더 힘내야겠지?”

“아, 안돼.”

몸은 회복됐지만, 정신은 그대로지 않은가.

격렬하게 쉬고 싶은 마음에 일단 몸부터 빼내려했지만….

“아…!”

“크윽.”

만근추를 발동한 듯한 라엘라의 엉덩이에, 유진의 치골이 푹썩 내리찍혔다.

‘이게, 자, 자애…?’

유진은 카야가 어서 깨어나길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기도했다.

…유스티티아님께.

**

라엘라는 여신이지만, 유진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인간이었기 때문에 생리현상은 피할 수 없었다. 밥이야 굶으면 된다지만, 싸는 것까지는 어떻게 못 하지 않겠나. 여신은 정말 똥도 안 싸고 이슬만 먹고 살 수 있겠지만, 유진은 아니었고 그를 핑계로 방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너, 너희….”

“….”

“대체 뭐하는 거야…?”

하지만 방 밖엔 유진이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끝났어요…?”

셰이가, 일루미나가, 그리고 세스티아가 방문 앞에 나란히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던 것이다.

“대체 뭐가?”

“세스티아님께 들어서 알고 있어요.”

대답하고 나서 다시 눈을 감고 기도하기 시작하는 셰이의 모습에 유진은 입을 다물었다. 뭐지. 피폐해진 정신 때문에 오락가락하는 것인가. 어젯밤부터 무슨 말을 하는진 들었어도 한 번에 이해하는 게 힘들었다.

“아기.”

그의 침묵에 담긴 혼란을 알아챈 것일까. 유진의 등장에 귀를 쫑긋거리던 일루미나가 눈짓으로 세스티아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 방 안에 라엘라님이 카야 언니의 몸에 강림하셨고, 언니의 아기를 잉태하기 위해 헨드릭 너와의 성사를 벌이고 있다고.”

“뭣….”

“우린 진심으로 성공하길 기도하고 있었어. 우리의 지금이 있을 수 있는 건, 카야 언니의 비중이 크니까.”

유진은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설마, 섹스하는 내내 이러고 있었다는 얘기인가?

그녀들의 행동 자체도 놀랍기 그지없지만, 라엘라님이 말씀하셨던 동료 신들의 ‘부탁’을 상기하니 현기증이 뻥튀기되는 것 같았지만….

- 부디 여신님의 자애와 자매님의 믿음에 합당한 결과가 임하길 바라옵고….

- 태어날 때부터 낙인찍혔고, 겪어온 고통은 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룬 업적은 지대하지만 소박하고 평범한 소원 하나 거머쥐지 못한 불쌍한 영혼을 구원해주시길….

셰이와 세스티아의 기도 소리에 도리어 마음이 차분해졌다.

여신님의 뜻밖의 모습이나, 그로 인해 경험하지 못했던 기가 빨리는 경험 때문에 가출했던 정신이 귀가하면서 본질적인 목적이 떠오른 것이다.

라엘라님이 자애의 여신이든 착정머신이든 상관없이… ‘임신’이 되기 전에는 이 행위는 멈추지 않을 거라는 것.

그리고 여신님 말씀의 뉘앙스를 보아하니, 셰이나 일루미나의 문제도 같은 방법 혹은 유사한 방법으로 해결할 조짐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신의 불행에 슬퍼하면서도 가족의 행복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나머지 두 아내가 있다면. 아니,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카야까지 포함해서 세 아내가 있는데.

유진, 그는 ‘고작’ 이 정도로 피폐해질 나약한 남자였나? 그것도 사랑하는 아내들을 위한 일인데?

세 여인은 유진에게 비난이나 재촉, 격려 등 사적 감정이 담긴 말을 하나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기도하고 응원했다. 절로 숙연해지고 비장해졌다. 어떻게 해서든 지금 얻은 휴식 시간을 최대한 늘리려 했던 유진은, 잽싸게 방광을 비워내고 물병 하나를 집어들었다.

‘수분 섭취는 필요하겠지… 존나게 싸대니까.’

각오를 다졌다.

아내들의 ‘진심’을 느꼈다. 무리하면서까지 기도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았고, 말리면 오히려 그녀들이 상처받을 것 같았다.

카야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라는 각오가 다시 날카롭게 벼려졌다. 신체와 정신 중 적어도 신체 쪽은 라엘라님이 회복해주시지 않는가. 이야, 좋네 좋아.

‘가자.’

라엘라님을, 아니 카야를 임신시키기 전까지. 최소한 카야가 깨어날 때까지.

유진은 방을 나오지 않겠다 다짐했다.

**

7일.

시간과 착정의 방에서 유진이 빠져나오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중간에 두어 번 그의 아내들이 방 안으로 먹을 것과 마실 것, 몸을 닦을 것까지 안에 넣어주었다 해도 경악스러웠다.

“유, 유진!”

하얗게 불태웠다.

유진의 상태는 종종 그가 말하곤 했던 지구식 표현대로 심각했다. 건장했던 체격은 왜소해졌고, 탄탄했던 근육은 쪼그라들었다. 제대로 서기는커녕 벽에 기대고 있는데도 사지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단언컨대, 던전에서조차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흉악한 괴물과 이단 앞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동료들의 사기를 진작했던 유진이 한마디 말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꿀꺽-

유진만큼은 아니지만 거의 7일 내내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에 몰두한 여인들은, 당장 유진을 부축하면서도 아직 나타나지 않은 나머지 한 명의 모습이 어떨지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문을 바라봤다.

“너희들의 기도는 이루어질 거란다.”

“라엘라님…!”

그곳엔 유진과 비교하는 것조차 실례일 정도로 쌩쌩하기 그지없는, 오히려 생기 넘치는 모습의 여신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여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아이도 무사하고, 내 아이의 아이도 자리잡았으니… 당분간은 안정을 취해야겠구나. 도와줄 수 있겠니?”

“물론,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유스티티아의 아이야.”

“예, 라엘라님. 경청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네 차례니, 준비하려무나.”

“………예?”

“이틀 뒤란다.”

털썩-

“유진!!!”

할 말을 마친 라엘라가 카야의 모습으로 변하는 동시에, 가까스로 눈만 끔뻑끔뻑거리고 있던 유진이 눈을 뒤집어깐 채 혼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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