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평범한 가족(2)
‘세스티아는…… 정말 최고다.’
잠든 코르디아를 옆에 두고 모자수유진심배덕섹스 플레이는 유진에게 황홀한 쾌감을 선사했다. 현자 타임이 찾아오고 나서 뒤늦게 수치심이 몰려왔지만, 세스티아도 그 못지않게 민망한 듯하니 무승부가 아닐까. 비록 육체는 피로를 호소했지만, 정신은 아니었다. 새로고침을 뛰어넘어 아예 재부팅을 한 컴퓨터의 기분이 이러할까.
사실 중간부터 이성을 차리긴 했으나, 이미 분위기를 탄 상황에서 무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세스티아가 그를 올가미처럼 옭아매서 빠져나가려 해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고마워, 세스티아. 미안하다, 코르디아.”
쪽- 쪽-
“으응.”
잠든 세스티아와 아기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한 유진이 그들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일어났다.
재충전이 끝났으니….
“오늘도 힘내볼까.”
다시 일과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
다시 몇 달이 지났다.
세스티아를 제외한 유진의 아내들은 하나같이 만삭이었다. 누가 언제 진통을 겪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기가 곧 나온다는 것 때문에 그럴까. 그녀들은 매사에 조심스러웠다.
“매운 게 먹고 싶긴 한데….”
“참아요.”
“응, 그러는 게 낫겠죠?”
다들 본래 육체가 워낙 튼튼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입맛이 없어진다든가, 그와 연쇄적으로 힘이 없어서 움직이기 힘들다든가 그런 일은 없었다.
“아기가… 제 몸의 흉터를 보고 징그러워하지 않을까요?”
“아기가 뭘 알겠어. 나만 해도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은 하나도 안 나는데.”
“인식하지 못해도 무의식에 남을 수 있잖아요. 그리고 유진 말마따나, 다섯 살이 돼서 엄마 몸은 왜 이러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요? 네?”
“너 태어난 거 자체가 기적이라며, 잘 달래줘야지.”
“그래도 납득을 못 하면요?”
“납득을 못 하면 어쩔 거야. 엄마 마음에 상처 입히면 혼쭐을 내줘야지.”
“유진, 그게 아니라… 내가 아니라 아이가 상처를 입으면.”
유진은 셰이를 뒤에서 꼭 껴안았다. 지금 상태의 셰이는 이성적인 논리로 달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지난 10개월 남짓한 기간동안 아주 잘 체득했다. 5년 뒤의 일을 벌써부터 걱정한다? 걱정도 팔자였다. 하지만 절대 웃을 수 없었다. 셰이에게 ‘아기’는 가질 수 없어서 희망으로만 간직했던 게 실제로 일어난 기적 그 자체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는 사랑의 결실. 세상 모든 게 아기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아기를 가진 엄마로서 순리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걸 어떻게 개변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남편된 자로서 더 큰 불안에 빠지지 않게 달래줄 뿐이었다.
“너와 내가 사랑으로 낳은 아이야. 처음엔 몰라서, 아이다운 순수한 무지로 서로에게 상처를 입을 수 있어. 아니, 분명 그런 순간이 올 거야. 그럴 때마다 잘 알려주면 돼. 물론 너무 어린 아이에게 곧이곧대로 모든 걸 알려줄 순 없겠지만, 아이에겐 아이 나름대로 납득 가능한 선이 있거든. 완벽한 사람이 없듯, 완벽한 육아 또한 없다고 생각해. 시행착오를 ‘같이’ 겪어가며, 최대한 올바르게 키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네 상처의 의미도 이해하고, 징그럽다기보단 감사함과 애틋함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유진…!”
유진의 말에 감동이라도 받은 것일까. 얌전히 유진에게 안겨있던 셰이는 뒤로 돌아 그의 뺨을 잡고 얼굴을 끌어당겼다.
‘성공이네.’
이렇게 또 한 번의 위기를 넘긴 유진이 기쁜 마음으로 키스에 응하려는 순간이었다.
“아윽!”
“셰이?”
“아, 아아.”
유진의 뺨을 만지던 셰이의 손이 그녀의 부푼 배 위로 향했다. 그녀의 하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설마…!”
셰이의 얼굴은 창백했다. 어느새 식은땀을 흘리던 그녀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은 가까스로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수백번 넘게 시뮬레이션했던 그다. 당황해서 우왕좌왕한다면, 산모가 더 불안에 빠지지 않겠나.
유진은 셰이를 조심스레 부축하고는, 분만을 위해 세팅해놨던 방으로 이끌었다.
“세스티아! 세스티아-!”
**
당연한 소리지만, 이 세계에 산부인과 같은 형편 좋은 시설은 없었다. 이 세계에서 의료인은 사제 및 수녀였다. 간단한 봉합 수술 정도야 의료행위에 속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출산은 치유하고 뿅 이게 아니라 산파가 존재하긴 했다. 거기다 인적 드문 구석에 자리 잡은 보금자리였다. 수도원도, 산파도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마망, 아니 한때 세일럼 최고존엄 치유수녀이자 아이를 둘이나 낳아본 세스티아가 있었다. 다른 산모들의 조력을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다시 한번 생각하지만, 세스티아는 신이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어찌됐을까.
“아아아악!”
“옳지, 옳지! 너무 무리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아으으으윽!”
산처럼 부푼 배가 이따금 꿈틀거릴 때마다, 셰이가 비명을 질렀다. 괴물과 이단들에게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던, 웬만해선 잇소리조차 내지 않던 용맹한 그녀는 평범한 여자가 되어있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유진 또한 마음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세스티아. 신성력을….”
“아뇨.”
보다못한 유진이 세스티아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정말 위급한 경우가 아니면 신성력의 도움을 받지 않는 게 좋아요. 신성력은 산후조리할 때….”
“하지만 저러다가.”
“괜찮아요. 산통은 당연한 거예요. 예상했잖아요?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곁에서 굳건히 지탱해주세요. 셰이는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힘이 될 거예요.”
세스티아는 침착했다. 그녀라고 해서 가만히 있고 싶었을까.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셰이의 고통을 가라앉힐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셰이는 바라지 않았다. 조금의 변수라도 용납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만 버티면 되니까. 생살이 전부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골격이 뒤틀리는 한이 있더라도, 정말로 죽기 직전까지 가더라도… 전부 버틸 거니까. 유진이랑 세스티아가 어떻게든 해줄 거라 믿고 있으니까.
유진은 셰이의 머리맡에 다가갔다. 셰이는 유진의 손을 붙잡았다. 잠시 진통이 소강상태였는지, 옅은 신음소리를 내던 그녀가 말했다.
“생각보다… 더 아프네요.”
“….”
“그래도… 참을 거예요. 내가, 아기가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그래.”
“먹고 싶은 게, 많아요. 카야 언니가 해주는 것도, 좋지만, 유진이 해주는 거라면, 더 맛있을 거 같아요.”
“얼마든지 해줘야지. 그게 뭐 대수라고.”
“헤… 약속, 했어요.”
“그래. 약속이야.”
“이 손도, 놓지 말아줘요.”
“당연하지. 꼭 붙잡고 있을게.”
“네에… 다행이에요.”
“뭐가?”
“이런 아픔을 겪게 돼서, 정말 다행이야….”
다시 진통이 시작됐는지 셰이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유진의 손을 원수라도 되는 것마냥 꽉 쥐었다. 유진의 손이 삐걱대며 비명을 질렀다. 용사대의 최전방에서 든든한 탱킹을 자랑했던 그녀의 악력은, 비록 몇 달 동안 육체적 활동을 쉬었다 해도 평범한 여자하고 차원이 달랐다.
‘참아야 돼, 참아야 돼, 참아야 돼…!’
이렇게 해서라도 셰이가 느낄 고통이 조금이라도 분담될 수 있다면, 손이 뭉개져도 된다. 그러니 무사히 출산을 마쳐다오.
유진은 셰이의 손을 맞잡고, 라엘라께, 그리고 그녀의 안에 계실 유스티티아님께 기도했다.
‘아기야. 힘들고 아플 너에게 가혹한 말이겠지만, 부디 빨리 나와주길 바란다.’
셰이가 알면 기겁했겠지만, 만일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나는 백 번이면 백 번 아기보단 셰이를 선택할 것이기 때문에.
- 머리!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 아아아악!
- 셰이! 힘! 힘을 줘요! 정신 놓으면 안 돼요! 어서!
- 아으으으으아아!
전보다 진통이 더 심해졌는지, 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셰이의 곁을 지키며 유진은 흘끗 시간을 살폈다.
9시간 28분.
“세스티아.”
“…아기 머리가 유달리 큰 것 같진 않은데, 셰이의 골반이 좁은 것도 아닌데 못 나오고 있어요. 이 상태가 더 지속된다면, 셰이가 느낄 고통도 고통이지만 아기한테 안 좋을 거예요.”
“내가 있던 곳에선 절개수술이 흔하긴 했지만, 여기선 안 되려나?”
“이곳의 도덕적인 잣대를 댈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지식이 없어요. 아무리 제 치유술이 있다 해도, 잘못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 있으니까요.”
“그럼 이럴 땐 보통 어떻게 하는데?”
“신성력으로 주변 근육을 강제로 활성화시켜요. 더 강하게 수축하고 이완하면서 아기가 잘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하지만.”
“그 또한 아기가 잘못될 확률이 있다?”
“네. 그리고 갓난아기에게 치유술을 퍼붓는 건, 오히려 폭력이나 마찬가지죠. 셰이한테도 후유증이 있을 거고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유진과 세스티아는 기진맥진한 셰이에게 안 들리게끔 속삭였다.
“셰이는 지금 자의적으로 판단할 상태가 못돼요. 조금 더 기다려보겠지만, 만일 그때까지도 아기 머리가 더 나올 기미가 안 보이면… 여보가 결정하셔야 돼요.”
“…얼마나 더.”
“길어야 30분 정도일까요.”
이젠 유진의 손을 쥘 힘도 없는지,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셰이. 유진은 그녀에게 다시 다가갔다.
“셰이.”
“….”
“셰이.”
“…유진.”
유진은 셰이에게 현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다 듣기도 전에 셰이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기, 무조건, 아기예요….”
“셰이.”
“뭘 위해, 지금까지, 감내한, 고통인데…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나랑, 아기랑, 함께, 힘내볼 테니까….”
축 늘어져있던 셰이의 몸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든 힘을 주려는 것 같았다. 유진은 괜히 그녀를 재촉한 것 같아 속상했다. 유진의 1순위는 셰이인데, 셰이의 1순위는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 그 차이를 서로 알고 있을 테지만 둘 다 티내진 않았다. 그저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호소했다.
“…미안해. 네가 제일 힘들 텐데. 지금까지 인내했는데, 조금 더 인내하지 못해서.”
“흐으. 흐. 미안, 하긴요… 다, 내가, 고집을 부려서, 이렇게 된…!”
말을 하다 만 셰이의 눈이 갑자기 커지고.
“셰이! 힘! 힘 주세요! 어서! 아가가 나오고 있어요!”
출산의 조짐이 보이는지, 서둘러 아기를 받아낼 준비를 하는 세스티아.
“하나둘 셋! 하나둘 셋!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더! 지금!!!”
응애애- 응애애- 응애애-
“무사해요!”
세스티아의 가슴에 매달린 채 파렴치하게 흉내낸 징그러운 아기소리가 아니라.
“축하해요! 유진, 셰이! 예쁜 딸이에요!”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랑이 흘러넘치는, 소중한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우렁찬 울음이 울려퍼졌다.
“아, 아아… 아기. 우리 아기.”
이걸 위해.
이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순간을 위해.
“유진… 이름. 우리 딸 이름, 불러줘요.”
존재하는 것만으로 주위를 행복하고 빛나게 하는 작은 아기에게.
“루키디아lucídĭa.”
그 앞길에 광명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