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4. 다음에 또 할 수 있겠죠?
기력 보충제랍시고 아침 겸 점심으로 푸짐하게 배를 채운 다음엔 특제 포션까지 받아 마셨다.
당장은 몸이 멀쩡한 듯 보이나, 어제 무리가 상당했기에 안 챙겨두면 몸살 난다거나 하루 이틀 뒤 확 티가 나서 고생한다며 알리샤는 에드릭을 향해 주의를 거듭했다.
“…음, 내가 이렇게 말해주는 건 좀 이상하려나?”
…탈탈탈 쪼아대고 털어주신 분이 그러는 게 낯부끄러웠는지 막바지에 말을 흐리는 그녀였지만, 나는 그 배려가 더욱 고마울 따름이었다.
“고맙습니다. 헤헤.”
적당히 애교 섞인 반응을 보여줬다.
……슬슬 아바타 신체 나이에 적응한 것도 같고. 한창 젊은 시절보다 더 젊을 적으로 돌아간 것처럼 활기차게 그녀를 대했다.
에우리에는 아무래도 여운이 상당했는지 속옷만 간신히 입은 채 억지로 붙들리듯 나와 식사 뒤 바로 침실로 향하려 했다.
아직도 비몽사몽에 정신을 못 차리는 듯 했는데, 마법사라서 그런가? 책상물림의 저질 체력은 충분히 공감할 부분이긴 했지만… 음, 많이 심했나 보다. 걸을 때마다 걸음이 위태로운 건 물론 걷다가 흡! 하고 멈춰설 때도 있었는데, 괜스레 미안해지는 이유는 뭘까?
미리 그녀가 침대에 눕기 전 시트를 갈아줬다. 거기다 서비스로 이빨 썩는다는 명분(사탕수수며 무설탕 음식이라면 크게 지장 없다곤 하나….)으로 양치를 대신 해주니, 어째 알리샤가 부럽다는 듯 꿍해져서 그녀 또한 양치질을 대충 해줬다,
음, 참고로 이때도 상당히 분위기가 미묘, 농후해졌지만… 내 몸 상태를 걱정한 그녀는 거듭 자제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게 한 번 고삐가 풀려버린 진짜 수틀리면 반응을 해버린다. 나나 그녀나 얼굴만 마주쳐도 전파가 살짝, 한끗만 어긋나면 바로 그쪽으로 분위기며 사고가 흘러버리니, 졸지에 시선을 마주치기조차 부끄러운 상황으로까지 번졌지만, 이것도 참 변덕이 심해 뭔가 텐션이 떨어지면 그러려니 하더라.
물론 내가 그렇다는 거지, 티를 안 낼 뿐 알리샤는 어떨까 싶었다.
낮에는 기력, 의욕 넘치는 활기찬 시골 소녀라면, 밤에는 요부, 서큐버스 엉덩이를 후려 찰 정도로 막강한 욕망을 발휘하는 그녀였기에 보일 수 있는 반응이 아닐까 싶었다.
젊을 땐 정말 죽자 살자 몇 날 며칠 떡을 친다는 썰을 들은 거 같은데… 바로 그 젊은 시절을 건너뛴 내 입장에선 이번 경험을 정말 다시 없을 그런 거라는 걸 재차 실감하고야 만다.
“내일이었지?”
숙성 및 가공 처리를 끝마친 용액을 포션 병에 담는 작업을 하며 우린 그럭저럭 대화를 나눴다.
자그마한 병에 깔때기를 꽂아 호스 같은 걸로 일정 용액만 흘려 넣는 식이라 사실 그녀 혼자서도 충분했지만, 효율을 위해 병을 세팅하고 뽑아 마개를 닫고, 다시 깔때기를 꽂아 그녀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예. 일단은요.”
“아쉽네~ 조금 더 있으면 좋으련만.”
“그, 그러게요.”
물론 나로선 대환영이지만… 사적으로 기한을 어길 순 없는 거니.
우리 회사가 부서에 따라 엄청 자유분방하더라도 기본은 지켜야겠지.
군대 못지않게 군기 잡힌 부서도 있다는데, 거긴 전투 관련 부서로 실제로 그룹이나 팀을 형성해 레이드를 뛴다거나 전투에 참가하는 형태라 그런 게 필수적이라면, 우리는 대부분 개개인의 업무 해결 능력을 중시한다는 식으로 전해들었다.
…물론 본격적인 건 아마 이번에 복귀한 다음, 업무 능력 평가인지 뭔지를 받은 다음 제대로 결정되겠지만.
……그런데 나 그다지 한 거 없이 떡만 줄기차게 쳤는데 괜찮을까?
내심 불안해졌다.
“아, 맞다. 평가서 써주기로 했지.”
“예?”
“가기 전에 그거 작성해달라고 전해 들었거든.”
아이고, 그렇군요.
대략 150병 정도를 채우는 걸로 마무리.
그때쯤 여전히 반 기진맥진한 기색으로 에우리에가 방 밖으로 나왔다.
“……졸려.”
“오늘 하루쯤은 푹 쉬어야 될 걸?”
“넌 왜… 그리 멀쩡해?”
“산골 소녀를 얕보지 마시지?”
“……산골은 무슨.”
위태위태한 코웃음을 뒤로 한 채 속옷 차림으로 우유만 냉큼 따라 마신 그녀는 다시 침실로 향했다.
거기다 그녀 말대로 시간이 흐르자 피로감이 훅 몰려왔다.
알리샤는 그런 날 보며, 에우리에가 먼저 선점한 자신의 침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웃어 보였다.
“좀 쉬던가.”
“으음, 예. 사양 않고….”
터벅터벅 걸어 문을 열고 들어서니, 속옷 차림의 에우리에가 퍼진 상태로 가슴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숙면을 취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음, 알리샤는 그렇다 쳐도 그녀 옆? 아무튼 괜스레 그쪽에서 잠들자니 뭔가 부끄러움이 밀려들었지만, 용케 기척을 느꼈는지 손만 살짝 뻗은 에우리에를 보며, 나는 그대로 그녀의 옆에 누웠다.
에우리에가 힘껏 날 껴안아 왔지만, 뭐랄까… 편안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 속에 알리샤와는 또 다른 향취에 의식이 기분 좋게 멎어가는 걸 느끼며 그대로 잠들었다.
그렇게… 뭔가 손해 본 듯한 느낌으로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땐, 알리샤 또한 날 바짝 끌어안은 채 잠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제 옷이 벗겨져 있는 거죠?
심지어 에우리에 옷까지?!
영문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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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겸 이른 점심을 끝마치고, 포션을 가방, 배낭에 적절한 형태로 넣기를 한참.
의외로 별 거 아닌 거 같았지만 무게 경감 배낭은 무게가 경감되는 거지 내부 물품의 강도나 내구도 향상에 도움을 주는 건 아니기에, 적절히 배치해야 움직임이 조금 과격해져도 문제가 안 생겼다.
사실상 포션 150병은 절대 못 드는 물량이지만, 마도구에 해당하는 이것은 그걸 가능케 한다.
그 외에 사랑의 묘약이라 불리는 귀중한 건 따로 자그마한 플라스틱 상자에 때려 담아 보관하니, 실질적으로 154병이 되시겠다.
“아! 너무 아쉬워서 어떡해!”
에우리에는 할 일이 있다며 아쉬운 기색으로 나중에 또 보자며 먼저 알리샤의 잡화 상점을 나섰기에, 실질적으로 날 배웅하는 건 그녀가 전부.
만남이 있으면 이별은 필연인 법.
그런 식으로 대강 만족하며 다음을 기약하려 했는데, 이상하게 떠나려니 엄청, 엄청… 음, 뭐라고 해야 할까.
“저기 누나?”
“응? 왜? 왜?”
활짝 웃으며 아쉬운 티를 최대한 안 내려는 그녀를 향해 나는, 내가 지금 제정신인가 싶을 법한 괴상한 부탁을 왠지 모르게 청해야만 했다.
아니, 그러고 싶진 않은데 한편으론 무지하게! 그러고 싶었거든요?! 이거 나름 로망 아닙니까?!
“……가기 전에 문 앞에서 한 번 해볼 수 있을까요?”
“헤헤.”
추릅!
내 부탁에 이런 귀여운 생물이! 하는 표정으로 붉게 상기된 그녀가 혀로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훑으며 웃어 보였다.
“물론. 나야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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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컷!”
따악! 하고.
쇼를 주도하는 마법사들이 시선 집중을 위해 손가락을 튕기는 것처럼 이목을 집중시킨 사내가 좌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기까지 보죠.”
어둠 속에서 영사기를 통해 벽면에 비추던 영상은 이것으로 종료.
실제로 내부에 불이 켜지자 영사기가 비추던 벽면은 백열에 파묻혀 형체가 자못 희미해졌다.
그러자 막 몸을 일으킨 사내, 내부가 환하게 밝혀진 시점에 그는, 갈색 정장 바지에 남색 와이셔츠, 붉은 넥타이를 걸치고 있었다.
현재 주임 딱지를 달고 있는 그는 민철영이란 사내였다.
“우리 후배 씨, 아주 개꿀을 빨고 오셨네?”
“크윽!”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고!
아니,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모든 생활들이 녹취되고 있었다니! 이거 범죄 아닙니까?!
“이야기 안 했나?”
“안 하셨잖아요!”
“그야 그렇지. 원래 처음엔 안 말해주니까.”
“……하.”
덕분에 최후의 이별이 아주 그냥…….
“평가서를 봐도 그녀가 무척 만족하고 좋아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이게 조작된 게 아니라는 건 뭐 보면 알 수 있는 거니, 다행이기도 하고.”
후배라 불린 그는 딱 봐도 신입 티가 확 나는 분위기였다.
단정한 단발에 회색 바탕의 상·하의 맞춤 정장.
와이셔츠는 화이트, 넥타이는 짙은 남색.
…뭔가 편한 복장이라기보단 단정함과 클린함을 주장하기 위해 애를 쓰는 듯 보였달까.
옷이라는 것도 입으면 입을수록 적응되고 익숙해지며, 보는 이도 그럭저럭 편해지기 마련인데, 확실히 그는 당장 정장이 크게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질 않았다.
“좋아, 에드… 가 아니라 우리 안태민 후배님? 첫 소감을 좀 말씀해주실까요?”
“지, 지금요?”
저쪽 세계에선 에드릭, 그리고 여기선 안태민이라 불린 사내는 무심코 맨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한 여성을 힐끗 살피며 선배라 불린 이를 올려다 봤다.
“왜? 못 해? 힘들어?”
“아, 아뇨. 어찌 감히….”
“뭔 감히야.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낄낄대며 그의 어깨를 툭툭 친 민철영은 뒤쪽을 보며 물었다.
“팀장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걸요?”
깍지를 낀 채 유일하게 데스크가 있는 좌석에 앉아 있던 그녀.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을 법한 짙은 남색 머리.
이마 위에 안착한 그녀의 머리 아래로는 하늘을 담은 듯한 푸른 눈이 반듯하게, 짙은 속눈썹과 함께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선이 미려한 콧대, 연한 분홍빛 입술에 드리운 곡선은 부드러운 그녀의 심성을 대변하는 듯 했지만, 의외로 전체적인 표정은 미소진 얼굴보단 살짝 무표정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게 참 신기하지. 전부 떼어놓고 보면 편안히 미소 지은 것처럼 보이는데, 왜 한데 붙여놓으면 무심한 듯, 시크한 듯 보이는 걸까.
짙은 블랙 와인 색의 상의 자켓, 하의는 스커트로 나뉜 투피스 정장.
그 안으론 연분홍색 블라우스가 자리하고 있었으니.
“평가 말입니다. 그래야 정할 거 아닙니까. 어떤 식으로, 어느 쪽으로 업무를 맡길지 뭐 그런 거 말입니다.”
사실상 이 넓은 회의실 겸 상영관을 겸하는 그곳엔 그들 셋이 전부.
민철영의 구체적인 물음에 막 깍지를 푼 그녀가 자신만만한 미소로 뜸을 들였다.
전혀 급할 거 없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기까지 할 정도로.
“으음, 그건 지금 말하기보다는… 안태민 씨? 오늘부로 입사 한지 며칠 지났죠?”
“예? 아… 대략… 한 달… 하고 2주 정도?”
당황해 살짝 말을 흐렸지만, 그녀는 별반 신경 안 쓰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좋네요. 그런 건 확실하게 숙지하고 알아두셔야죠.”
그리 말하곤 서류 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분류하곤.
“오늘부로 4일 휴가 드릴 테니 가족들도 챙기시고 생각도 정리하고 몸도 좀 쉬고 오세요. 여독도 쌓였을 거고, 사람 정신이란 게 당장은 문제없어 보여도 익숙지 않은 일에 계속 노출되면 긴장이 쌓이게 되거든요? 그러다가 실수하고 사고 나고 그런 거니까, 일단은 한숨 돌리고 오도록 하세요. 나머지 부분은 다음 면담 때 제대로 언급해보기로 합시다. 자, 제 용건은 여기까지인데, 질문하실 사람?”
“끄응. 없습니다.”
“태민 씨는요?”
“예, 저도….”
“좋아요. 그러면 4일 뒤에 뵙죠. 아, 철영 씨는 나갈 때 태민 씨 옷 좀 잘 세팅해주고요. 군대에서 그거 뭐랬더라? 후임 출소? 아아, 실수. 휴가나 외출 갈 때 다림질도 해주고 뭐 그런다고 하잖아요? 그거 말이에요.”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좋아요. 그러면 여기까지. 평가며 발령 문제도 그때 정하기로 하고.”
이번에야말로 그녀는, 어딘가 고풍스런 느낌을 담은 미소를 품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철영 주임 말대로 꿀 잘 빤 거 같지만 일은 일이었으니, 고생 많으셨어요. 다음에도 기대해보죠.”
그러고 흔쾌히 퇴장하려다….
문 앞에서 딱하고 멈칫한 그녀.
“아, 맞다. 잊어먹을 뻔했네요. 가면서 이거 서무과에 제출하세요. 챙길 게 미흡해서 한우 세트 좀 챙겨두라 일러뒀으니 부모님께 선물로 전해 드리고요. 그리고 월급날 지났으니 통장 확인하고 문제 있으면 즉각 철영 씨한테 연락 주고요. 철영 씨도 오늘부터 휴가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