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7. 너, 페티쉬라고 들어는 봤니?
“얼마나 박아댄 거야?”
복도에 선 날 향해 누군가가 어이없다는 음색으로 말을 걸어왔다.
아니, 말을 걸었다기보다는 이건 질렸다고 할까.
“냄새가 여기까지 풍기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하얀 천, 색감이 조금 어두운 백색 천을 앞뒤로 몸을 가린 여성이 서 있었다.
뭐랄까 저거… 그리스? 스파르타? 잘은 몰라도 그쪽 특유의 차림새가 아닐까 싶었다.
진짜로 천 하나로 앞뒤를 감싸고 걸치는 형태니 말이다.
일전에 본 적 있는, 동양적인 미인 소녀로 폭유(…)에 키는 작지만 몸매의 굴곡이 환상적일 정도로 눈에 띄는 그녀. 가슴도 큰데 심지어 골반마저 넓다.
…누가 보면 임최몸이라며 감탄하지 않을까 싶은데, 키는 의외로 작은 편.
청소년 소리 들을 법한 나보다야 크지만, 크게 차이가 안 나는 정도였다.
사실 겉으로 봐도 내 또래 혹은 조금 더 많은 정도로 밖에 안 느껴지는 외양이었는데… 동안인지 진짜로 몸이 빨리 성장한 건지 잘 구분이 가질 않았다.
“야, 일단 너 좀 씻어야겠다.”
그리 말하곤 따라오라며 등 돌린 그녀의 걸음은… 여기에 얼마 있진 않았지만 이곳에서 접한 그 누구보다 뒤태며 움직임이 요염하고 야릇했다고 하면… 내가 문제가 있는 건가?
덕분에 반쯤 발기하다 내려앉으려는 녀석이 주책 맞게 다시 고개를 빼들었지만, 낯부끄러워 나는 녀석을 아랫배 쪽으로 밀어 넣듯 억누른 채 어정쩡한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혼자 씻을 수 있지? 아님 도와줘?”
“괘, 괜찮습니다!”
당황하긴 했지만, 평소처럼 쥐 죽은 목소리,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대답하는 일은 없었다.
…아, 이거 하나만 놓고 봐도 성장했구나 하고 실감 된 터라 괜스레 기분이 업됐다.
욕실로 들어가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세상 편해졌다.
“후우….”
잠이 솔솔 오는 건 덤이고.
그래서 실제로 잠들 뻔도 했다. 아니, 잠들었던 거 같은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시계가 따로 없고 외부 정광이 따로 안 느껴지니 잘은 모르겠는데, 여긴 창문이랍시고 달린 것들은 사실 진짜 창문도 뭣도 아니었다. 심지어 테라스라고 달린 것도 전부 모조 형태로 만들어진 걸로 언제든 낮밤의 환경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공간이라나?
‘그걸 모르고 날이 계속 밝아 있어서 언제 해 떨어지나 싶었지.’
하루 종일 시달려도 해가 안 떨어지기에 진짜 앙겔하고의 일전(?)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그렇게 혼절하고 나도 여전히 해가 떠 있다 보니 속사정을 듣기 전까진 진짜 제발 좀 해 떨어져라! 빨리 좀 자자! 하는 심경으로 처절히 이러쿵저러쿵 했었는데.
“하아.”
잠이 모자라. 잠이….
그런 식으로 뜨거운 물에 솔솔 몸이 녹아나려는 찰나.
“야! 자려면 나와서 자! 거기서 그러면 감기 걸려!”
라는 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랐다.
실제로 그녀는….
“며칠 동안 소식이 없더니 아주 작정하고 빨렸구나.”
하며 쯧쯧 혀를 차대고 있었다.
“하루 푹 자고, 나머진 그 다음에 이야기하자.”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숙소를 떠나는 모습에 나는 솔직히, 믿기지가 않았지만 역시 세상엔 여러 사람이며 스타일, 방식 등이 있구나 싶어 덕분에 쓰러지듯 꿀잠을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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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깨기 무섭게 이번엔 동양식 복장인데 중국? 베트남? 아, 그쪽이구나 싶은 붉은 천을 걸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오자이? 라는 걸로 차이나 드레스와 유사한 느낌이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는 옷인데, 그렇다고 또 대륙 쪽 영향을 안 받은 건 아니라고 예전에 들었던 것도 같고.
그나저나 붉은색?
“저… 혹시 결혼하셨는지요?”
“안 했는데?”
“…….”
결혼 안 한 이들은 대개가 흰색, 한 사람은 색감 있는 걸 걸친다고 들었는데.
“왜? 여기가 베트남인 줄 알았어?”
식겁했다.
“저희 세계에 대해 아세요?”
“거쳐 가는 곳 중 하나지.”
……정체가 뭘까.
“그러니까 나밖에 알려줄 수 없는 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온 거잖냐. 아무튼 나는 앞선 녀석들처럼 너한테 대주려고 있는 거 아니니까 꿈 깨시고.”
“음, 그리고 실례가 안 되시면 성함이…?”
“성함 할 정도로 나이 많은 건 아니란다. 지금은 그냥… 메리, 마리, 둘 중 하나 부르고 싶은 걸로 불러.”
“그러면 마리 님으로.”
“왜?”
“그냥요.”
“그러시던가.”
시크하면서도 도도한 분위기를 겸비한 그녀는 아무튼 밥이나 먹자며 음식 오기 전에 씻으라 말한 덕에 간단히 샤워를 끝마치고 그녀와 마주했다.
“앞선 계집들한테 뭐뭐 듣고 배웠어?”
“음….”
또 습관적으로 그러니까… 하려다가 간신히 참고, 신중히 답했다.
그걸 들은 마리는… 길게 자란 검은 머리를 박박 긁으며 짜증을 보였다.
“그래, 로메는 그렇다 쳐도 앙겔 그건 그냥 냠냠 쩝쩝 잘 잡아 드시기만 하셨다?”
“그래도… 배운 건 있어요.”
“아, 그러시겠지요. 그런 성향의 여자하고는 살 접하는 것만으로도 느끼는 바가 있겠지. 어이가 없어서 원.”
질색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녀.
“그래, 그렇다고 치고. 우선 내가 너한테 어떤 걸 일러줄지를 알려줄게.”
때마침 룸서비스가 도착해 잠시간 대화가 동결됐다.
그녀는… 한 마디로 논하기 대단히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요조 숙녀처럼 보이다가도 뭔 시골 아가씨처럼 보이더니, 화끈한 여장부처럼 굴다가도 뭔가가 도도하고 시크한 듯한 비즈니스 걸 느낌을 내다가도 어디 귀한 집 자녀를 연상하게 하는 산뜻하면서도 아련한 분위기까지.
“너는 일단 연하보단 연상 취향이구나.”
그러더니 대뜸 이리 말하는 게 아닌가.
“연상 취향이 된 이유는 그쪽이 첫 경험 내지 좋은 쪽으로 기억이 남았고 그게 너한텐 편한 거지?”
“……어떻게 아셨어요?”
“너 이 새끼, 거짓이 입에 뱄네.”
“예?”
“너 연상 취향 아냐.”
“???”
“지금부터 그걸 내가 하나하나 증명해줄게. 자기 성적 취향도 뭣도 모르는 애가 뭘 어쩌구 하겠다고. 사랑이란 올가미, 덫은 걸린 쪽이 가는 거야.”
그러면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그녀.
“자기의 취향을 파악 못 하면 나중에 그러다 코 하나 잘못 꿰여서 그대로 가는 거라고 바보야.”
“…….”
“다행히 나는 여러 가지를 충족 가능한 입장이니까, 잘~ 일러주도록 할게.”
그 전에.
“배나 채워.”
그녀는 단호하게 테이블 위에 세팅된 음식에 시선을 집중했다.
당연 이곳에서 제공된 식사, 음식 상태는 최고였다.
미친 듯이 먹느라 세세하게 신경은 못 썼지만, 아무튼 무엇 하나 거리낄 게 없는 것들.
덕분에 배가 잔뜩 채워졌고, 또 소화 차원에서 그녀는 걷자며 테라스 쪽으로 향하는데, 런닝머신도 아니고 무빙 워크 느낌으로 아예 걸을 수 있는 공간이 형성됐다.
심지어 걸어가면서 주위 풍광마저 바뀌니 이게 참….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바닷가 비슷한 공간을 형성해 그늘진 모래 위를 걷는 것 같은 분위기를 디테일하게 연출했다.
“옷만 보면 네가 말한 대로 베트남? 그쪽 지방을 하는 게 좋겠지만, 거기 엄청 덥고 습하니까 혹여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 가지 마라.”
“마리 누님은 저희 세계에 대해….”
“그리고 나처럼 알고 있으니까 그런 소리 해도 용서가 되는 건데, 혹시 다른 누군가가 그런 척한다고 쉽사리 그딴 소리 하지 마라. 너 그대로 모가지 날아간다.”
흠칫해서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은 괜찮은데 다음에라도 말이야.”
“예, 명심하겠습니다.”
“뭐, 싹수는 있는 거 같네.”
그녀는 고고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런 미소를 띄웠다. 그거 하나로도 느낌이 확 달라진다고 할까. 정말 신기한 분위기를 지닌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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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티쉬 나 성적 취향에서 비롯되는 오르가즘이란 게 있거든?”
그녀는 언제 갈아입었는지 이번엔 허리가 트여 배꼽이 훤히 보이는, 중요 부위만을 확실하게 가린 붉은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흔히 여성이 뭐 신체적인 쾌락이 남성보다 높다 뭐다하는데, 이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야. 물론 남성처럼 확 갔다고 훅 내려앉진 않지만.”
“그렇군요.”
대화를 임함에 있어선 맞장구가 중요하다.
이걸 분명 인턴 때 잘 배웠는데 정작 실행하는 건 지금이구나.
로메리스와 앙겔에게서 얻은 자신감이 슬슬 빛을 보는 시점이었다.
“나는 그걸 알려줄 거다. 물론 네가 특정 여성 혹은 남성을 봤을 때 그들의 성향이나 취향을 파악하는 걸 떠나 페티쉬를 파악하고 이런 건 눈치껏 알아서 하고. 일단 자신을 알아야 타인 걸 살피든 말든 할 거 아냐? 맞지?”
“옙! 맞습니다!”
“어려운 건 아니니까 걱정마. 오히려 꽤 재미있을 거다?”
그러면서 고혹적으로 웃는 그녀.
여태까지는 그냥 말 나누기 쉬운 선배 느낌이었는데 갑자기 느낌이 확 바뀌었다. 이건 그러니까… 선배가 아니라… 선배인 줄 알았는데 실은…….
“행동거지, 눈빛, 말투, 어조, 몸짓… 아주 사소한 것들을 적절히 바꾸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를 확 바꿀 수 있지. 이건 연기 계통이니 내가 자세히 설명은 안 해줄 테지만… 너도 익혀 둬야 할 거니 참고만 해둬.”
“제가요?”
“너 아님 누가?”
그러곤 잔소리꾼 선배의 분위기로 다시 돌아간 그녀.
“익숙해진다는 건 달리 말하면 질린다는 거야. 왜 여우 같은 마누라가 곰 같은 마누라보다 낫다고 했겠어? 이거 너희 나라 속담인가? 아무튼 그쪽 표현 맞지?”
“…예, 맞아요.”
맞을 거예요, 평소라면 이런 어중간한 표현을 썼겠지만 로메리스도, 심지어 앙겔도 그딴 어설픈 소리 말고 확신을 담아 말하는 버릇을 기르라 했다.
책임을 지면 여러모로 손해인 세상에서 살아서 그런지, 우리는 말투 하나하나가 확신보단 뭔가 회피하고 어물쩍대는 뉘앙스가 습관화된 게 아닐까, 무심코 생각해본다.
…잘잘못 회피하려는 게 아니고!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