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취직하니 떡을 침. 이세계에서 (29)화 (29/454)



〈 29화 〉9. 혹시 엘프 처음 보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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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땐 어느새 침대로 옮겨져 있었다.

날이 하루 바뀌었는지 아닌지는 분간이 안 갔지만, 몸 상태는 양호했다.

깨어난 직후 에드릭은 제이실라가 준비해둔 복장, 마치 여름 별장에서나 입을 법한 알로하 티에 반바지, 끈으로  샌들을 걸치고 에라힘 내에 마련된 휴양 시설을 둘러볼  있었다.

그녀 또한 무릎에 살짝 못 미치는 새하얀 원피스에 양 다리는 무릎 위까지 오는 스커트 걸친 상태였는데, 그녀는 어제는 분명 얕은 구두를 신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은 스커트가 반을 감추는 거 외엔 사실상 맨발이라 봐도 무방했다.

발의 반쪽, 발뒤꿈치와 발등 정도만을 감샀기에 사실상 발의 전면, 발가락들은 그대로 드러나 있느 상태였는데, 그게 또 몹시… 뭐랄까. 선정적인 느낌보다는 가볍고 쾌활한 느낌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겉 외양을 보면 딱 스물 정도로 느껴지면서도 얼굴만을 유심히 보면 그보다 더 젊은 듯하나,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연세랄까, 나이는 스물 중반에서 후반을 연상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편안한 누나 혹은…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어머니 느낌이 난다고 할까. 뭔가 좀 이상했지만  정도로 모든 걸 다 받아줄 것 같은 알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어쨌든 편하고, 의지할  있을 것 같은 사람, 아니 엘프라는 점.
거의 처음으로 인근을 떠나 에라힘 내부를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야외 공간도 대단히 다양했다.
사막의 오아시스, 정말로 바다 해변을 연상하게 하는 공간서부터, 살짝 써늘한 느낌을 지닌 절벽의 별장이나 벌판 느낌의 공간도 있는가 하면, 정말로 눈이 떨어지며 추위마저 느껴지는 공간에 인파가 엄청 북적이는 도심서부터 한적한 시골 정경,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각종 장소들까지.

인파가 다수며 여럿인 곳도, 그런 이들을 느긋하게 지켜보거나 내려볼 수 있게끔 되어 있는 곳도, 그 와중에 격리된 채 개인들이 널리 즐길 수 있는 전용 공간들까지.


…놀이 공원만 있으면 딱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너무 나갔는지 그런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가볍게 회전목마 나 투우 기계 같은 게 있긴 했는데, 투우 기계 쪽은 바 하고도 연결돼있어서 오래 버티는 사람이 흥에 겨워 술을 쏜다던가 하는 상황도 드문드문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시장은 연상하게 하는 무수한 가게들. 각종 물건들이 줄을 이어 전시돼 있음은 물론, 그것들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비용들임을 알며 윈도우 쇼핑하듯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여긴… 뭐랄까. 라스베이거스와 두바이를 합쳐 놓은 곳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모두를 가본 건 아니지만 들은 풍문과 정보를 통합하면 대강 그렇지 않을까 하고, 에드릭은 생각했다.

그녀와 손을 마주 잡거나, 팔짱을 낀 채(키 차이가 있지만 제이실라 쪽이 매달려오는 형태로) 차분히 걷고, 이곳저곳을 오고 가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보람찬 일이라 느껴졌다.

 그대로 힐링.

그녀는 친절하게 여기는 어디고 어떻고 등을 설명해줬고, 어제와 달리 이번엔 내가 그녀의 말을 경청하듯 귀 기울여 그녀의 설명을 들어주는 형태였다.

대개 사람은 듣는 것보다는 일방적으로 말하고, 훈계하고, 설명하려 드는 걸 좋아한다.

이 모든  예컨대 내가 상대보다 우위임을, 또한 관심의 대상이며 관심을 독차지하고자 하는 욕망 같은 것에서 비롯된다고 하는데, 이러한 목적이 겹치면 갈등이 발생한다는 이야기를 심리 및 관련 교육에서 들은 기억이 났다.

그러기에 상대의 호감을 사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우선 첫인상을 잘 새겨 넣고, 그 다음으론 내가 당신에게 관심이 있으며, 당신을 존중하고 당신을 신경 쓰고 있습니다. 하는  말과 행동으로 전달해 상대가 그걸 인식하게 만드는 거라 했는데,  가운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가 바로 경청이라 들었다.

막연히 듣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흔히 리액션 혜자라 해서 적절히 리액션을 잘 발휘해주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또 겉으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저는 당신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습니다.’ 하는  적절히 어필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거듭 강조했었는데, 어제 그녀가 내 이야기를 경청하며 보인 반응을 기억해내어  또한 그걸 고스란히 따라하는데 열중했다.

그런데 막상 그러니 이야기를 경청하며 그녀와 동행하는 이 순간들이 전부 즐겁고 경쾌하게만 느껴졌다. 느릿느릿 걸으며 그녀의 손과 몸에서 전해져오는 자연스러운 향기를 음미하고 느끼며, 주위에서 쏟아지는 몇몇 시선들을 다시금 즐기면서까지.

이곳을 오고 가는 대부분은 대단한 미남 미녀들이었지만, 제이실라는 그 가운데서도 유독 돋보였다.


…나는 어떨까 모르겠지만.

“슬슬 배고프죠?”




깨어난 직후부터 허기가 지긴 했었지요.
속내는 그랬지만 에드릭은 웃으며 답했다.



“조금요.”


할 일이 없다는 건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다.
백수조차도 할 일은 많다.
깨어나자마자 뭐가 됐든 컴퓨터를 켜고, 아무튼 뭘 한다.
인터넷 사이트에 기웃거리고, 게임을 하고, 소설을 읽고, 만화며 영화를 보고, 드라마도 보고….


즐길 게 정말 차고도 넘치는 세상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러는 내내 허무함, 자괴감은 시간이 갈수록 날  먹어갔다.


남들보다 뒤처지는 기분.
달력을  때마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듯한 무기력감.
누군가는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음울함과 열등감까지.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만 켜도, 유튭이라던가 인스타라던가, 페북이라던가.
심지어 블로그를 살펴도 나보다 못한 사람, 모자란 사람, 어설픈 사람은 어째 단 하나가 안 보였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알바를 뛰고 파트 타임을 뛰어도 벌어들이는  깨알만 했다. 월세 내고 생활비 이러고 하면 다 날아간다. 남는 건 어떤 식으로든 날아간다. 물건을 사든 기계를 사든 도구를 사든 어쨌든.


뜬금없이 컴퓨터가 망가져 수리를 하건 부품을 사더라도.
옷도 잘 안 사 입어서 옷이 급하게 필요해서 뭘 입다 보면 또 훌쩍.


2,3년 쓰던 운동화가 바닥이 드러나서 막상 사려하면 뭔 운동화를 살까 하며 인터넷 뒤지다 보면 하루가 그냥 저물기 일쑤.


 만원 더 내서 사면 되는데 그걸 또 수 시간 반복해서 검색하고 후기 조사하면서 좋을 걸 구별해서 시켜서 만족하는 반면, 이걸 사기 위해 며칠을 소모할 필요가 있었나 싶어 만족감 못지않은 자괴감에 휩싸이고.


간혹 부모님이 연락을 오면 잘  지내도 지내고 있다, 열심히 하고 있다며 거짓 아닌 거짓을 일삼고.


그런 걸로 멘탈 날아갔지만 술을 마실 용기도 없고, 할  있는 것도 없으니 야동이나 보면서 멍 때리다 네다섯 시간 꼬박 또 날아가고.


정말이지….


뒤늦게 정신 차리겠다며 뭘 하고 배우고 해도 그 시도는 잠시뿐.
외국어 공부, 자격증 공부, 뭐든 시도하더라도 금세 지치기 일쑤고.  거기서 학원 같은 곳 등록할 용기는  나고. 그래서 인터넷 강의를 신청했지만 그러기에 대강대강 하기 일쑤고.


누구는 의지가 부족하다 노력이 부족하다 그러는데, 무심코 지나가다 서점 책 들추다 보면 다 잘 될 거야, 괜찮아, 넌 나쁘지 않아, 하는… 기만인지 단순 위로인지 모를 글귀만 잔뜩 써놓은 괴상한 책들이 메인에 득실대질 않나.

그게 진짜로 힐링이 될까? 위로가 돼?

글과 친하지도 않았고, 자기 계발서며 책들을 여럿 들췄지만 읽을 때만 그렇지, 자고 일어나면… 아니, 읽고 책 덮기 무섭게 다시 침울해지는  매한가지.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았다.
돈, 인간관계, 꿈….

패배주의적 사고도 습관에 일환.
실패도 습관이고 성공도 습관이다.
…말은 참 좋지.


“무슨 걱정되는 일 있어요?”
“아니요. 아무것도.”



뜬금없이 그런 생각들이 들어 기분이 살짝 저조해졌지만, 애써 내색하진 않았다.
아니, 말로만 안 한다고 모를 거 같진 않았지만.


속내를 완전히 감추기엔 아직, 아직은 많이 부족했으니까.
맛이 있었던 만큼 자괴감도 깊어졌다.
의외지만 라면이 더 맛있었으니까.
그렇게 질리도록 먹은 라면 맛이 그립게 느껴지다니,  이상하지?




“괜찮아요.”



어느새 내 손을 붙든 그녀가 상냥한 시선으로 그런 날 다독여줬다.



“어떤 위로를 드려야 될지 모르겠어요. 마음의 상처는, 아무리 이해해주고 다독여주려 해도 한도라는 게 있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에드릭, 당신이 잘 됐으면 해요. 마음 편하게, 행복하게,  됐으면 싶어요.”
“네… 고마워요, 제이실라.”
“별 말씀을.”


울적한 기분도 그녀의 미소, 그녀의 관심과 걱정에 완전히, 씻은 듯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흔쾌히 웃을 수 있었다.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건, 이 정도로  힘이 되는 건가.
요즘에서야 그 점을 절실히,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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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한방에 모이면 할 게 뻔하지 않은가?
그래, 뻔하지.
그러나 그걸 제외하고도, 할 일은 엄청 많았다.

솔직히 나는 내가 할 말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 말주변이 없고 그런 쪽으로 재미를  붙일 거 같다고도 계속 생각해왔다.
그런데 아니었다.


가벼운 차와, 간단한 다과를 차린 상태로 그녀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특히 그녀는 나이는 따로  밝혔지만 무수히 많은 경험을 한 덕에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치 천일야화, 예컨대 세헤라자데에게 흥미 깊은 이야기를 듣는 샤리아 왕이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계속해서 이야기를 듣곤 했다.

앉아서만 듣다 피곤하면 일어나서 산책하듯 주변을 둘러보면서까지.
그러다 살짝 졸리고 지칠 때면 그녀와 같은 침대에 몸을 뉘인 채, 때때로  팔베개를 하고  바로 옆에 얼굴을 뉘인 채 고운 음성으로 꾀꼬리처럼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녀가….


또 한편으로는 그녀의 무릎베개를 배고, 부드러우면서도 갸날은 배를 배고 똑같이 누운 채 시덥지 않은 대화를 나눈다던가….


뭔가 엄청 이야기를 쏟아 냈다는 기억은 있는데, 막상 지나고 보면 뭐인지도 헷갈리고.


그러나 그런 게 아무런 의미도, 문제도 없기에 그렇구나 하고 흘려넘길  있는 여유까지.

그렇게 하루, 이틀, 삼일.


아무튼 날짜가 기울어가는 만큼, 나는 더더욱 그녀에게 몰입했고, 그녀에게 개입됐다.

진심으로 손을 마주 잡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포근해졌고 무언가로 한가득 텅  가슴 속이 채워지는 듯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건 정말로, 말로 설명 못 할 정도로 아련한 무엇이었다.

그렇게 사흘째.

그녀가 말했다.


“에드릭 님, 여태까지 어떠셨나요?”


여전히 친근하면서도 깊이 있는 음성으로, 그러나 이전과는 뭔가 달라진  미세하게 어긋난 물음은, 그녀는 내게 던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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