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9. 혹시 엘프 처음 보셨…?(3)
때가 도래했나 싶었다.
그녀는 내게 애인이 되어주겠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역할극.
여자에 익숙지 않은 날 위해.
다분 익숙해지도록 체험 목적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 거지, 진정한 의미로 애인이 되겠다는 게 아니었다.
알면서도 씁쓸해지는 이야기지만….
그런 걸 순수하게 못 즐긴다는 게, 내가 누구들 말처럼 여성에 익숙하지 못한 이유일 테지.
“침울해하지 마세요.”
며칠 에드릭과 지내서 그런 걸까. 자그마한 표정 변화에도 그녀는 속내를 읽듯 반응해왔다.
사실 눈치가 조금 있다면 에드릭의 태도며 얼굴색, 표정만으로 그의 상태를 읽는 건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이실라는 바로 그런 점을 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강한 사람은, 타인의 날카로운 반응, 적대적 행위에 움츠러들고 위축되기 마련.
도와주려는 행위조차도 오해받고 지탄받음으로써 그들은 자책감에 사로잡힌다.
돕고자 했던 자신의 행동, 의도가 실은 그들에게 방해나 민폐였다는 사실을 경험한 그들은, 더더욱 위축될 거고, 나중에 가서는 쉽사리 무언가를 시도하는 거 자체를 두려워하게 될 거다.
말을 거는 것조차.
자그마한 도움을 주는 것조차도.
그것이 설혹 명명백백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걸 알면서도.
과거적에 겪은 상처가 흔적으로 남아 현실을 붙들고, 현재를 붙들 것이기에.
제이실라는 그가 일반적인, 평균적인 사내며 남성들보다 훨씬 친절하고 배려심이 깊다는 걸 파악했다.
단순히 듣고 파악한 것보다 훨씬 더.
그는 자신의 말에 상처 입을까 봐 쉽사리 어색한 말을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언제나 비슷한 단어, 문장, 문구를 사용하는 이유는, 조금만 단어의 어감이나 표현이 달라져 혹시라도 오해하는 일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에서 비롯된 습관일 거다.
또한 표정 또한 항상 웃으려 노력하고, 부담이나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안 좋은 감정 표현은 최대한 억누르며, 좋거나 긍정적인 면모를 드러내고자 노력한다.
…그런 걸 노력한다 이 이야기다.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고, 감정이 이끄는대로 표정을 표출하는 게 아니라, 다분 의도적으로 그런 걸 조절하려 노력하려 하며, 그러기에 상대를 대하는 것에 금세 지치며 거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라 제이실라는 판단했다.
이틀 정도가 지나 그런 기색이 많이 완화됐다.
그녀는 마치 애완동물과 신뢰를 쌓듯 주기적으로, 반복적으로 그에게 나는 괜찮아요, 저는 좋아요 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것은 의식, 무의식을 통괄해 그에게 전해졌고 그때서야 그도 안도하며 그녀에게 의지해왔지만, 그 순간에서조차 그는 보이지 않는 선을 그었다. 본인이 알든 모르든.
그게 조금 안쓰러웠다.
순수하게 누군가를 좋아하고 흥미를 느끼고 관심이 닿는 대로 손을 뻗기까지.
솔직히 감정을 부딪치고 단호히 그 감정과 마주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 위축되고 자신을 숨기고 가둬놓고 살아간 이는, 당연 그러한 행동에 부담을 느끼고 불편을 느낄 수밖에.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익숙하지 않았기에.
해본 적이 많지 않기에.
그래서 그녀는 손을 잡는 것서부터,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아주 사소한 것들을 반복하는데 집중했다.
아주 기초적인 관계의 개선을,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북돋아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말이다.
그러기에 지금의 에드릭은 이전보단 나아졌다.
모르는 여자와 마주하고서도 여전히 부담은 느껴지나 이전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반응했다.
거기서 그의 천성이 조금씩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상대를 앞서 걱정해주고, 도움을 주려 하는 그런 천성이 말이다.
물론 이건, 이용당하기 너무도 쉬운 문제가 있었다.
누군가가 그런 약점을 악용하고자 한다면?
순수하다, 착하다는 건 달리 말하면 부려 먹고 이용당하며 속기 쉬운 성향, 성격을 의미한다.
그들은 죄가 없다.
그들을 이용하려는 이들이 잘못된 거지.
그러나 세상이 척박해지고 음흉해질수록, 당하는 쪽이 잘못됐다는 식으로 변질되고야 말았다.
그녀는 바로, 그런 점이 종합적으로 걱정됐다.
그가 순수성을 유지하기를.
한편으론 그러한 모진 풍파로부터 굳건히 견뎌냈으면 하는 마음도.
“에드릭 님은 이곳에 오게 된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가요?”
“조금은요.”
명확하게 딱 이거다! 하긴 뭐했지만,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내일이면 마담을 뵙고 이런저런 조언을 듣게 될 거예요. 그때 그 분도 평가를 하시겠지요.”
“평가요?”
“예. 저도 자세한 건 모른답니다. 아마 직접 뵈면 알 테지요. 그때는 절대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마세요. 물론 마담이 먼저 얼굴을 가린 채 마주하실 테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가림막이나 가면을 벗더라도, 마주치시면 안 돼요?”
“…저번처럼 되니까요?”
“맞아요. 그녀의 아름다움은 단순 미적인 기준을 벗어나 마력 같은 거니까요. 저주에 가깝고, 그걸 한층 넘어선 무언가죠.”
“예, 참고하겠습니다.”
“저희들은 본래 사귄다는 개념을 몰라요. 일반적인 엘프들은 어떨지 몰라도 전 하이 엘프기에 혼약의 대상은 태어날 적부터 정해져 있고, 살아가는 방식도 태어날 적부터 미리 배정받곤 그러지요. 그걸 위해 살아가고, 그걸 위해… 숨을 쉬고 있는 거니까요.”
그러고 보니 한창 이야기를 나눴더라도 그녀에 대해선 의외로 잘 몰랐던 듯도 싶다.
“제가 이곳에 있는 건 다분 제 억지로 비롯된 거예요. 당연 제가 자리를 회피했기에 절 대신해 그 책임을 물려받은 이가 있겠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거예요.”
그녀는 고소를 머금은 채로 잠시간 입술을 달싹일 뿐, 따로 말을 이어가진 않았다.
아련한 듯, 잔잔하게 떨리는 속눈썹을 바라보며, 나는 뭐라 말을 건네야 위로가 될까 싶었다.
“그래도 고마웠어요. 에드릭 님의 이야기를 듣고, 조금은 위로를 받았거든요.”
그녀는 조금은 개운해진 듯 살짝 눈물 어린 눈으로 웃음 지어 보였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살짝, 한탄 조로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절 위로하시려고 뭐랄까, 억지로 안 그러셔도 되요.”
“…….”
“정말로 도움이 됐으면 다행이겠지만… 그런 점까지 언급하시면서 제게 도움을 받았음을 언급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괜찮으니까요.”
“후후….”
그녀는 뭐랄까, 시선을 떨구곤 자조하듯 웃고 있었다.
미세하고, 허여멀건 웃음이었지만 그건 처연하지도, 안타깝지 않은 무엇.
“들켰네요. 이런 점은 날카롭네요.”
“눈치 보고 살아온 것만 수십 년이라서요.”
“나이도 얼마 안 되면서.”
그녀는 짓궂은 시선으로 날 재촉해왔다.
“당신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에요. 누구나 사람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요. 그러나 그런 상처 입는 것에 두려워 말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해야할 것들을 용감히 맞서 나가길 바래요. 진심으로.”
“크흠! 감사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보니 이게 뭔가, 낯부끄럽네요.”
“그러라고 한 말이에요.”
그녀는 말갛게 눈웃음 지으며 웃고 있었다.
“내기에 져서 제가 에드릭 님과 합방을 하지 못하게 된 점이, 조금은 아쉽네요.”
“예? 내기?”
아, 그 가위바위보 말하는 건가?
“현실은 잔혹한 법이에요.”
그러면서 살짝 눈시울을 붉히는 척하는 그녀.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의미로 교감을 맺도록 해봐요.”
그러면서 그녀는 다시금 자신의 무릎에다 고운 손을 들었다 놓았다 툭툭 두들긴 채 말했다.
“이리 와요. 이제는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좋은 걸 해드릴게요.”
그리하여 그녀의 무릎에 머리맡을 내리자….
“아니에요. 살짝 돌아보세요.”
그녀의 배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살짝 돌린 것만으로 좋은 냄새가 콧속을 가득 메운 덕에, 애써 의식 안 하려 했음에도 그런 쪽으로 자꾸만 의식이 흘렀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귀 겉을 두들겨오는 그녀의 손길. 더불어 부드러운 촉감에 반사적으로 몸을 부르르 떤 나는….
“귀 청소, 해드릴게요.”
차분하면서도 단정한 음성이 끝나기 무섭게 후우 하고, 그녀의 입바람을 귀로 맞으며 나는 재차 몸을 떨었다. 입바람이 자아내는 알싸함, 등골이며 전신을 부르르 떨게 하는 그 민감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에 뜻 모를 기대감을 느끼고야 마는 이 불쌍한 청춘이란.
그녀는 어깨에 힘을 빼고, 머리에도 힘을 뺀 채 자신에게 편히 의지해달라 내게 요청했다.
“그리고 제가 해드린 다음엔, 에드릭 님도 해주세요?”
물론 그래야죠! 하고 답하려는데 귀에서 느껴지는 자극에 일순 흠칫, 흐물흐물해져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목욕을 자주 하니 귀 바깥은 깨끗하네요.”
귀 뒤쪽을 면봉 같은 걸로 만지작 만지작… 더듬는 느낌을 받았다.
바깥은 그다지 민감하지 않았기에 그냥 그러려니 했다.
다만 그녀의 복부, 천 하나로 가려졌다고는 하나 눈앞에 어른거리는 복부와 그녀의 가슴으로 인해 그림자 진 미묘한 구도 덕에 기분이 묘해졌다.
본격적으로 간지러움에 몸을 떨기 시작한 건, 귀 안쪽을 그녀가 건드리게 된 시점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