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10. 엘프의 길쭉한 귀를 주제로 한 미묘한 고찰.(3)
사태 파악이 살짝 안 돼서 묻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을까요?”
가지각색의 엘프 여성들이 신기하다는 듯 이쪽을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장면은 진풍경이라면 진풍경인데… 다들 천이 얇은 옷차림새라 눈길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었다.
“말했잖아요? 에드릭 님은, 당신은 여성에 익숙해지는 게 필요하다고요? 그걸 위한 과정이라 보면 되요.”
그렇게 해서 나는….
“자, 잘 부탁드려요.”
어쩌다 이렇게 된지 모르겠지만 그녀들의 귀 청소를 하게 된 상황에 놓였다.
제이실라와 비슷하게 이들 모두 자연스러운 향기가, 향취가 풍겨왔다.
확실한 건 향수 같은 것에선 느껴보기 어려운 청량함 같은 게 매 순간 느껴졌다는 점. 단순 제이실라여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이들 종족 특성이었던 모양이다.
특유의 향취, 강렬하다 못해 머리를 아찔하게 해오는 향을 풍긴 건 단연컨대 앙겔이었다. 체구도 크고 몸도 다부졌는데 격한 움직임을 통해 땀을 흘리기 시작하자 특유의 살 내음이 정말 장난 아니었다.
문제는 이게 결코 향기롭거나 그런 건 아니고, 어찌 보면 역할 수도 있다 느낄 법한 향이었는데, 관계를 맺으며 거기에 찌들다 보니 그 냄새가 마치 페로몬 향수, 체액처럼 들러붙어 이성을 수차례 돌려버리는데 아주 적절한 역할을 해냈고, 덕분에 그녀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떡을 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땀에는 천연적인 페로몬이 있다 없다 하는 이야기를 예전에 본 적 있는데, 이는 과학적으로 확실하게 증명된 사안은 아니라는 인터넷 글을 본 적이 있다.
물론 남자의 땀에 페로몬이 있을 거란 추측을 토대로, 그런 가설을 세우고 미국 대학에서 실험을 해본 예가 있었는데, 확실히 그에 부합하는 반응은 있었지만 명명백백한 건 아니기에 확정을 내리긴 이르다는 내용으로 증명이 된 건 아니라는 걸로 일단락됐다는 듯 싶었다.
물론 그렇다고 영향을 과연 진짜로 받을까 안 받을까는 사실 그런 단락적인 걸로 규명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애초에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뒤엉켜 효과를 보이는 작용도 부지기수니.
그런 의미에서 그녀들을 도우며 느끼는 이 감정은, 아무쪼록 충동 비슷한 무언가임은 확실했다.
그녀들이 내게 머리맡을 맡긴다던가, 눈을 마주하며 수줍은 듯 시선을 피하거나, 마주 미소를 짓거나, 신기하다는 듯 빤히 쳐다보고, 당황하는 그런 온갖 반응들을 보아가며, 나는 최대한 그녀들을 배려하고자 노력했고, 이건 상당히 정신적으로 피로감이 몰려오는 일이었다.
물론 과정 자체는 긴장되기도 했지만 이건 긍정적인 의미의 긴장감이었며, 그녀들이 만족할 때면 이쪽도 자연스레 보람으로 이어졌으니 뜻깊은 시간이긴 했는데.
‘다양하구나.’
유독 뾰족하고 긴 귀가 있는가 하면, 사람하고 아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둥근 귀도, 그 중간인 듯한 귀도 있는가 하면 유독 귀가 작은 이도 있었다.
똑같은 엘프여도 차이는 다방면.
거기다 살아가는 지역에 따라 또 다르며, 부족에 따라 또 다르다는데, 이걸 한 번에 헤아리기엔 머리가 그걸 따라가질 못했다.
그러고 보니 여러 여자에게 둘러 쌓여본 적이 있긴 하던가?
초등학생 때야 학교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중학생 때 이후론 그런 적이… 없었지?
그런데 웃긴 건, 초면에는 대부분 긴장이랄까 어색함이 뒤따랐는데 다들 한 차례씩 귀를 매만져(?) 주니 반응들이 사뭇 친근해졌다는 점.
감정 표현이 조금 뜸한 걸 제외하면 일반적인 여성들하고 큰 차이를 못 느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 편하게 느껴진 걸지도.
제이실라와 같은 살가움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뒤따랐지만 이건 이것대로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는 침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는 딱히 누군가가 주도하거나 그런 거 없이 편하게 묻고 답하는 문답 형태로 진행됐으며, 수가 여럿이다 보니 아무래도 에드릭은 계속 듣는 입장을 고수해야 했지만 오히려 내용들이 흥미진진하고 모르는 것들 투성이라 나중을 위해서라도 참고삼기 좋겠구나 싶었다.
나중에 엘프들하고 이런저런 교류를 할 때도 이런 지식들은 필시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대화는 물 흐르듯 이어졌고 이어 다 같이 식사를 할 때까지, 식사가 끝나고 다들 눈을 붙이기 직전까지 쭈욱 이어졌다.
간만에 홀로, 숙소 침대에 몸을 누인 에드릭은 여태 있었던 것들을 떠올려보며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꼈다.
보람 차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뭔가… 부족하기도 싶고.
성욕이라는 건 참 대단한 게, 한 번 물꼬가 트이니 정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그녀들, 제이실라를 포함해 엘프들하고 있으니 성욕이 솟구치면서도 왠지 모르게 잦아든다고 할까. 주위를 가득 메운 청량함은 그런 불결한 상념보다는 조금 더 순수하게, 사람을 솔직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눈치를 크게 안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점만큼은 정말 다시 없을 경험이었음을 상기하며 에드릭은 작게 실소했다.
‘오늘이 마지막인가.’
아니, 다음이 있을지도.
로메리스는 재회를 기약했고, 앙겔도 우스갯소리인지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나가서 보자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통보하곤 자신을 내보냈다.
마리의 경우는… 흐음.
제이실라를 비롯한 엘프들은 외교적 문제라고 할까, 교류 차원에서 방문한 거라 들었는데, 여기 에라힘에 속해 있다고 하진 않았다.
물론 이곳에 속해서 인간 혹은 여타 종족들과 입을 맞추고, 배를 맞추는 이들이 없다는 건 아닐 테지만, 그조차도 전부 적절한 절차며 명분이 뚜렷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부족에서 빠져나온 엘프들은 개인주의적 기질이 크며 실제로 내부 도움을 거절하는 경우가 대다수란다. 애초에 내부에서 규율상 돕지도 않겠지만, 미련이 없이 자란 소수의 추방 엘프들은 그런 식으로 타 문명 사회에 녹아들었으며, 개중에는 불행하게 혹은 운 좋게 여러 인연과 엮여 삶을 꾸려 나가는데, 에라힘에 오게 된 이들은 그 가운데서도 대단히 운이 좋은 케이스란다.
그보다 훨씬 저질스러운 대우를 받으며, 노리개, 창부 이하의 대접을 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라 하니 말이다.
노예라는 낙인이 찍힌 채로.
‘근데….’
왜 그런 분들이 날 상대한 걸까?
그 점이 조금 의문이었다.
앙겔도 말은 안 했지만 어딘가 비범한 기색이 느껴졌고, 마리에 이르면 이건… 이쪽 저쪽 세계를 전부 알고 있다는 거 자체만으로 이미 비범한 범주를 넘어선 거라 봐야 될 텐데.
“…모르겠다.”
생각은 나중에.
솔직히 근시일 동안 푹 쉰 예가 없이 거의 탈진하듯 잠들고, 체력이 모조리 소진돼서 잠들어서 그랬는지, 막상 그걸 자각하고 나니 졸음이 확 몰려들었다.
눈을 감기를 잠깐.
그러고 보니 여기 침대, 엄청 좋네. 몸에 힘을 빼자 하중으로 인해 마치 몸이 침대 안쪽으로 파고 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를 무사히 마무리한 에드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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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은 보통 존재가 아니니 주의를 기울이셔야 해요. 아셨죠?”
그러한 배웅과 함께 제이실라와… 어제같이 이런저런 걸로 어울린 여엘프들의 배웅을 뒤로 한 채 나는 천 하나로 중요 부위를 가린 복장에 맨발로 마담을 만나러 향해야만 했다.
친애의 의미로 자신들의 남성형 옷을 건네준 그녀들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또 본래 자신들은 신발을 신지 않는다는 말에 혹해 왠지 홀린 것 같은 심경으로 샌들을 벗고 맨발로 나아가게 된 건데… 생소함이 뒤따를 뿐 크게 불편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양말도 없고 완연한 맨발이라 그런지 해방감 비스름한 걸 느끼고 있었다.
“에드릭 님.”
제이실라의 지시대로 복도를 쭈욱 따라서, 한참을 걸어 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도 다시 한참을 걸어가니.
로메리스, 그녀가 있었다.
“그동안 별 일 없으셨지요?”
“예, 다들 친절하셔서 도움 많이 받고 온 참입니다.”
“전부 다 친절하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큼! 그래도 지켜보셨다면 대강 아시는 일 아닌가요?”
“지켜본다고요? 어떤 걸요?”
“?? 그거 뭐냐, 저희들 모습 지켜보고 있다고 들었는데….”
“전혀요.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존중해드려야죠.”
“어?”
이상하다? 제이실라는 분명….
“그렇군요. 후후후.”
로메리스는 어쩐지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이쪽을 주시해왔다.
“그녀가 에드릭 님께 선물을 안겨 드렸군요.”
“아, 이거요?”
나는 몸을 감싼 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겁니다만… 지금은 그렇다고 해두지요. 자, 그러면… 가실까요?”
그녀가 슬쩍, 내 쪽을 향해 자신의 팔꿈치를 들어 올렸다.
키 차이가 났지만 위화감 없이 팔을 걸어 그녀의 기대에 부응했다.
“좋아요. 그래도 성장하셨네요. 처음 보았을 때보다 훨씬 늠름하고, 여유가 생기셨어요.”
이전보다 훨씬 야시시해졌다고 할까, 거의 이집트 복식에 가까웠는지라 중요 부위를 감싼 천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대부분 치장물들이 전부.
반들거리는 구릿빛 피부, 건강미가 물씬 흘러넘치는 그녀의 곁에선 특유의 강렬한 향기가 오감을 자극해 왔지만, 나는 애써 반응하지 않도록 고조되려는 감정을 슬금슬금 억눌렀다.
“아시겠지만 에드릭 님은 이곳에 단순히 휴양을 오신 게 아니에요. 본사 요청에 따라 교육을 이수하시러 오신 거며, 이수에 대한 평가는 마담이 내리시게 될 거랍니다. 그녀는 대단히… 무서운 분이시니 저희를 대하듯 그녀를 대하셔선 안 되요. 이 점을 확실히 주의하신 다음, 솔직하고 진중하게 묻는 물음에 답하시면 되실 거예요.”
“음, 그렇게 말 들으니 긴장되네요.”
“긴장하세요. 그게 훨씬 유용할 거랍니다.”
보통은 긴장 풀라 말하는데, 오히려 긴장을 하라는 로메리스.
실제로 처음 얼굴을 마주했을 때는 의식을 놓고야 말았다.
게다가 분명 얼굴을 봤음에도, 뇌에서 지워진 듯 일절 기억도 안 나고 말이지.
아쉬움은 없지만 뭐랄까, 그걸 떠올리려니 괜스레 목이 타들어간다고 할까, 갈증이 과해 목줄기가 아니라 목 안쪽이, 심장이 과열되는 기분?
결국 집중해서 생각하면 정신 건강에 이롭지 못할 거 같기에 잊으려 노력은 하는데, 이게 참 쉽지가 않았다.
그만큼 무의식에까지 그 인상이 남을 정도로 강렬했다 이건가 본데.
마치 현대식 엘리베이터 못지않은 것에 탑승해 한참을 오르기까지.
외부 정경이 일절 비치지 않았기에 침묵이 이어졌지만, 옆에 팔짱을 낀 로메리스가 살짝 콧노래를 부르는 터라 그래도 심심하진 않았다.
오르는 속도가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걸어서 올라가는 것보단 충분히 빨랐다.
아무튼 문이 열려 밖으로 나오자… 어쩐 영문인지 주위가 텅 빈 듯 허전하기까지 했다.
넓은 로비에 비해 눈에 띄는 이들인 두셋이 고작. 그조차도 사람으로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피부가 붉게 칠해진 사내서부터 뿔 달린 하마 같은 게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으며, 뭔가 메이드 복을 입은 청소 로봇 같은 게, 고철 특유의 노르스름한 빛을 뽐내며 바닥을 쓸어대고 있었다.
이건 이것대로 진풍경이군.
로메리스를 따라 그들을 지나쳤다.
그들은 따로 우릴 신경 쓰지도, 상관 않고 자기들 일에 열중했다.
내부는 텅 빈 로비였기에 뭔가를 하는 듯한 기색도 크게 없었지만 사내는 멍 때리는 듯 했지만 무언가를 읽어내리는 듯 지속적으로 두 눈을 움직이고 있었고, 하마는 그냥… 계속 공중을 배회하며 날고 있었으며 청소 로봇은 말 그대로 청소 중.
그들을 지나쳐 커다란 문에 당도하자, 거기서부터는 로메리스도 살짝 긴장한 듯 호흡을 가다듬더니, 양해를 구하며 팔짱을 푸르곤 문 앞으로 조심스레 접근했다.
그리고는.
“자리나 님, 예정대로 에드릭 님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뒤로 1초, 2초, 3초.
정확하게 5초 뒤에 문이 틈새를 벌리며 그런 우리를 맞이하기에 이른다.
내부는 뭐랄까, 외부의 텅 빈 것과 달리 대단히 인상적인 비주얼로 꾸며져 있었다.
마치 중세 르네상스를 그대로 옮겨둔 그런 느낌?
크기만 큰, 구질구질한 지구본이 천장에 매달려 회전하고 있었으며 방의 전체적 색감은 갈색.
좌측에는 오래됐을 법한 책장과 그 이상 세월을 겪었을 법한 고전적인 책들이 널려 있었는데, 우측으로 가면 마치 왕실에서나 있을 법한 비싸 보이는 의자와 테이블 등, 고딕 세트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면에는 집무 테이블로 짐작되는 게 자리는 하고 있었지만 그 인근엔 아무도 자리하고 있지 않았으며, 뒤쪽 벽면에도 마찬가지로 큼지막한 지도와 함께 마치 각 세력도를 표시해둔 듯 무수한 문양들과 색채들이 지도를 빼곡하게 메우고 있음은 물론, 심지어 주석을 달아두려는 듯 자그마한 메모지들이 수북이 붙여진 상태였다.
뭐랄까. 보는 것만으로 압도되는 비주얼.
고풍스러움, 다채로움, 묵직함까지.
“6초 빨랐잖아.”
그 가운데 뭔가 불성실한 음성이 뾰족하게 공간을 가로 질러왔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리자, 지구본에 감춰지듯 자리한 또 다른 공간, 2층 서책 공간을 그제야 인식할 수 있었다.
물론 그곳은 책뿐 아니라 온갖 도구들이 즐비하고 있었지만, 그것들의 구체적인 용도며 쓰임새, 명칭을 모르는 에드릭으로선 그저 신기해하며 이를 구경하기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