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취직하니 떡을 침. 이세계에서 (34)화 (34/454)



〈 34화 〉11. 불합리함이 꼴림(?)을 만든다.

그녀는 훌쩍 뛰어 에드릭들이 있는 곳으로 당도했다.
어떤 안전 장치도 없이 맨몸으로 십여 미터를 훌쩍 뛰어내렸음에도, 심지어 뾰족한 구두를 신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깃털처럼 차분히 내려앉았다.


얼굴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새하얀 가면을 제외하면 그녀의 전신은 전체적으로 짙은 보랏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자주색, 보라색은 소화하기 힘든 색으로 정평이 나 있다.
고대적 보라색은 황제의 권위를 증명하는 색으로도 여겨졌다.

실제로 기술이 빈약하던 당시엔 관련 염료를 제조하기 대단히 번거로웠기에 결국 지체 높은 귀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져 로열 퍼플(royal purple)로 불렸으며, 로마 카이사르 시절엔 오로지 그만이 사용할  있는 색으로 원로원조차 감히 이를 넘보지 못했다 전해진다.


그러기에 이것은 한편으로 광기를 증명하기도 하니.
희귀한 만큼 생소할 수밖에.
익숙하지 않는다는 건 너무도 쉽게 위화감과 생소함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보라색은 밝기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를 부각하기도 하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를 감싼 자줏빛은 짙은  퍼플(deep purple).

그와는 대조적인 연보라색, 예컨대 보라색에 뿌리를 둔 밝은색은 산뜻함도 아련함도 아닌 무언가 어중간한 포지션인데, 소화도 힘들지만 더더욱 변덕스러움 내지 광기를 일축하는데 더 없이 유용한 색감인 건 확실했다.

괜히 미국의 유명 만화  메인 빌런이 보라색 슈트를 걸치고 얼굴을 분칠하고 다니는 게 아닌 거다.


왜 이걸 연상했냐고?
…새하얀 가면과 보라색 드레스 덕분에 무심코 떠올린 거다.

에드릭은 뭔가 끼긱하고 경직된 움직임으로 자신을 버젓이 돌아보는 가면을 보며 들숨을 억눌렀다.

“해야 할 말은 많은데… 귀찮기도 하고… 바쁘긴 한데 할 일은 또 없고.”

긴장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무력한 어조로 그런 소리를 태연자약하게 투덜거린 그녀는.




“본론으로 가자. 덕담 나눌 시간도 없고. 귀찮고.”

나태하게 늘어진 목소리 또한 귀에 어른거릴 정도로 인상적이었지만 텐션이  떨어지다 보니 매력이 퇴색되는  느껴졌다.

드레스는 일상복을 겸하는 느낌이라 그런지 움직이는데는 큰 지장은 없어 보였다.
전신의 착 달라붙어 굴곡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구두를 신은  마치 홀로 춤을 추듯 스텝을 착착 밟아대는 모습은 흥겨운 듯하나….

“놀기는 잘  모양인데 뭘 배웠는지 원.”

투덜대듯, 웅얼대듯, 읊조리는 그게 조금… 뭐랄까.

“그렇다 치고.”




타닥!

보라색 구두로 바닥을 타닥하고 친 그녀는, 탭 댄스를 추듯 박력 있게 바닥을  차례 두들기며 홀로 춤추듯, 스텝을 밟으며 에드릭과 로메리스를 향해 접근해 왔다.


“윤미라가 뭔 생각으로 널 여기로 보낸 걸까 했는데, 이유는 알았는데… 흠흠.”

바짝 접근해온 그녀가 자신의 체취를 맡듯 가면을 바짝 들이대 킁킁대는 소리를 내자, 에드릭은 괜스레 긴장했다. 뭐지  사람?



“앙겔 냄새가 훨씬 짙은데.”
“…3일 동안 끌어 안고 있었을 테니까요.”

약간 심통난 듯한 음성으로 로메리스가 첨언하자 새하얀 가면의 그녀, 자리나가 ‘그렇군.’ 하고 알아 들었다는 제스처를 과장스레 취했다. 고개도 끄덕이고 손을 슬쩍 들어 같이 끄덕이는 식으로.

‘뭔가 특이한데.’

에드릭은 에드릭대로 긴장과 당혹스러움을 동시에 만끽하고 있었지만, 상대는 그딴 건 알 바 아니라는 듯 다시금 스텝을 뛰며 거리를 벌렸다.
드레스 밑단이 관성에 이끌려 떠오르자 반투명한 보라색 구두에 감싸여진 그녀의 미려한 발과 발목, 그 위쪽이 여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 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호흡이 가빠진 에드릭.



“크흠!”


애써 헛기침으로 당혹스러움을 달래보지만….



“반응들이 다 좋네?”

느닷없이 그런 소리를 해댄다.

“문제가 하나 있지만.”



탁!


마치 정립하듯,  다리를 모은 그녀.
그러고는 다시 양팔을 벌려 마치 무대 위에서 연극을 하듯 팔을 휘젓고, 포즈를 취하며….



“너, 회사 규정 어겼네? 어쩌면 좋니?”


뜬금없이 그런 폭탄 발언을 해주시는 게 아닌가.

“예?”
“예? 예? 그건 아니지.”

에드릭을 향해 과장스럽게 고개를 휘저으며 검지마저 메트로놈처럼 좌우로 흔드는 그녀. 여기서 쯧쯧 혀까지 차니 이보다 적절할 수가 없었다.



“마리는 괜찮은데, 제이실라한테는 왜? 어째서?  땜시 ‘저쪽 세상에 대해’ 말했어?  정체부터 관련 정보들.”
“어? 그야…….”
“엘프들은 귀가 좋아. 얼마나 좋냐하면 대단히 좋지. 특히 제이실라 급 정도 되면 단순히 귀가 좋다는 걸 떠나 이쯤 되면 거의 초능력에 가깝지. 어지간한 짐승들도 그녀의 청력에는 못 비빌 거고. 그걸 토대로 그녀는 너에게  마디 묻고, 반응을 살피며 유도심문을 행함으로써 원하는 결과를 이끌었을 거 같은데, 그걸 파악 못 한 건 온전히 네 잘못이야. 맞아, 틀려?”
“그….”




에드릭은 잠시 고민했다.

“바로 파악해야 하는데 둔하네. 1분 줄 테니 정리해봐.”

1분?! 너무 짧잖아!
후회할 시간조차 낭비였다.

에드릭은 자리나가 말해준 내용을 토대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귀가 좋다? 그냥도 아니고 아주 좋다?

[사실 저는 에드릭 님에게 순수한 교감, 친애, 애정 등을 알려드리려 했거든요.]
[그런데… 그건 이미  아시는 거 같아서 안 그래도 될  같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시작부터 끝까지 지켜봤는 걸요. 에드릭 님은….]

트릭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건가? 아니, 처음부터 그럴 의도로 진행됐다 치면….

[잠깐만요? 지켜봤다고요? 뭘요?]
[?? 전부죠.]


제이실라는 굳이  설득하거나 납득 시키려는 행위를 취하지 않았다.
즉, 그녀의 행위엔 리스크가 일절 없었다는 점.

[…그러니까 전부 도촬? 아니지, 관찰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인가요?]


그리고 나는 이렇게 이해했고.


[참고를 해야! 더 많은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생각하시죠, 에드릭 님도?]


물론 그녀 또한 도촬, 관찰을 하고 있단 이야기를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태도, 눈빛, 몸짓으로 그녀는 그런 내 추측이 정답이라는 듯 행동했으니.
그 시점에 이미 그 술책에 넘어가 버린 건가.

[계속 지켜본 바로 에드릭 님은 파트너에 대한 배려, 애정, 친애하는 감정이 진하게 풍겨왔어요. 가끔 너무 물질적인 쾌락이나 육체적인 열락에 빠져 가장 사소하고, 당연한 것들을 소홀히 하는 이들이 참 많고도 많은데, 에드릭 님은  와중에도 그런 점을 잘 조절하고 계신 거 같았거든요.]
[조금 전에 마리에게 매달렸을 때 빼고는요.]

그리고 여기서 그녀는 쐐기를 박았다.


바넘 효과(Barnum effect)를 이용한, 이전 정보를 토대로 한 리스크 전무한 넘겨짚기에 추측인지 소리로 유추한 건지는 몰라도 마리에게 매달렸다는  표현도 소리로 듣고 유추한 건지, 아니면 상황이 그렇게 될 게 분명하니 그걸 토대로 한 넘겨짚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순수하다는 건 달리 말하면 속여먹기 쉽다는 의미지. 자, 네가 제이실라에게 실


토한 내용들이 얼마 정도의 가치를 지녔는지 한  계산해볼까?”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논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 아무튼 결정적인 게 뭐라고 생각해?”
“그건….”
“여자를 너무 믿었어. 안심하라고 해서 너무 안심했어. 이렇게 순진할 수가! 아아, 언니는 슬프구나.”



그녀는 아쉽다는 듯 고개를 도리질했다. 과장되게, 작위적으로.



“그래서 벌을 내리긴 해야 할 텐데… 아니면 그대로 꼰질러서 짤리게 해줄까? 퇴사 처리 당하면 관련 기억 다 삭제하는 건 알고 있지?”
“…….”
“대답은?”
“예, 알고 있습니다.”
“침묵은 대답이 아니야. 회피지. 내 앞에서 침묵하지 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요행을 바라는 거야. 침묵하고 반성하는 척, 고개 수그리고 시선 떨구고 있다 해서 너 군 생활이 끝났니? 안 끝났잖니?”
“……예, 맞습니다.”
“0.5초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났을 거야. 재깍재깍 반응하렴.”



권하는 목소리만큼은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웠음에도, 그 속에 담긴 내용들은 마치 비수며 커트 칼처럼 의미심장한 면들이 있었다.



“잘 마무리됐다면 여기서 잘했엉! 수고했엉! 바이바이! 하겠지만… 이런저런 게 걸렸잖아? 그렇지? 맞아 틀려?”
“예, 맞습니다.”
“그런 너에게  가지 시련을 안겨주마!”



하고 양팔을 활짝… 벌리다 못해 등까지 확 재끼는데… 뭐하시는 겁니까 대체?




“너는 아직 네가 뭔 일 때문에 여기 왔는지 잘 모르지? 본사가 심심해서 너한테 뜯고 맛보고 즐기라며 관광 보내줬다고 착각하면 무지무지 곤란하단다?”
“예, 생각은 계속해보고 있습니다.”
“답을 얻어야지. 생각만 하면 그것도 식충이야.”

꼴꼴꼴 하고 괴상한 웃음 소릴 내며 그녀는 명했다.


“너한테는 증기탕 내지 욕탕에서 온갖 여성들에게 마사지 및 멘탈을 케어하는 역을 맡기도록 하마. 3일 동안.”
“……?”

뭐지? 이건 처벌이나 뭐 벌칙 같은 게 아닌데.

“대신 아랫도리 관수 잘해. 발기하는 것도 안 돼. 그거 사용하기라도 하면 너… 고자로 만들어준다? 아바타만 그러는 게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도 못 쓰게?”
“예?!”


아니, 그게 무슨…?!


“명경지수, 청정한 마음으로 여자들의 몸을 만지고 태연히 이야기를 나눠가며 심신을 케어해주라 이거야. 흑심 품은 인간은 아무래도 손끝서부터 발끝까지 전부 야한 냄새가 풍기거든. 여기 쉬러 왔는데 음란한 분위기에 질색하는 여성 분들은 그런 기운을 접하면 솔직히 토나온다고 하시니까, 그런 기색 못 느끼게  서비스하라 이거야.”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상’지만도 없지만.”
“풋!”




로메리스가 고개를 돌려 피식 웃는 모습을 본 에드릭은… 왠지 짠해졌다.



“어? 안 웃어? 너 내 권력 무시해?”
“아니 저기….”
“내 개그가 재미있어서 웃는 게 아니야. 지록위마(指鹿爲馬) 몰라 너?”
“지록위마?”

들은  같긴 한데 기억이 잘 안 나네.

“아뇨, 저는 정말 재미있는데요.”

로메리스는 여유로운 태도로 그리 말했다.


“참 특이한 아이야. 그렇지?”
“……예.”
“좋아, 이제 가 봐. 나머지는 로메리스한테 묻던지 말던지. 3일만 버텨. 그러면 뭐라 안 할 테니까. 반대로 3일도 못 버티면… 암담한 천국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노예 같은 첩 한 둘 늘리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

불길하기 짝이 없는 말로 퇴청(退廳)을 명한 자리나.


“가시죠, 에드릭 님.”

얼떨떨한 심경으로 로메리스를 따라나선 그는….


‘아니, 어떻게 무발기 상태를 유지하라는 건데! 여자 몸 만지면서!’




 말도 안 되는 폭거에 속으로 경악을 내지르고 있었다.

차라리 3일간  고자로 만들어주시옵소서.
안 그러면 진짜… 이걸 어떻게 이겨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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