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13. 모든 것은 N으로….(2)
“잘 들어, 애송아. 엘프들은 본래 배우자가 태어날 적부터 정해져 있단다. 어렸을 적부터 붙어 다니게 해서 죽을 때까지 붙여서 유대감을 쌓게 하거든? 안 그러면 서로 나 몰라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습성이 그래. 인간만큼 부지런하지도 않고, 애정에 대해선 인간보다 훨씬 무지하고 둔감한 편이니까.
더 큰 문제는 성욕도 타 종족에 비해 저조하고 오래 사는 만큼 그쪽에 대한 욕구가 영 마땅치 않다고 할까? 그러다 보니 사랑이며 감정 표현도 서툴고 오랜 세월을 부대끼는 만큼 철저하게 플라토닉한 유대감을 토대로 관계를 이어가는데, 그게 이상적인 관계라 배우고 자란단다. 그래서 출산율 극악인 걸로도 유명하고.
덕분에 개체가 적은 하이 엘프들의 입지는 날이 갈수록 추락하는 반면, 한편으로는 확고해지는 기이한… 아, 이딴 건 됐고!
결론은 엘프 개체 수 늘릴 겸, 동시에 영향력을 늘리고자 의도적으로 하위 엘프들을 기점으로 하프 블러드, 혼혈 개체를 늘려 자유 무역 도시 겸 공국 비슷하게 영토도 마련해줘선…… 왜 설명하고 자빠졌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너는 하이 엘프가 인정한 공식 손님이라는 거니, 추후 엘프들 만날 때도 이런저런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다. 종족 차별이 극심한 귀쟁이들이 인정한 인간? 엘프들 기준에선 흥미가 돋을 수밖에.
거기다 인정받았다는 건, 배우자로 삼아도 된다는 거니 노골적으로든 이런저런 걸 해대도 규율상으로 거리낄 것도 없겠고.
참고로 그런 자격이 없이 엘프와 하룻밤을 지새운다? 거두절미하고 인간 남녀 할 거 없이 무조건 강간죄라는 명목으로 그들의 법이며 규율에 따라 척살 당하게 된단다.
그 순간만큼은 인간의 법이니 도리니 규율 같은 건 아무 짝에 쓸모가 없어지지. 그들을 노예로 부리고자 하는 노예상이 아니라면 말이야. 자, 설명 끝. 이해했냐?”
상당한 내용을 속사포처럼 쏟아 낸 자리나. 단번에 많은 양의 정보가 밀려들어서 였을까. 에드릭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집중했다는 티를 내고자 성의껏 응답했다.
“……예, 아주 잘 이해했습니다.”
“애초에 옷 입혀 보낼 때 이미 결정 사안이긴 했지만, 설마 심처에까지 방문을 허할 줄이야. 이건… 으음, 대단히 네가 마음에 들었다는 건데. 일단 잘 보관해둬.”
편지지를 들고 있던 로메리스가 에드릭에게 이를 건네주었다.
“…….”
붉은 종이엔 기이한 문양 하나가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론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두세 줄 적혀는 있었는데… 뭐라 써놓은 건지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
“그 문양은 너한테만 주어진 거니까 어디 가서 잊어먹지 말고, 종이 그거 잊어먹으면 그 문양만큼은 기억해둬라. 알았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고….”
새하얀 가면을 몇 차례 만지작 대던 자리나가 이어 로메리스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래서, 넌 어때?”
“이를 말이 있겠습니까?”
로메리스가 태연히 자기 소견을 고했다.
“그래, 그렇다고 쳐. 아쉽네. 잘 구슬려서 노예남 하나 구해보나 했는데.”
“그 말이 무서워서라도 열심히 했습니다!”
“내숭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은 자리나는.
“노예로 만든다 해서 내가 딱히 강요하는 건 아니야. 그냥 간단해. 내 얼굴 보고, 나하고 입 맞추고, 나하고 아래쪽 합만 한 번 맞추면 내가 나가 뒈지세요 하고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넌 내게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되거든.”
“…으음, 메커니즘이 전혀 짐작이 안 되기에… 혹시 최면이나 어떤 세뇌, 그런 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요?”
“구태여 말하자면 매혹이야. 일종에 저주?”
또 나왔다. 뭔지 모를 그놈의 저주.
“나야 종특 같은 거니까. 너희 세계로 치면 그거 뭐냐? 멀린 같은 맥락이거든? 반인반마? 내 경우는 서큐버스 쪽하고 연관이 돼 있는데, 이게 저주인지 재수가 탁월한 건지 그쪽으로 재능이 특출나서 여러 가지 의미로 골치가 아팠지. 제어법을 익히기 전까지는.”
“음… 그렇군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순순히 해주셔도 되는 건가? 에드릭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감출 게 뭐 있다고.”
마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그리 툭 내뱉은 자리나.
“딱 한 번 천국을 맛보고 인생 손 놓고 싶다면 말해. 나는 언제든 준비돼 있으니까. 너 정도 꼬맹이라면 퍽이나 마음에 들 것도 같고….”
“크흠!”
“얼굴 하나 보고 정신이 나갈 정도면 넌 면역 자체가 없다는 거니까. 앞길이 훤하구나. 훤해! 그래도 애송아, 네 녀석 상사 되는 놈은 나한테 작업 멘트 치면서도 용케 이성은 유지하던데.”
“…….”
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대체 어떤 비결을 지녔길래 그걸 버텨내셨는지.
“이걸로 네가 여기서 머무는 건 딱 오늘까지. 몸 좀 굴렸으니 오늘은 괜한 짓 말고 푹 쉬고, 내일 네 녀석이 해야 할 일을 알려줄 테니 준비 단단히 하고 있어라.”
“옙….”
“본의 아니게 자주 볼 거 같네. 네 근무처가 여긴 아니겠지만….”
뭔가 불확실한 듯 혼잣말로 중얼대던 자리나는.
“가 봐.”
손을 휘젓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불성실한 출객령을 내렸다.
그 뒤로 로메리스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 식사를 한 뒤로는… 뭐랄까. 그냥 멍 때리고 누워 있었다.
“하아.”
깨어난 뒤 간단히 씻고 곧장 올라간 터라, 긴장감 때문에 이도저도 아닌 상태였기에 침대에 드러눕고나서야, 이제 좀 쉬는 건가 싶은 생각이 불쑥 치밀었다.
아, 그러네.
배까지 채웠겠다, 아주 낮잠 자기 딱 좋은 상황 아닌가?
‘…양치질은 해야지.’
이빨 썩으면 누굴 탓하리. 이건 이것대로 상상을 초월하는 개고생에 돈은 돈 대로 깨지고 아주 그냥….
설탕을 비롯한 단 종류를 안 먹으면 이빨이 덜 썩는다고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미세한 음식 찌꺼기 등이 남아 있다면 그 자체로 충치가 살기 좋은 환경이 되고 만다.
그나마 깨어 있을 때는 문제가 없는데 잠들면 그것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 된다고 했던가?
어렸을 적에 이빨 썩어서 치과로 붙들려 가선 그물망 같은 곳에 묶인 채 이빨을 뽑아낸 기억이 있기에… 새 이빨이 난 뒤로는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에라도 자기 전엔 항상 양치질하곤 했다.
어디 양치질뿐인가, 가글도 한다.
가글 뿐인가, 치실질까지 한다.
…여기에 치실이 없으니 거기까진 무리고, 가글이야 소금 좀 풀어서만 해도 충분하니 그건 문제가 아니지만.
실제로 이곳 세계에서의 양치질 대부분은 소금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아무래도 치약이란 게 아직 대중적으로 보급이 안 된 세계라서 그런 걸지도.
다만 에라힘 내부, 욕실이며 세면대엔 대부분 치약이 놓여 있기에 이걸 경험한 이들은, 높으신 분들은 특유의 허영심과 부지런함(?)을 통해 이 색다른 무언가를 전파하는데 일조할 것으로 가벼이 추측해본다.
판타지 세계에서 현대식 디자인을 방불케 하는 내부 구조를 포함해, 유명 호텔 같은 곳보다 훨씬 나은 환경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도 사실 놀랍다면 놀라운 일이다만.
…TV 같은 게 없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고. 이곳 기준으론 완전 오버 테크놀로지가 아닌가.
‘마법이 있다면 그걸 통해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전에 그런 식으로 라디오며 TV 같은 걸 구현해낸 판타지 소설을 본 것도 같았는데.
“하아.”
이미 우리 세계를 아는 이들이 허다한 판국에 설마 그 간단한 걸 떠올리지 못했을까.
그럼에도 그런 기술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걸 테지.
‘기술이 발전한다고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니.’
그만큼 황폐화되고 망가지는 요소도 많으니.
잠이 솔솔 온다.
거기다 아무도 방해라고 할까, 참견을 가해오지도 않아서였을까. 슬금슬금 눈꺼풀이 내려앉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에드릭은 그대로 수면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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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지쳐 있었는지, 이른 오후에 잠들어 그대로 다음날 오전까지 곯아떨어졌음에 불과하고, 일어나려 하니 몸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오래 자서 몸이 깔리는 건지, 피로가 누적돼서 그런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
호텔 룸 서비스로 아침 끼니를 보양식으로 때우며, 로메리스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추가로 들어야만 했다.
“여러 형태로 의뢰를 맡게 되실 거예요. 기본적으로 물건을 배달하고 확인을 받는 작업서부터 전언을 전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고민도 들어주고 도움도 드리면서… 요령껏 그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행하는 게 주요 목적이라 보시면 될 거예요.”
“…그걸 제가 해야 한다 이건가요?”
“예. 향후 2년 계획에 대해 간단히 말씀 드리면….”
심지어 내가 어떤 식으로 업무에 종사해야 하며,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쳐야 할지에 대한 간단한 전망을 그녀는 책자 비슷한 것을 들춰가며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누구나 각자의 역할이 있다고 하니까요. 우린 거기에 충실하면 되는 거랍니다. 특히 본사 쪽에 계셨다면 더욱 신경 쓰셔야 될 거예요.”
“그렇군요.”
설명을 들을수록 뭐가 뭔지 역으로 헷갈리기 시작했지만… 다 듣고 나니 대략 윤곽이 잡혔다.
결과적으로 내가 추후 도시로 상경하게 될 알리샤 누님의 비약과 그녀가 지닌 고유 기술력을 통해 인맥을 넓히고, 영향력을 넓히는데 주력하라는 의미인데, 아무래도 초창기엔 발로 뛰며 영업을 뛸 수밖에 없어 보였다.
내 경우는 바로 그녀가 상경하게 될 도시와 인근을 사전에 개척해서 그녀가 올라오기 무섭게 바로 자리 잡고 박차를 가할 수 있게끔 토대를 닦아두라는 듯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그곳엔 인간뿐만 아니라 여러 종족들이 얽혀 있으니, 그런 점만 잘 신경 쓰신다면 크게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알리샤 누님은 자기 나라 수도? 그쪽으로 상경한다고 살짝 들은 것도 같은데….”
음, 잘못 들은 건가?
“그에 대한 설득은 본사가 알아서 진행할 테니 염려 놓으시길. 다행히 에드릭 님은 엘프들에게 인증받은 친우이자 손님이 되었으니, 그러한 이점을 잘 살려 은혜를 베풀 수 있게끔 만들면, 저희가 엘프들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도 높아질 테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라 봐요. 누님분한테도 결코 손해 보거나 나쁜 일은 아닐 거예요. 엘프와 끈을 이어두면 상상 못 할 약재며 소재 등을 획득 가능할 텐데… 약제사나 연금술사, 제조자들이라면 눈에 불을 킬 기회를 안겨줄 수 있는 기회인데, 그녀가 그걸 포기할 거라 생각은 안 드네요.”
“흐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것도 같고.
뭐 제대로 아는 게 있어야 아는 체를 하지.
“그러면 구체적으로 저는 뭘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
“음, 그래요. 우선은….”
그 뒤로 그녀에게 구체적인 설명을 들었기에 최초와 달리 불안감은 비교적 잦아들었다.
아, 그나저나….
“예로부터 회사를 키우는 이들은 영업인, 영업맨이라 했다죠? 에드릭 님 세계에선?”
“…그걸 어떻게 아시는지요?”
실제로 미국의 경우 밑바닥 영업사원이 의외로 그 회사의 ceo가 된 사례가 적지 않다. 또 큰 성과를 이룩해 그걸 눈여겨본 타 기업 핵심 인사들, 투자자들에게 발탁돼 유망 기업, 대기업에 스카웃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 말이다.
…이딴 걸 알면 뭐하냐. 그래 봤자 취직도 못 했었는데.
한 시간에 8억 번다던가? 영업사원으로 날리다가 책도 쓰고 강연까지 하게 된 대표적인 인물…인데 누구였더라? 아, 생각났다. 브라이언 트레이시.
그 외에도 부자 하면 밥 먹듯이 언급되는 워렌 버핏이니 빌 게이츠, 제프 베조스, 마윈, 마크 주커버그, 스티브 잡스 같은 유명한 사람들과 그들의 일화를 안다고, 과연 그런 것들이 당장 도움이 됐냐 하면… 아니죠. 되려 자괴감만 더욱 깊어졌지요. 그렇고 말고요.
참 머릿속에 든 건 많아. 이렇게 보면 아무 짝에 쓸모없는 거 같은데.
마치 방구석에 의미도 모르게 쌓아둔 잡동사니처럼 말이다. 휴지심이라던가, 과자 박스라던가….
“잘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럼에도 로메리스는, 이런 모자란 날 향해 근거 없는 격려를, 그런 성의를 아끼지 않았다.
정말로 별 게 아닌 거였지만, 누군가가 내게 너는 할 수 있다, 잘할 거다 라며 확고한 시선을, 관심을 내어주며 신경을 쏟아주고 있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힘이 됐다. 이런 걸 경험해봤어야 알지. 그래 봤자 별 차이 없겠지 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와닿는 게 전혀 달랐다.
그 기대를 깨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이었으면 잘 되면 되는 거고 아님 마는 거지. 어차피 세상은 이미 거기서 거기인데 내가 노력한다고 뭐가 달라지냐, 하고 운명이니 운빨이니 하며 그러려니 했겠지.
이런 사고방식, 마음가짐이 바뀐 것만으로도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잿빛으로 물들었던 세상이, 이윽고 선명한 색채로 뒤덮인다.
아직도 희망이니 가능성이니, 이런 점에선 대단히 회의적이지만… 이전처럼 저걸 어떻게 해? 해봤자 안 돼. 괜한 헛수고 할 필요가 있냐? 그럴 바엔…. 하는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그래, 한 번 해보자.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고, 무력하게 주저앉아 있는 것보단 낫잖아? 그런 진취적인 생각이 앞서게 됐다.
누가 말했듯 사람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 했던가? 진짜로 죽을 정도로 충성이다 뭐다 그런 건 아니지만, 여기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마음만큼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굳건해져 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여긴, 신의 직장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