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14. 이세계 수녀님은 서큐버스라는 게 학계 정설?
상행 같은 게 나오면 전개상의 지루함을 덜고자 흔한 이벤트를 배치 시켜두곤 한다.
산적이니 도적이니 해서 길 막아서며 돈 내놓으라 뭐라 하는 그거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아서, 포위한 다음 물건만 빼내고 가라고 하는 예는 거의 없단다.
그것들은 하이에나와 같아서, 작정하고 덮치려 들면 기습적으로 덮치거나 매복을 통해 이점을 최대한 살려 덮친다고 한다.
또 습격 전 사전 정찰을 통해 전력의 우위를 점치고 결행 여부를 정하며, 처리할 것들의 우선 순위, 망가뜨리지 말아야 할 것들서부터 죽이지 말아야 될 것들을 일일이 구별해댄다고 한다.
정정당당하게 일대를 가로막고 뭐 내놓고 꺼지라는 식이 아니라, 사냥감을 덮치는 이리처럼 잽싸게 덮쳐들어 죽임당하거나 노예가 되어 팔리는 등… 따로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이런 전개에 예외는 없단다.
“그래서 가장 좋은 건 덤빌 여지가 없게 만드는 거고. 덤볐다는 건 어쨌든 만만해 보였다는 거니까. 저것들도 자기들 목숨 아까운 줄 아는데 미쳤다고 들이대겠어? 원래 얍삽한 새끼들이 그런 냄새는 잘 맡거든.”
나라가 어지럽거나 어수선하지 않은 한, 국가 내에서 그런 행위를 한다는 건 하루 살고 다음 날 죽겠다고 빽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란다.
영지로 치면 병사들 및 기사들 실전 경험시켜줄 아주 적절한 개놈의 자식들이 본보기로 도사리고 있는 거니 땡 잡았구나 하며 달려간단다. 저항이 심해도 몰살까진 아니지만 대가리를 쳐내고, 나머지는 붙잡아다가 정당한 명분으로 죽기 직전까지 노역으로 굴릴 공짜 노동력이 도사리는데 저걸 미쳤다고 얌전히 내버려 둘까?
혹여 이런저런 소문이라도 한 번 퍼지면 들불 번지듯 부풀어오른 소문은 여러 가지 속설을 낳게 될 거다. 대규모 상단은 호위 병력을 꾸리는 번거로움이 늘겠지만 거기까지. 그러나 소규모 상단들이나 개인 장사치들은 그거 안정될 때까진 쉽사리 짐을 꾸리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 목숨도 목숨이지만 어찌 살아난다 쳐도 물건 다 날아가면 인생 쫑 치는데 미쳤다고?
결과적으로 상행이 줄어드니 시장 경제도 직격탄을 맞으니 물가 상승은 덤. 품귀 현상도 덤. 부르게 값이 되니 경제 불황 명목으로 그쪽에서 쓰이는 화폐 가치까지 덩달아 떨어지고, 이는 전체적으로 화폐 경쟁력에 지대한 해를 입히는 바.
치안이란 게 이렇게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이거 관리 못 한 영주는 영주대로 안으로든 밖으로든 쌍욕 먹을 건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거고.
그러기에 전쟁 및 환란이 끝나 나라가 안정을 되찾으면 가장 먼저 찍혀져 나갈 부류들이기에 이들의 입지는 언제나 위태롭단다.
또 대부분의 산적 및 도적 패거리들은 열에 아홉은 범죄자들.
예외가 있다면 국가 및 영토가 피폐하거나 혼란에 빠져 먹고 살길이 막막해 살고자 도적이 되는 경우가 아닌 한, 다들 거기서 거기라나?
…이런 걸 디테일하게 듣는 게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공부한다는 개념이라기보다는 뭐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어서 그런 걸까.
그리고 결론만 말하면, 그런 이벤트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났더라도 이야기 속처럼 순탄하거나 엉뚱하게, 개그에 일환으로 벌어지지도 않았을 거고.
우리가 가게 될 도시는 밀리엄 공화국에 속한 아르세이유 자유 무역 도시라는 곳인데, 많은 종족들이 몸담고 뿌리를 내린 그런 도시란다. 생겨난 지는 50년을 막 넘긴 시점이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자리 잡아 대륙 5대 무역 도시로 일국의 수도(首都)가 아님에도 규모 또한 상당하다고 말은 들었지만, 막상 저 먼 평야에서 산처럼 굳건하게 자리 잡은 성벽을 보니 그럴싸하구나 싶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성벽이 끝도 없이 늘어진 듯 보였다. 적어도 고개를 옆으로 돌려도 성벽은 굳건한 태세로 끊임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저래서야 공성 장비가 통할까 싶었다.
브리앙르는 의외로 설명하길 좋아하는지 식사를 하거나 타들어 가는 나뭇가지, 장작 등을 길쭉한 나뭇가지로 뒤적여 불씨를 살려가며 종종 그런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굳이 날 위해 해준다기보다는 둘러앉은 녀석들한테도 교양 삼아 알아두라는 것처럼 말이다.
“두꺼운 돌로 물샐 틈 없이 벽을 쌓고 안으로는 특수한 모래들을 응축시켜 투석기나 어중간한 마법 포격 등에도 끄떡없을 거라는 곳이라지? 전쟁 나도 성벽만 굳게 잠그면 대책이 없어지는 곳이니까.”
굳건한 성벽은 안전을 보장하는 바.
비록 영토를 넓히긴 힘들겠지만, 성벽 내부에 살아갈 수 있다면 외적에 의한 침탈 및 습격에 허우적댈 거란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초기엔 부랑민이며 난민 등이 많이 유입됐다는데, 그들로 인해 노동력이 보충됨으로써 그들은 돈을 벌어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결혼해 이제는 아이까지 낳아 이곳 백성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했단다.
아무튼 쉬면서 들은 설명은 그랬고, 내게 주어진 설명 개요는 스마트폰에 지침 매뉴얼로 전달 됐기에, 그걸 살피는데도 며칠이 소모됐다.
‘뭘 알아둬야 할 게 이리 많냐.’
거기다 추가로 언어 공부도 꾸준히 해야 했다.
글자를 대강 쓸 줄 알지만 숨 쉬듯 다루지는 못하니 그렇게 될 수 있게 만들어야 하며, 아무래도 인간만 사는 게 아닌 만큼 각 종족들에 대한 기초적 이해 등도 뒤따라야 했기에, 마차 안에선 대부분 공부하는데만 전념했던 거 같다.
이것도 나름 죽을 맛인 게, 한숨 돌리려 해도 그것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답답해서 바람 좀 쐬려 해도 말들 휴식시키고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시간 외엔 무조건 이동이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주변 정리 때도 크게 도울 일은 없었기에 말을 건다는 명목으로 잡일 조금씩 도와주는 게 고작?
덕분에 친근하게 이야기를 걸어오는 이들은 늘었지만, 이를 지켜보던 브리앙르가 충고인지 조언인지 모를 이야기를 개인적으로 건네기도 했었다.
“친해지는 건 좋은데 너무 그러다간 기어오르려 한다? 집안이 좋거나 귀하신 몸이어도 얕보면 뒤에서 까고 씹어대니까, 너무 사람 좋은 척하지 마. 그렇다고 냉정하게 대하라는 건 아니지만, 사람이 가볍고 살가우면 얕본다고. 특히 넌 나이도 어리니 더욱.”
“그렇군요.”
물론 도움 차원에서 이야기해준 거겠지만, 역으로 그렇기에 그녀야말로 날 얕보고 있다는 걸 굳이 이야기해볼까 고민하다 말았다. 기껏 도움 될 말 해줬는데 그걸 귀로 못 받아먹고 입으로 뱉어대면 상대가 어찌 받아들이겠나? 영양가도 없고 도움도 안 되는 행위는 무조건 자제하고 또 자제해야 문제가 안 생기는 거다.
마차가 마치 꽉 막힌 도로를 나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아 답답함은 배로 늘었지만, 인생은 본디 기다림의 연속 아니겠나. 참는 수밖에.
도시 내부로 들어갈 때도 얼굴을 비치고 마차 내부를 눈으로 훑는 게 고작. 신분증명이야 브리앙르가 다 알아서 해줄 거라는데… 내 신분이 대체 뭐길래 알아서 해준담?
그렇게 도시 내부로 들어서선 짐 마차를 우리 상단 쪽으로 보내는 거까지가 그들의 역할. 물건을 나르고 옮기는 작업은 일꾼들의 몫.
나는 그냥… 맨몸이지 뭐가 있겠어.
브리앙르를 비롯한 호위 용병들은 이제 다른 일감을 찾으러 떠날 거고, 일꾼들의 경우도 비슷한 행보를 보일 터. 보통 이런 쪽 일꾼은 직원이랄까, 상단에 속한 이들을 쓰기 마련인데, 이번 행선지가 예정돼 있던 게 아니라서 아웃 소싱 했다는 로메리스의 전언을 떠올려본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 거니.’
과정도 결과도 나쁘지 않으니 좋게 좋게 받아 들이자.
그건 그렇고 항구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배가 들어서기도 애매한데 무역 도시라….
‘아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마차 같은 걸로 짐을 옮기는 것보다 배로 옮기는 쪽이 훨씬 효율적일 텐데 말이지. 강이 있긴 했지만 큰 배를 띄우기엔 한계가 있다는 설명을 봤기에 그건 그렇다 치고.
몇 블록 떨어진 부근에 항구 도시가 있다곤 하나 아직 개발이 한창이라 당장 길을 정비하여 훌륭한 물류지, 저장 창고 및 운송지로 사용하기엔 번거로움이 뒤따른다는 설명도 추가로 적혀 있었다.
근데 읽다 보니 설명이 꽤 세세한 거 보면 이미 이쪽으로도 눈도장을 단단히 찍어둔 듯 싶었다. 그게 아니면 단순 데이터베이스 성립을 목적으로 여기까지? 아,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딱 봐도 이건 돈이 되는 건데 손을 안 대는 게 이상한 거겠지.
‘누가 손댈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물류 및 유통계를 잡는 게 사실 돈벼락 맞기 제일 좋은 위치인 건 사실이다. 그 위치까지 가기는 어렵고, 우리 세계로 따지면 이미 거긴 대기업 포함해 중상급 이상 업체들이 죄다 먹어 치운 상태라 그런 게 제대로 부각이 안 되고 있다뿐이지… 그쪽이야말로 적폐 중에 적폐라 봐도 무방할 거다.
독점은 자본과 권력을 불러온다. 기회를 공정치 못하게 해야 그들은 돈을 번다. 반박은 적으며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독점이라… 얼마나 어려운가.
“…블루 오션에 진입해 미리 시장은 선점했다, 라는 게 그거니까.”
이 경우는 명분이 된다. 우리가 시장을 개척해 이걸로 너희가 인지했고 분야로 뛰어들 기회를 안겨줬으니 먹고 사는 건 우리 덕이 아니더냐?
음, 이거 좋은데?
물론 나로서는 그저 생각하는 걸로 만족할 수밖에. 본사 사람들이 더 잘났으면 잘났지, 말단 사원인 내가 이런 생각 품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생각은 개나 소나 가능하지만, 그걸 실현시키는 게 어려운 거지.
배달 관련 프로그램, 앱을 통해 한 손으로 신속하게 배달을 시킨다.
누구나 생각해볼 법한 단순 발상이지만, 이걸 제대로 실현시켰기에 그 누구는 독일에다 이걸 조 단위로 팔아 치운 거고.
“그나저나.”
일꾼들이 짐 마차에 있는 물품들을 창고에 가져다 두는 걸 지켜보며, 뭘 해야 하나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중간에 들린 그곳 마냥 심부름꾼이나 누군가가 와서 뭐라도 해야 할 걸 알려주면 좋으련만.
‘기다리면 반응이 오겠지.’
나는 초조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렇게 생각 안 하면 당장에라도 불안해 죽을 거 같으니까!
마치 미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다 큰 놈이 뭐가 걱정이냐며 누가 등 짝이라도 때려줬으면.
“아, 이제야 왔나? 좀 돌아보고 오지 그랬나? 부지런하기도 하시지!”
그러다 불쑥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었으니.
게다가 이미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다가와 실제로 등 짝을 소리 나게 후려쳐주시기까지?!
“아, 네.”
당연히 모르는 사람이지만 마치 잘 안 다는 듯이 웃는 얼굴로 눈 마주치며 접근해오면, 사람이라는 게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내심 의아해져서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해보게 된다.
바로 그런 생각하는 찰나에… 상대는 자기 할 일 하고 가는 거지.
…심리학적으로도 써먹는 테크닉이라며 연수 중에 배웠는데 당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물론 소매치기를 당했다거나 칼을 맞았다거나… 크흠! 그런 건 아니기에 크게 불안해할 필요는 없었지만, 실제로 그는 날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지? 아, 헨릭! 자네 이리로 와보게! 이분들 물건 다 옮기고 나면….”
‘그냥 가자!’ 가 아니라 확실하게 날 대신해서 후속 처리를 해줄 이까지 섭외(?)를 끝마친 그와 함께 우린 적당히 으리으리한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외부에서 보면 마치 꽉 막힌 건물로 뒤덮여 있을 것만 같지만, 철장으로 된 큰 문 안으로 들어서면 가운데가 훵 뚫려 있어 마차 여러 대가 오고 가도 전혀 문제가 없는 교차로를 겸하는 메인 공터가 등장한다.
하늘마저 뚫려 있기에 비 오면 지면이 축축해지지 않을까 내심 걱정되는 형태였지만, 그렇기에 해방감은 확실했다.
…머리 위로 한정된 해방감이었지만.
어쨌든 공간은 넓었다. 마차 여러 대가 무수한 짐덩이, 물품, 물건들을 쫘악 늘어놓기에도 하자가 없는 적당한 넓이. 어렸을 적에 다녔던 초등학교 운동장 크기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는 됐으니까. 연병장으로 쓰거나 간이 운동회를 해도 무방할 정도의 규모면 말 다한 거지.
그리고 우린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서부터 그곳을 정중앙으로 주파해 정문, 입구로부터 제일 멀리 떨어진 맞은편 건물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소문으로 들었는데, 엘프들한테 인증 받았다며?”
“인증요?”
“라이센스…는 아니고. 전용 문양 받았다고 들었는데?”
“예, 어쩌다 보니….”
“어허, 어쩌다 보니 받을 수 있는 게 아닌데. 그거 받으려고 여기에 머무는 흑심 품은 종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혹여라도 소문 안 퍼지게 입조심하게. 들키면 자네한테 비법 듣겠다고 마구 몰려들 테니까.”
“하하… 그런가요?”
……귀 파는 법이라도 알려줘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