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16. 나름의 일상.(3)
--------
“앞서 자네가 이곳에 적응할 겸 여러 가지로 배울 게 많을 거라 생각하네만… 그 가운데 핵심적인 것들을 추려봤네. 살펴보게나.”
출근해서 휴즈와 마주하기 무섭게 그는 무언가를 정리한 듯한 종이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곳에는 간단하게 내가 무얼 배워야 하는지, 왜 그걸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평범한 예절, 예법을 배우는 거라면 크게 문제 될 건 없으나, 이곳은 알다시피 여러 종족들이 엮이는 장소일세. 그러다 보니 이런 건 많이 알아둘수록 좋을 걸세.
다음으로는 언어 및 문화에 대한 건데… 번역기가 있다 하더라도 글자를 읽고 쓰는 건 어느 정도 익혀둬야 한다는 것쯤은 다 알 테고, 중요한 건 각 종족, 나라에 따른 문화적 견해가 상충되거나 어긋나지 않도록 사전 지식을 헤아려두는 걸세.
또 지역이나 나라, 종족마다 숫자가 다르고 이러니 그런 것들도 한 번에 골고루 익혀둘 필요가 있을 것이야. 우리야 기본적인 산수며 수학 등은 초등학생 수준 정도면 다 해결되니 나머지는…
엑셀 좀 할 줄 아나? 그런 식으로 정리하는 걸 컴퓨터가 아니라 손으로 해낼 수 있는 정도면 사무 일은 거의 다 끝났다 봐도 무방하네.
다음으로는….”
수사학이라 해서 말을 잘하는 법을 익히라는데… 토론을 잘하라는 게 아니라 말을 고풍스럽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하며, 기본적인 설득이 될 법한 이곳의 표현법, 표현력을 익히라는 모양인데….
“우리야 이미 멘트 치고 구사하고, 이런 심리학적인 방법은 우리 세계 쪽이 훨씬 뛰어나니 따로 이곳에서 배우고 할 건 없지만, 그런 걸 구사하면서도 동시에 이곳에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가짐, 심리 상태, 환경에 기이한 잠재적 기재라던가… 이런 것들을 알아두려면 결국 배우고 들어둬서 손해 볼 건 없을 걸세.
그 다음은… 그래, 돈 굴러가는 원리도 좀 이해해야 할 거고, 그렇기에 나라 및 종족에 따른 기본적인 역사며 나라별 사정, 국력에 대한 것도 파악해둬야 할 걸세. 여긴 소비자가 이런 식으로 확정 지어진 가격대가 없네. 그러니 부르는 게 값이 될 확률이 높지. 그런 시세며 환율에 대한 걸 헤아려 둬야 손해 보는 장사를 안 하게 되는 거고. 나도 전문가는 아니지만 배우면 다 되니 자네도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걸세. 그리고… 어떤 쪽에 특성이나 재능을 지녔을 수도 있으니 그쪽도 한 번 알아봐도 나쁘지 않을 거고. 있다면 그쪽으로의 전직 혹은 적성을 고려한 부서 변경, 분야 변경도 가능하니 가능성은 상시로 열어둬야 하지 않겠나?”
“크흠.”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만 아파 왔다.
“마음 같아서는 아카데미에 보내는 게 어떨까 고민도 해봤지만, 여기 아카데미는 그 뭐냐, 양판소에서 나오는 것처럼 애들끼리 장난치며 청춘을 교류하는… 그런 곳이 아니고 일단 들어가면 기숙 생활까지 해야 하는 터라 그쪽은 권장을 못 하겠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른 지방으로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점은 자네가 이해하게.”
“물론이지요. 제가 일하러 왔지 놀러 온 건 아니잖습니까?”
“음, 알면 됐네. 그쪽에 관해선 로망이 없었나 보군?”
“학교에 대한 판타지는 말 그대로 판타지니까요.”
“그런 느낌을 지닌 학교? 하하호호 웃으며 학창 생활을 구가할 수 있는 아카데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거긴 대부분 귀족이나 왕족들이 다니는 학교거든. 그들 기준으로 천민이며 서민인 우리로서는 천문학적인 입학비도 입학비지만, 거긴 지내는 거 자체가 돈 지랄이라 수지타산이 안 맞거든.”
“귀족들 갑질은 덤이고요?”
“왕후장상 타이틀 가지고 가게 되면 대접은 받는 모양이지만… 아, 선생이나 강사로 출두하는 건 또 이야기가 다르지. 그러나… 자존심이 머리끝까지 오른 버르장머리없는 애새끼들한테 뭘 가르치겠단 말인가? 솔직히 열에 여덟이 진지해도 둘만 지랄해도 선생 노릇하기 번거로워지는 게 교육 현장 아닌가?”
“……하하.”
“실제로 거기에 파견된 직원 블로그 가보면 아주 가관일세. 그래도 본인이 나름 그 일이 적성에 맞으니 버티고 있는 거 같은데,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무리야. 무리!”
“적극 공감합니다.”
어지간히 자기가 맡은 분야에 자신감이 넘치지 않는 한은 무리.
설혹 탁월하다 하더라도, 태생이 다이아 수저들인 갑질의 프로페셔널들이 과연 인정해줄지도 의문이고.
“그러니까 우리는 개인 교습, 과외… 개별 학습의 방식으로 교육을 진행해볼까 하네만? 그러면서… 인맥도 형성하고 겸사겸사 물꼬도 트고….”
“물꼬 말입니까?”
“예법이나 이런 건 당연 귀족 가의 부인분께 요청하면 될 것이고, 각 종족 별 문화는 그쪽 전문가가 있으니 그들에게, 그 외에 역사 또한 귀족 가문의 강사 분을 초빙하거나 자네가 찾아가면 될 것이고, 돈 다루는 쪽은 우리가 잘 아니 이곳 직원들하고도 얼굴 트고 친해져야 할 거 아닌가? 이게 의외로 나쁘지 않은 기회일세. 배운다는 명목으로 자네는 차분하게 그들과 마주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러면서 자네가 거두게 될 실적까지 겸하면, 자네는 파격적으로, 폭발적으로 데뷔해 경계심을 사는 애송이가 아니라, 안정적으로 기반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능력 있는 애송이로서 아르세이유에 데뷔할 수 있을 거라는 게 내 예상일세. 본사에서도 허락이 떨어졌으니 나머지는 자네 선택의 문제이네만. 어떻게 생각하나?”
“음….”
이거 선택의 여지가 있는지 모르겠네. 그냥 통보잖아?
“게다가 자네가 추후 열게 되는 상점은 단순 상점이라기보다는 백화점 느낌을 띄는 곳으로 거듭날 걸세. 그러기에 대표적 상품, 시그니처에 해당하는 아이템을 최소 4개 이상을 얻어야 할 테니….”
“예? 백화점 말입니까?”
“못 전해 들었나 보군?”
“예,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들었으니 그렇다 치고.”
아니, 고작 그런 설명으로….
“시간이 지나면 차차 알게 될 테니. 나도 자네에 대한 건 아는 바가 별로 없으니, 나중에 정말 궁금하면 사수나 직속 상사에게 묻도록 하게.”
“흐음, 예. 알겠습니다.”
“아무튼 그리 결정됐으니… 아, 혹시 지금까지 해준 이야기 가운데 궁금한 사항이나 질문거리가 따로 있나?”
“…아뇨, 딱히 없습니다.”
“그러면 바로 진행하도록 하지. 시간은 금이니. 섭외는 다 끝내뒀으니 오늘 중으로 한 번씩 찾아가서 만나고 오게나. 아직 아르세이유에 도착 안 한 이들을 제외하면… 셋은 만나고 와야겠구먼. 오고 갈 길이 머니 서두르게.
여기가 이래 보여도 대한민국 서울의 반은 되는 크기의 도시네. 전철도 차도 없으니 부지런히 움직여야될 걸세. 마차는 따로 준비해뒀으니까 그거 타고 움직이고. 귀족 가 방문하는데 맨몸으로 가면 그들 품위에도 좋지 못하니.
가르치는 이의 수준이 미흡하면 그들에게도 큰 실례라는 점 잊지 말고, 부족하더라도 자신감과 예절 정도는 확실하게 지키게. 그 정도만 되면 나머지는 다 배우면 되니 모자란 점들을 따로 지적은 안 할 걸세.”
“크흠… 벌써부터 속이 쓰려 오는군요.”
“돈 다루는 이들에게 있어 귀족이며 왕후장상 상대하는 건 필수불가결한 요소네. 한 곳이라도 제대로 인맥을 트면 나머지는 순식간이니… 오히려 기회겠다 생각하고 자네 장점을 어떻게 어필할지도 잘 구상해보게.”
“…….”
장점이 따로 있는지 의문입니다만.
그리고 나는, 여기에 생각지도 못한 함정(?)이 엮여있다는 걸 당시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
흔히 학원물 해서 학교라는 표현을 아카데미로만 바꾼 건데, 평소엔 지척에서 절대로 마주칠 수 없는 왕자님 공주님이 등장함은 물론, 마찬가지로 가까이서 보기 힘든 온갖 귀족 자제, 영애들이 등장하는 요 아카데미물은 판타지 로망의 또 다른 집합체라 봐도 무방할 거다.
이는 장르를 불문하고 판타지 계통에 일맥을 형성해왔는데, 국내보단 일본 쪽이 훨씬 더 강세를 보이는 느낌이랄까? 다들 학창 생활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짜로 학창 생활이 즐거웠던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걸 보면서도 왠지 모를 괴리감을 많이 느껴 재미 삼아 보긴 하더라도 거기에 대해선 명백하게 선을 그어두는 실정이었다.
“학교가 즐거울 리가 없지.”
그래도 로망을 가져 보면 그것도 좋겠거니 하는 생각은 든다.
달리 말하면, 그런 로망… 적절한 학창 생활, 청춘을 구가하지 못한 안쓰러움이 우릴 그런 세계로 인도하는 게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솔직히 판타지 세계에서 그런 로망을 경험해볼 수 있다면 누가 마다하겠나 싶지만….
‘하렘이 더 나으려나?’
문득 어렸을 적에 친구 놈이 ‘나는 판타지 세계 가면 모든 종족 미녀들을 다 따먹을 테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한 게 불쑥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내가 그러고 있잖아? 본의는 아니지만. 아니, 본의가 아니라고 그걸 거부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지만.
그런 잡생각을 하며 마차에 탑승하길 반 시간 가량 걸렸을까.
척 봐도 으리으리한 입구? 울타리? 와 마주하게 됐다.
심지어 도시 내부인데도 울타리며 정원 등 규모가 상당한… 거기에 마차를 타고서도 5분 이상을 가도 본 저택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던가… 뭐죠 이건?
잘 정비된 길 위를 밟고 나아가는 마차는 이윽고 굴곡진 언덕길, 느낌상으론 평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지만 그러한 과정이 쌓이니 상당한 경사를 이루었다.
그렇게 다시 5분 이상을 나아가니, 확실하게 저택의 모습이 두 눈에 들어섰다.
이건 뭐 정말 영화에서 볼 법한 집이었던 게, 중앙에 자리한 커다란 본 저택과 그 양옆에 자리 잡은 규모가 소박한 건물이며 별저까지. 창고 역할을 하는 것서부터 기숙사 느낌을 주는 건물에다 하여간 다양한 건물들이 ‘ㄷ’ 자 형태로 자리하고 있었다.
의외로 중앙엔 정원이나 뭐 꽃이며 풀 같은 그런 게 널려 있다거나, 인공 호수 같은 게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게 없는 대신 큼지막한 조각상이 자리하고 있는 게 참으로 독특했다.
말을 탄 사내가 깃을 번쩍 치켜든 청동 조각상이었는데 깃의 주름 같은 게 적나라하게 묘사된 상태라 보는 이로 하여금 무척 긴박함, 박진감을 불러오고 있었다. 관리에도 주의를 기울이는지 청동상의 상태는 무척 좋아 보였다.
‘시작부터 위압되게 생겼네.’
저택 코앞까지 도래하니 왜 청동상 외에 주변에 무엇 하나 없는지 체감했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큰데?
‘…자기 집에 놓는 거야 자기들 마음이지.’
취향은 존중해주자. 더군다나 돈 많은 이들이 사치 좀 부리겠다는데, 거기에 초를 칠 필요는 없겠지. 이런 사람이 있으니 조각가며 여타 직업인들도 먹고사는 거 아니겠나. 좋게 생각하자.
“어서 오십시오. 에드릭 님. 때마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차가 정문 앞에 도착하자, 세련된 정장을 입은 노인, 집사로 보이는 이와 하녀, 메이드들 열댓이 한 몸처럼 날 맞이해주었다. 이거 다른 의미로 위축되겠는데?! 마치 내가 엄청난 손님이 된 것 같잖아?!
‘이것도 전부 기 싸움이지.’
본질을 이해하면 이런 게 체면이자 자존심, 예컨대 가문의 격을 표출하는 행위라는 걸 파악 못 해선 곤란했다.
우린 이럴 수 있다. 이 정도는 기본이다.
이런 걸로 가치를 셈 치는 부류들이 세상엔 차고도 넘치니.
“이리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네이에라 자작 가의 집사분을 어떻게 칭해야 예에서 벗어나지 않겠는지요?”
“올릭이라,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에드릭 님.”
“예, 배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올릭 님.”
뭔가 익숙하지 않은 짓을 하려니 혀가 꼬이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튼 안으로 들어섰다.
대체 귀족 가문의 부인분께 이런 걸 왜 배우는가… 오면서 참 고민도 많이 했었는데….
“어서 오시지요. 네이에라 가문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문득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모 대가 짐작이 가지 않는 여성이, 평상복 느낌의 드레스로 자신의 탐스러운 몸을 은닉한 여성이 정문 안쪽에서 날 맞아 주었다.
나이가 적당한 분을 생각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젊어 보였고, 무엇보다 이런 말이 불쑥 떠오르게 만드는 여성이었다.
Q: 왜 예쁘고 아름다운 여성 분들은 빨리 결혼하나요?
A: 예쁘니까 홀몸으로 안 내버려 두는 겁니다! 아차 하는 사이 임자 생기거든요! 사내 된 자로서 이런 이들은 어찌 가만히 내버려 둡니까?!
…백번 옳으신 말씀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