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17. 졸지에 이게 이렇게 되네?(4)
“말이 그렇다는 거랍니다.”
아, 그렇죠?
10대 초반대 소녀를 딸아이로 두신 분이 그런 소리하시면 많이 당혹스러운 거 님은 아시는지요?
“음…?”
그렇다 쳐도 유독 젊어 보이긴 하시는데….
“음, 결례를 무릅쓰고 여쭤보고 싶은 것이 생겼는데,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 말해보세요.”
“혹여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
테티아나가 흥미롭다는 듯 웃어 보였다.
“어머? 왜 갑자기 거기에 궁금증을 품게 됐을까요?”
“유독 젊어 보이셔서요.”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죠?”
“아니에요! 정말입니다!”
과장 하나 안 보탠 진실, 팩트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딘가 회의적이었다.
“젊기는 무슨. 스물 꺾인 시점에 젊다고 부르긴 그렇잖아요?”
“아니죠! 그건 절대 아닙니다! 아부하려는 게 아니라… 제가 살던 곳에선 사내든 여성이든 서른 이후에도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예가 드물지 않거든요.”
이번엔 테티아나 쪽이 놀라 되묻는다.
“…그게 사실인가요?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죠?”
“…….”
제가 동정 아다 뗀 게 최근이라는 걸 아시는지요?! 저 30줄 코앞이거든요?! 하고 외치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 넘겼다.
“같은 인간이 맞는 건가요? 엘프들처럼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어찌 그리 오랫동안 가정을 이루지 않는답니까? 상식의 개념으로 비추어 봐도, 좀처럼 알 수가 없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나라고! 옆구리가! 여태! 안 시렸겠나! 의식 안 하고! 그랬을 뿐이지!
…그 외에 야동이나 성인 관련 콘텐츠가 범람했기에 외로움을 적절히 달랠 수 있었다는 건… 음, 역시 문명은 발전해야 마땅하다! 까마득한 과거라면 정말로 배우자도 없이 쓸쓸하게 총각으로 죽었을 거 아닌가? 돈이라도 벌면 그렇고 그런 곳 간다 쳐도… 끙!
시대가 뒤처질수록 의학이나 건강 상식 등이 어긋난 것 때문에라도 생존율, 수명이 적은 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지만, 여긴 일단 마법도 있고 신성력? 그런 것도 있을 텐데? 특히 귀족 정도면 남들보다 오래 살아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중상모략이나 정치질에 개죽음당하는 경우가 빈번해서? 아님 전쟁 때문에?
사실 이곳 세계 인간 기준으론 10대 중반은 이미 결혼하고 애를 가져야 하는 나이이긴 했다.
그 맥락으로 보면 알리샤, 내게 첫 동정을 떼준 그녀는 주위에서 노처녀 소리 들어가며 빨리 남자 물어 와라 소리 들을 나이였던 셈.
‘우리 세계에선 엄연히 범죄인데 말이지.’
10대 중반이라 해도 열네다섯이잖아? 중·고등학생 시기에 민증(?!) 조차 안 나올 시기 아닌가!
그러고 보니 춘향전에 나오는 춘양하고 이몽룡 나이가 딱 그 시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열여섯? 일곱?
심지어 셰익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도 줄리엣의 어머니 되는 이가 줄리엣보다 어렸을 적에 줄리엣을 나았다는 기록도 있는 마당이니. 아, 참고로 로미오도 13세, 줄리엣도 작품상으론 13세다. 그러면 상식적으로 줄리엣의 어머니는…… 크흠!
근데… 테티아나의 외양은 아무리 애를 낳았다곤 하나 스물 초반대로 보인다. 분위기며 기세가 워낙 완고한 덕에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게 느껴지는 거지, 외양만 보면 그런 느낌이 전혀 안 든다.
그리고 프리지아는… 아무리 봐도… 10대 중반도 안 되는 걸로 보이는데? 겉이 성숙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여기선 그걸로만 판단해선 곤란했다.
20대 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10대 초반이었더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의외로 빈번하니 말이다.
“이런 사적인 걸 말하는 게 참 곤혹스럽다는 점을 알고 계시죠? 숙녀의 나이를 묻다니….”
“하하하하….”
그저 웃지요. 안 웃으면 어찌하오리까.
“현재 저는 26세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서른 줄….”
“예? 아니아니, 그거 밖에 안 되셨다고요?!”
놀라서, 어이가 없어서 상황도 잊은 채 그리 내뱉고 말았다.
잠깐만?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냐?
“프리지아 영애는….”
“무, 무례한! 어, 어떻게 그런 걸 함부로 물어볼 수 있는 거죠?!”
당황스런 표정으로 그리 쏘아붙이는데, 그때서야 선을 넘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우쳤다.
“맙소사…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나도 큰 결례를….”
“그게 별거 있다고 그런 반응이니? 저 아이는 올해로 열둘에 해당합니다.”
“어머니!”
“열둘….”
우리나라식으로면 열셋으로 쳐야 하나?
그럼에도 겉은 훨씬 성숙해 보이는데,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 때문인가, 아니면….
아니, 그 전에….
“임신하게 되면 아무래도 한동안 가업을 수행할 수 없기에 보통 가주 자리를 넘겨받기 전 최대한 많은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게 우리 가문의 의무지. 이 아이도 저처럼 반항기가 심해 여태까지 미루어뒀지만, 저 같은 후회를 하지 않도록 지금이라도….”
이거 상식의 차이가 이리도 어긋나면 그 자체로도 혼란이 야기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이래서 문화를 이해 못 하면 큰 혼란이 생긴다고 주위 분들이 자꾸만 강조를 한 건가? 사람도 이러한데 나중에 이종족, 아인족들하고 엮이면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괜스레 궁금해졌다.
‘아….’
그런 거였군.
확 와닿았다.
여태 실감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는데, 왜 그리들 어린 날 깍듯이 대했는지 말이다.
우리 세계로 치면 현재 내 아바타, 에드릭의 몸은 어린 꼬맹이인 게 맞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성인식을 치르기 직전, 결혼까지 해도 문제가 없을 그런 나이였던 거였다.
…전체적인 통계로 귀족들이 평민들보다 훨씬 이르게 약혼을 맺어 혼약을 통해 합방으로까지 이어지는데, 정략혼이 대부분은 귀족들은 아무래도 빨리 침을 발라둔다는 개념이고, 평민이며 서민들은 흔히 말하는 사랑이든 관심, 호감, 어쩌다 술김이든 축제며 파티, 잔치로 흥이 돋아져 육체적 관계로 번져 서로를 알게 되고, 그러다 맺어진다는 식이 훨씬 더 두드러진다고 얼마 전에 배웠는데, 역시 몰랐을 때보다 알고서 이런 상황을 접하니 조금은 충격이 적게 전달되는 듯 싶었다.
‘달리 말하면….’
어린 시절부터 어른 취급을 받는다 이 이야기인가.
이거 참, 빨리 성숙해질 수밖에 없겠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 그렇다는 식으로 배웠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점을 아주 제대로 실감하게 된 거였다.
‘편견이 참 무서워.’
배움의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하구나.
“저는 어쨌든 두 분 모두가 만족스런 결과로 이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둘 모두가 만족한다? 그게 가능하리라 보나?”
이에 대해 테티아나는 제법 부정적인 듯한 반응을 보였다.
“예,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흐음….”
“일단 들은 내용을 토대로 정리를 해보면, 테티아나 님께선 영애가 자식을 가져 가문의 입지를 굳힘은 물론, 빠르게 철이 들어 가문에 이바지하길 바라시는 걸 테지요?”
나는 테티아나를 지긋이 보며 물었다.
“…그렇지.”
이번은 프리지아를 지긋이 바라보며 의견을 대변해봤다.
“그러면 프리지아 영애께서는 약속한 연인이 있으며, 자신의 의지는 개의치 않고 이런 일이 전개되는 걸 원치 않으시는 거고요?”
“……맞아요.”
“아까 듣기로 입양은 아니된다면, 결국 둘 중 하나네요. 프리지아 영애께서 아이를 낳던가… 아님 테티아나 님께서….”
“나는 무리지. 이 나이에….”
“전혀 그렇게 생각 안 됩니다만.”
“……그대는 이상할 정도로 날 높이 사는군.”
“아니, 여기 거리 한복판에 나가서 테티아나 님의 미모에 대해 논해보면 싫은 소리, 나쁜 소리가 단 한 건수도 나오지 않을 거란 사실에 제 손목을 걸 수 있습니다. 당장 나가보시겠습니까?”
“…사람이 과장은.”
아이고 미치겠네! 왜 저리 자신을 과소평가 한담?
“…어머니, 이런 말씀 드리긴 그렇지만 지금 어머니 외모 가지고 걸고 넘어질 무지렁이들이 있을 거 같진 않은데요. 눈에 이상이 생겼거나 변태성욕자가 아닌 이상….”
“둘이 사전에 모의한 건 아닐 텐데, 의견이 참 잘 맞아? 이 기회에 속궁합도 맞춰보는 건 어떠냐?”
“…하하하.”
그저 또 웃지요. 할말이 궁할 땐 웃어라. 웃은 다음 침묵이 이어지지만 않게 해라. 그러면 껄끄러운 대화도 대부분 스무스하게 풀릴 것이다.
“내가 지금 잘못 이해한 게 아니라면… 그대는 지금 내가 아이를 낳았으면 하는 건가?”
자연스럽게 존대가 반 존대에서 사실상 하대 직전까지 도달했지만, 이건 그만큼 대하기가 편해졌다는 반증이기도 할 거다. 한편으로는 압박을 주는 거기도 할 거고. 이런 종류의 압박에 익숙해져야 저런 이들과 친분을 다질 수 있다면, 녹아들 수밖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가문의 모든 업무가 차질을 빚으니, 이러면 어떻습니까? 마치 어린 왕을 대신해 왕의 어머니 된 분께옵서 마땅히 수렴청정(垂簾聽政)하듯, 프리지아 영애에게 일을 맡기어 실전 감각을 익히도록 하시며, 동시에 일이 어긋나거나 중도에 엎어지는 일이 없도록 테티아나 님께서 이를 철저히 살피시며 올바른 조언을, 때때로는 엄한 지시를 내리시어 프리지아 영애를 이끄시는 건요?”
“……흐음.”
테티아나는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
반면 프리지아는 뭔가 엄청 고민되는 듯한 모습이었고. 내 제안대로 이루어진다면 자신이 사실상 가주 대리가 되는 건데, 그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부담감을 느낀 게 아닐까 생각된다.
음,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 본다만.
사실상 테티아나가 자신이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한 편견, 고정 관념 때문에 돌파구를 마련 못 했다 뿐, 가능 여부를 점치면 의외로 서로 윈윈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여기서 문제는 테티아나가 아이를 낳을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애를 낳는다는 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생스러운 부분이니 말이다.
“프리지아, 너도 잘 알겠지만 네가 누군가와 맺어진다는 건 달리 말하면 우리 가문에서 축출 당하겠다고 자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건 잘 알고 있겠지?”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네가 입고 있는 옷이며, 몸을 누이는 침대, 외출할 때 끌고 가는 마차며 시종들 모두가 우리 가문에서 비롯된 거다. 거기에 네 몫은 무엇 하나 없다는 점을 알거라. 맨몸으로 나가서 네가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 테냐? 몸 성히 지내기만 해도 기적 같은 일이라 본다만.”
크흠! 사춘기 소녀한테 저런 팩폭 날려버리면 심적으로 울컥해서라도 ‘괜찮아요! 전 알아서 잘 살 거예요. 참견 마세요!’ 하는 반응을 보일 텐데, 너무 몰아붙이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저 봐라. 역시나….
“참고로 축출된 시점에 네가 여태 누려온 모든 걸 셈 쳐서 빚으로 달아둘 거다. 네 애인, 남편될 자가 그 금액을 감당 가능할지도 궁금하구나.”
“어, 어머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 될 게 뭐가 있지? 네 스스로 가문을 박차고자 한다면 그 정도는 감당 가능할 배우자이기에 그런 각오를 했던 게 아니더냐? 그조차 감당 못 하는 주제 죽는 그 순간까지 널 지탱하고 보살펴준다는 걸 나로서는 감히 납득하기가 어렵구나.”
“그건…….”
음, 역시 연륜을 못 이기지요. 암.
거기다 경제적 실권을 잡고 있다는 건… 예사로 볼 일이 아니다.
“나는 결정을 내렸다. 내가 아이를 낳는다 치면 너는 이곳에서 실무를 배우고, 이후 그 아이가 자랄 때까지 네 스스로 여기서 받아온 모든 것들을 셈 치고 나가거라. 그러면 빚을 달지 않으마.”
“어머니, 그렇게까지!”
“우리 가문은 귀족 이전에 상인이다. 돈으로 흥해서 돈으로 가세를 굳혀온 가문이다. 돈을 대함에 있어선 혈연도 뭣도 없다. 여자가 맨몸으로 홀로 살아간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았더냐?!”
“자자, 조금은 영애께도 생각할 시간을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테티아나 님?”
“…….”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런데 기분 탓이었을까. 순간적으로 잘 만류했다는 듯 눈웃음을 지어 보였던 거 같은데… 으음?
“위기는 폭우처럼 쏟아진단다. 먹구름이 끼는 걸 보았다면, 앞서 폭우를 피할 장소를 물색하거나 몸을 피하지 않는 한, 온몸이 홀딱 젖는 것은 예외가 없는 사실이지. 사업도 이와 같고, 인생의 굴곡을 건너고 뛰어 넘는 것도 이와 같단다.
위기며 시련은 항상 이렇듯 급작스럽기 마련. 프리지아,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하도록 하마. 왜냐하면 너는 내 하나뿐인 딸이니까. 그러나 그 선택에 대한 책임까진 내가 책임져주진 않을 거란다. 네 인생이 네 것이라 천명하려 한다면, 그 순간부터 삶의 모든 무게는 온전히 네 스스로 감당해야 짐이 될 것이다. 내 말 잘 알아들었느냐?”
“…예, 잘 알아들었습니다.”
“좋다. 대답은 내일 듣도록 할 테니 이만 가보도록 하거라. 이 이상 사족을 달아봤자 머리만 복잡해질 듯하니. 차분히 생각해보거라.”
“예, 어머니.”
차분히 몸을 일으켜 테티아나와 날 향해 목례 하곤 자리를 뜨는 그녀.
그녀가 확실히 문을 나서기까지, 그 이후로도 한 10초 정도 침묵한 우리는….
“기발한 제안이었네, 에드릭 공.”
“하하하, 무슨 말씀을….”
“그런 식으로 완곡하게 저 아이의 심중을 굳히려 들다니, 보기보다 제법 아닌가?”
“……??”
“??”
뭔 소리지? 뭔가 핀트가 안 맞은 거 같은데?
“아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