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18.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더라?(5)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해산물에 대해서요?”
“그건 왜요?”
“유통로가 제대로 구축 안 되니 너무 비싸고, 그러다 보니 시민들이 접하기엔 아무래도 부담이 되는 거 같아서, 이걸 해결하면 먹거리가 조금 더 풍부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러면 돈이 될 거란 생각은 아니고요?”
“겸사겸사죠.”
그녀가 앵두 같은 입술을 질끈 깨물다 말을 이어갔다.
“남들이 못하는 걸 해야 돈을 번다. 어머니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시죠. 남들은 당연한 거다, 힘들다, 어렵다 할 때, 바로 그걸 해내야 돈이 된다고 하셨는데, 생각하는 방식이 비슷하신 거 같아요. 그래서 어머니하고 그리 호흡이 잘 맞나 싶기도 하고….”
“부러우세요?”
“전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테티아나 님은 프리지아 님을 위한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아무래도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죠.”
“…너 나이 몇 살이야?”
음?
“궁금하십니까?”
“나보다 어린 거 같은데 말투가 이상하게 어른스러워. 행동거지도 그렇고. 예법을 배운다고 천성이 바뀌진 않을 텐데. 어렸을 적부터 혼쭐이 나며 그렇게 자라나지 않고서야….”
“경험담입니까?”
“…네네. 맞아요. 경험담이랍니다.”
그녀는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안 익숙해지는 걸 어떡해? 너처럼 능글맞지 못해서 협상도 안 되고, 속내가 표정에 드러나고 머리는 제대로 안 돌아가고….”
“별로 걱정거리는 아니네요.”
“이게?!”
정색하는 그녀의 눈앞을 향해 ‘잠깐!’ 하듯 손바닥을 펼쳐 보여 다음 행동을 제지 시켰다.
제스처는 때때로 말보다 더한 힘을 발휘한다.
특히 사람이 감정적으로 변할수록, 귀보단 아무래도 시각 정보에 몰빵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니, 바로 그 시각 정보에 무의식적 기제를 발동시키는 행위가 사람 진정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던데, 써보니 정말이더라.
“영애께선 귀족이잖아요? 이건 다분 선천적인 건데, 바로 이 선천적인 건 대단히 큰 장점이랍니다?”
“누가 그걸 몰라요? 그게 무슨….”
“귀족인데도 상인임을 자처하기란 쉽지 않죠. 자존심으로 먹고살고 체면을 목숨보다 귀중히 여기는 그들인데, 돈을 천하게 보면서도 의존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의 귀족들과 달리, 말이 통하고 제대로 대화가 가능한 귀족, 심지어 우리와 같은 일에 종사한다? 상인들 기준에선 대단히 메리트 높은 교류 대상, 거래 대상이 아닐까요?”
“그건….”
잠시간 생각해보려는지 침음하며 팔짱을 낀 그녀.
음, 이런 태도는 좋다. 감정적으로 자기 고집, 자기 견해를 굳히려 억지를 부리지 않고, 일단 들은 내용을 진지하게 검토해보는 자세.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프라이드가 높고,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일수록 타인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내리 뭉개려는 태도들이 강해지는 게 보통 아닌가.
평등사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민주주의 시대, 현대에서조차 서비스직을 못살게 구는 갑질러들이라거나, 돈 좀 있다고 경비직을 노예라 대놓고 불러댈 정도로 안하무인인 이들이 버젓이 있는 판국에, 이곳 세계에서의 귀족은 태생이 갑질을 부려도 되는 위치라 착각하기 쉬운 위치가 아닌가.
그러니까, 내심 반기지 않고 불편해하더라도, 그러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만 해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거였다.
“영애가 일을 잘할 필요는 없어요. 머리가 엄청 좋을 필요가 없고요. 영애는 부리는 자예요. 스스로 초인이 되려 하지 마세요. 되셔도 괜찮긴 하지만, 그게 힘들다 싶으면 대신할 사람을 만드세요. 그래야 노후도 편하고, 일은 일대로 안 하면서 돈은 돈대로 벌고. 실리도 챙기고 명분도 사고, 삶도 여유로워지고, 하고 싶은 것도 하면서… 이게 훨씬 살아가는데 이득이 아닐까요?”
“……마치 사람 잘 부려서 놈팡이처럼 살아가라는 듯 들리는데요?”
“그게 뭐 어때서요? 내가 그리 살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요? 그게 죄는 아니잖아요? 어느 나라 법이 놈팡이처럼 살지 말라고 뭐 법전에 써놓기라도 했나요?”
나는 손을 펼쳐 보이며 주위를 환기하듯 그녀와 한 걸음 떨어져 손짓했다. 주위를 둘러보라는 듯.
“이렇게 뭐 먹고 싶을 때 먹으러 나들이도 나오고, 낮잠 자고 싶을 때 자고, 검 구입하셨다고 했죠? 좋은 검도 사고, 검술에 조예를 얻고자 하면 사람 상대하고 거래하고 협상의 기술을 익히기보다는 그 시간에 검술 훈련을 하는 게 더 낫겠죠? 결과적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그게 정말 내가 원하는 건가? 그걸 생각해봅시다. 젊을 때부터 너무 현실적으로 살면 나이 먹어서 피곤해져요. 후회도 될 거고.”
“…마치 그런 경험을 해봤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나이가 몇이신가요, 그대께서는?”
“독서를 통해 현인께 지혜를 빌린 거라 해두죠. 저야 보시는 바처럼 젊습니다. 많이. 엘프도 아니고 뭐 폴리모프한 드래곤 같은 것도 아니고요.”
“…너는 정말 난 사람이긴 하네. 어머니께서 딱 좋아하실 스타일이야.”
후우! 하고 뭔가 아쉬운 듯 혀를 차는 프리지아.
“내가 너 같이 말주변이 있었다면 조금은 어땠을까 싶네.”
“말솜씨는 배워서 바꿀 수 있습니다. 제가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필요하시다면 도움을 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나라고 뭐 안 배워 봤겠어? 그래도 별 차도가 없으니까 이런 거지.”
“해보셨어요?”
“??”
“저한테 안 배워보셨죠? 해봐서 안 되는 게 어디 있죠?”
“아니 해봤다니까 뭔 말을….”
“저한테 안 배워 봤잖아요? 저한테 배워서 잘 풀리시면 어떡하실래요?”
“그건…… 아니, 너 대체 왜 그리 자신감이 넘치는데?! 나보다 어린 주제!”
나이에 대해 동방예의지국보다 덜 민감한 이곳조차도 역시 어려 보이는 건 시비 걸기 딱 좋은 명분인 거 같다.
물론 상대가 논리에서 패배해 인시 공격으로 접어 들었음을 시사하는 건, 이미 말로 못 이겨 먹겠다고 인정할 꼴이지만, 그걸 구태여 상기 시켜 상대의 자존심을 짓밟아 상처를 줘선 안 될 거다.
내 목적은 상대와 친분을 다지고 원활한 교류를 이어가는 거지, 단순 말싸움에서 승리해 소극적 승리감을 쟁취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상대 심보를 상하게 한다? 어딜 어떻게 봐도 득보단 실이 압도적으로 많지 않나?
그러니 이때는 여유를 선보인다. 여유롭기 힘들면 거짓된 여유라고 가장해 보이던가.
“패기는 상인의 미덕이랍니다.”
“그건 군주나 영주들이 갖춰야 될 거지 상인이 갖출 건 아니지 않니?!”
“상인이든 기사든 인생이란 승부 앞에선 언제나 의연해야죠. 우린 언제나 투쟁에 투쟁을 일삼고 있지 않습니까? 살아간다는 건 투쟁의 연속. 결국 제가 상인이든 기사들 술주정뱅이든 패기를 지니고 부려야 한다는 사실엔….”
“아, 그래! 너 말 잘 한다! 잘해! 나쁜 놈아!”
…왜 나쁜 놈이라 하시는지요? 괜스레 상처받게?
“아무튼 해보시는 거죠?”
“……어머니가 허락하면.”
말하면서도 자기변명이 어처구니가 없는 걸 깨달았는지 헛웃음을 삼키는 프리지아.
“당연히 허락하시겠지. 에고.”
“뭐 내친 김에 바로 가서 허락받죠.”
“……뭐?”
“시간은 금이랍니다. 나중에 허락받고 이러면 번거로우니 시간 날 때 가시죠.”
“아니, 너무 빠르잖아! 뭔 결정을 그리….”
“안 하실 건 아니잖아요? 원하시니까 이렇게 열정적으로 그 속내를 제게 말씀 주신 거 아닌가요? 제가 도움을 드리고 그 도움을 받아서 영애의 말주변, 말솜씨가 늘면 자신감도 생길 거고, 그러면 더욱 살아가는데 보탬이 되고, 좋은 일들이 허다하게 생기고 그러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 저한테 한 번 도움을 받아 보시려고 생각을 하다 이렇게 결정하게….”
“아, 알았어! 할 테니까 그만! 듣다 보니 나만 멍청한 거 같잖아!”
“음? 그걸 이제야 아셨….”
“야! 말 다했어?!”
“아직 반도 안 했는데요?”
“정말…….”
음, 아이스 브레이킹은 진작 끝났군.
이 정도로 속내를 팍팍 드러내고, 자기 심정마저 팍팍 드러내 보였다는 건, 어느 정도 친밀도가 쌓였다는 거다.
신뢰는 그 다음이라 치고.
말이 좀 통하고 대화가 된다고 신뢰가 쌓였다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그러기에 방심하지 말며, 줄다리기에 명수가 되기 위해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릴 것.
말도 잘한다고 나대다 말실수하면 단방에 가는 거다.
입으로 흥한 자, 입으로 망하고, 펜대로 흥한 자, 펜대로 망하리.
…책 꾸준히 읽어둬서 다행이야. 그럴듯한 문자 나불대는데 이리 도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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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지아, 내가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알고 있겠지?”
“…예. 그 점이 너무나도 슬프군요.”
“녀석이?”
자신이 딸이 능청을 떠는 게 조금 의외였을까. 약하게 웃음소릴 낸 테티아나가 이윽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연히 거기 갔다가 만났다는 말을 내가 믿어야 할까요, 어떨까요?”
“정말 우연은 맞아요. 애당초 전 상상도 못 했다니까요. 뭔가 기품이 넘쳐 보이시는 분이 가죽 모자 눌러쓰고 때가 탄 옷 입고 등장했을 때는….”
“그, 그거야 위장이니까요! 거기서까지 뭐 보란 듯이 차려입은 녀석들이 좀 몰상식한 거지!”
“당당하면 거리낄 게 없지 않나요? 오히려 나 돈 많으니 내게 잘 보이면 돈 많이 벌 수 있을 거다? 이런 걸 온몸으로 뿜어내면 얻을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나요?”
“…안 그러려고 대충 차리고 간 거였잖아.”
“그렇겠죠?”
“알면서 지금 괜히….”
그러다 문득 신기한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는 테티아나를 보며, 프리지아는 한껏 얼굴을 붉히더니!
“아, 아무튼 전 할 말 다 했으니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하고는 줄행랑을 치듯 사라지는 게 아닌가.
그 뒷모습을 잠시간 물끄러미 지켜보던 테티아나님께옵서는
“생각보다 훨씬 능력 있으시네, 우리 에드릭 님은?”
능청스러운 어조로 그런 소리를 해주시는 게 아닌가.
“에이, 운이 좋았죠.”
당연 거기에 콧대가 높아지지 않도록 적당히 대응하는 것도 잊지 않고.
비행기 태워준다고 비행기 탔다간 난리 날 수 있다. 항상 방심않고 몸가짐을 바로 할 것. 정신 똑바로 차릴 것.
실수는 정신이 풀렸을 때, 긴장감을 놓았을 때 자주 발생한다.
일이 잘 풀리고 있을 때가 실은 가장 긴장해야 할 때다.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도 그 순간이니.